여러 가지 삼각관계들
반로국 병사들이 절벽 아래로 내려오는 은방울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저기 달아난 적화국 군장의 아내가 있다!”
“묶어라!”
야고가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병사들이 은방울을 묶었다.
“아니오. 이 여자는 뚝갈의 아내가 아니오. 이 여자는 그냥 신녀요.”
무사 쇠똥이가 병사들을 말리면서 야고에게 외쳤다.
“은방울, 무사했구나!”
은방울은 증오로 가득한 눈으로 쇠똥이를 바라보았다.
“흥. 고양이 쥐 생각하는거냐? 지금. 너와는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은방울은 반로국 군사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야고가 은방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가 적화국 군장 뚝갈의 아내요.”
야고는 아름다운 은방울을 흥미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니오! 이 여자는 그냥 신녀요! 군장의 아내는 다른 곳으로 도망친 것 같으니 그 여자를 잡으려면 당신들이 알아서 잡으시오.”
은방울의 말에 놀란 쇠똥이가 황급히 달려와서 은방울의 손을 잡아끌면서 말했다.
“넌 나와 함께 가자.”
은방울이 쇠똥이의 손을 뿌리치면서 말했다.
“놔라! 이 무엄한 놈. 무슨 헛소리냐?”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자 야고가 빙글빙글 웃으면서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 여자가 뚝갈의 아내이든 그냥 신녀이든 그건 내가 알아서 밝혀내마. 그런데 그전에 먼저 해결해야할 일이 있어.”
갑자기 야고는 강철검을 뽑아 쇠똥이의 가슴을 찔렀다.
“으윽! 왜 나를?”
야고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쇠똥이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넌 이제 우리에게 쓸모가 없다. 너 같은 놈을 살려두면 언제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그만 죽어줘야겠다. 잘 가라!”
야고는 쇠똥이의 가슴에 박힌 검을 내려그으면서 차갑게 말했다. 쇠똥이는 토끼처럼 놀란 눈을 뜨고 허망하게 쓰러졌다.
“이 여자를 데리고 성안으로 돌아가자.”
반로국 군사들이 은방울을 묶으려고 하자, 야고가 저지하면서 말했다.
“군장의 식솔이니 곱게 모셔라.”
산 아래로 내려가면서 야고는 은방울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은방울이 반로국 군사들에게 둘러싸여 적화국의 성안으로 들어오자 마당 한켠에 죽은 적화국 무사들의 시신이 즐비하게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한가운데 처참하게 죽은 오라비 뚝갈의 시신과 타래부인의 시신이 보였다.
은방울은 그 모습을 보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흑흑흑.”
그 모습을 본 반로국 수장 고광이 물었다.
“이 여자가 뚝갈군장의 아내냐?”
“예. 근처 산사에 숨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데려왔습니다.”
“더는 적화국 군장의 식솔이 없는 것이냐?”
“예. 포로들 말로도 적화국 뚝갈은 그 어미와 아내밖에는 다른 식구가 없다고 합니다.”
“군장의 식솔들은 모두 포로로 끌고 가야한다. 비름! 비름! 어딜 갔느냐? 군장의 식솔은 네가 감시해라!”
은방울은 비름이라는 이름을 듣고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몇 해 전 헤어진 어릴 적 동무 비름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모습처럼 나타났다. 은방울은 비름의 얼굴을 보자마자 충격과 배신감으로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비름은 은방울의 얼굴을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밧줄로 은방울을 포박했다.
은방울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렸고,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리고 곧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며칠 후, 은방울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그녀는 아늑한 방안에 누워있었다.
은방울을 위한 비름의 배려였다.
“정신이 드십니까?”
은방울과 함께 온 시녀 개별이가 말했다.
“어떻게?”
시녀 개별이가 은방울을 일으키고 약사발을 내밀었다.
“반로국 군장의 아들이 신녀님을 배려해서 약까지 지어보냈습니다. 원래 포로는 감옥에 처박아놓는다는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소인도 모르겠습니다.”
은방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반로국 군장의 아들이라니?”
“아! 그 왜 있지 않습니까? 아가씨를 묶었던 그 키 크고 얼굴이 착해보이던 젊은 총각 말이에요. 그 야수같이 생긴 놈은 반로국 군장의 첫째 아들이고, 착해보이던 젊은 총각이 둘째아들이래요. 그런데 아무래도 그 둘째아들이란 사람 말이에요. 아가씨를 여기에 직접 들쳐업고 와서 눕히는데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어요. 그 사람이 아가씨를 보통 좋아하는게 아닌 것 같았어요. 안그래도 그 사람이 아가씨를 업고 와서 이 동네에 그 사람이 아가씨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쫙 퍼졌어요.”
시녀 개별이의 설명을 들은 은방울은 더 정신이 혼미해졌다.
자신의 친구였던 비름이 원수의 아들이었다니, 은방울은 비름에 대한 온갖 감정으로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 다시 자리에 누웠다.
비름이 은방울이 기거하는 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때 형수 금마타리가 그런 비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기서 뭐하십니까?”
금마타리가 묻자 비름은 화들짝 놀라서 바라보았다.
