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단은 누군가를 찾는 듯 왕궁을 배회하고 있었다.
마침 복도를 가로지르는 한 시종을 불러 세웠다.
“어이, 거기!”
“예? 부르셨습니까.”
“오늘, 누나를 봤는가?”
“저는 뵈옵지 못했습니다. 공주님을 모시는 시녀들도.. 잘 모르겠습니다.”
“시녀들이 보이거든 나에게로 불러주게.”
그리곤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보냈다.
‘아침 정원에도 안 보이고...’
그는 곧장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걸터앉았다.
‘누나 방에 가 봐야겠네. 설마 나가서 아직 안 들어온 건 아니겠지?’
똑 똑 똑
“왕자님... 시녀입니다.”
문을 열자, 두 시녀가 땅바닥에 바짝 엎드러졌다.
“필리아는?!”
시녀 한 명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공주님이 낮에 저희에게 와인 몇 잔을 권하셨는데... 그만, 와인에 취해 이제껏 공주님이 안 오신지 모르고 자고 있었습니다.”
“뭐? 누나 방에 가봐야겠다.”
에단은 황급히 필리아의 방으로 향했다.