“아...아니...저...그냥 좀.”
“아버님께서 혼사문제로 부르시니 어서 가보시어요. 정혼녀도 함께 와 있답니다.”
형수 금마타리는 비름의 뒷모습을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한참을 바라보았다.
‘뭐야? 포로로 끌려온 여자를 업고 오지 않나? 거처를 마련하고 약을 달여주질 않나? 뭐지?’
비름은 아버지 고광의 처소로 갔다. 거기에는 가시혜국 수장 장대와 그의 딸 하늘말나리가 있었다. 하늘말나리는 비름을 보고 수줍어서 배시시 웃었다.
“아버지, 부르셨어요?”
“어. 그래. 마침 잘 왔다. 네 혼사일로 의논할 것이 있어서 불렀단다. 이번달 보름에 네 혼례를 올리기로 했다.”
“네? 버..벌써요?”
비름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자 하늘말나리는 왠지 기분이 상했지만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벌써라니? 왜 막상 혼례를 올린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운 게냐? 그렇게 알고 가서 준비하거라.”
비름이 아버지의 처소 밖으로 나와서 은방울이 머무는 집 앞 연못 주위를 거닐고 있었다.
마침 개별이의 부축을 받고 나온 은방울과 마주쳤다. 은방울이 시녀 개별이에게 말했다.
“넌 잠시 물러가 있거라.”
비름이 은방울에게 머뭇거리면서 다가갔다.
“몸은 좀 괜찮아졌니? 정말 오랜만이야.”
하지만 은방울은 비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름의 오른쪽 따귀를 갈겼다.
그리고 왼쪽 따귀도 연달아서 갈겼다. 은방울은 분이 풀릴 때까지 계속 비름의 따귀를 때렸다. 비름은 자신의 뺨을 감싸쥐고 눈물이 글썽해졌다.
“내가 너에게 아무 할말이 없다. 때려서 분이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더 때려.”
은방울은 비름을 무섭게 노려보면서 말했다.
“차라리 죽게 내버려두지 그랬어. 네가 나한테 친절을 베풀면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았어? 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기만했어. 네 아버지, 네 형은 내 가족을 죽이고. 내 나라를 무너뜨리고. 너는 나를 속이고, 기만했어. 너 이러려고 옛날에 처음부터 나한테 접근한거지? 이 나쁜놈! 네가 나한테 한 짓 꼭 후회하게 만들테다!”
은방울은 창백한 얼굴로 독설을 퍼붓더니 돌아서서 가버렸다. 부어오른 뺨을 어루만지던 비름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나무 아래에 주저앉아 비름은 울고 또 울었다.
그런 모습을 하늘말나리가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말나리는 비름과 은방울이 예전부터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원수지간이 되었다는 것도.
그 순간 번쩍 번개처럼 하늘말나리의 머릿속에 비름과 은방울이 손을 잡고 빙빙 도는 모습, 둘이 앉아서 물장구를 치는 장면이 보였다. 하늘말나리는 순간 어지러움을 느끼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하늘말나리는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잊게 해 줄 거야. 지나간 인연은 아무 힘이 없다는 걸 보여주겠어.’
그날 밤, 가시혜국의 수장 장대는 하늘말나리에게 강철검 한 자루를 주었다.
“이 검은 가시혜국 수장들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검이다. 이제 비름은 내 사위가 되었으니 이 검은 비름에게 가야겠구나.”
하늘말나리는 매일 밤 신녀들이 기도하는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의 제단에 아버지 장대가 준 강철검을 올려놓고 기도를 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 검을 가진 자를 보호해주시옵소서.”
하늘말나리가 눈을 감고 중얼중얼 기도에 열중할 때 밤하늘에서 별똥별 하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그때 어디선가 보랏빛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대지의 여신이 나타나 강철검에 ‘후’하고 입김을 불어넣었다. 강철검에서는 보랏빛 광채가 스며들었다. 하늘말나리가 무슨 기운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때 여신은 한 줄기 빛이 되어 사라졌다.
열흘쯤 후에 비름과 하늘말나리의 혼례식이 치러졌다. 비름은 무표정한 얼굴로, 하늘말나리는 방글방글 웃으면서. 그런 그들의 혼인을 은방울은 무심상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또 그런 은방울을 야고가 흐뭇한 표정으로 훔쳐보았다.
신혼 첫날밤, 하늘말나리는 비단으로 싼 강철검을 꺼냈다.
“이건 가시혜국 수장들에게 대대로 전해져오는 강철검이야. 수천만번 담금질을 해서 만들었대. 아버지께서 너에게 주시는거야. 앞으로 위험할 때는 이 검을 써.”
비름은 강철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만든지 오래된 것 같았지만 굉장히 단단하고 견고하게 만든 것 같았다. 칼날에는 오묘한 보랏빛 광채가 서려 있었다. 비름이 검만 들여다보는 것을 본 하늘말나리가 강철검을 빼앗아 치웠다.
“이건 내일 봐. 지금은 나를 보는 시간이잖아.”
그리고 하늘말나리는 비름을 안고 고개를 휙 돌려서 촛불을 껐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반로국과 가시혜국은 통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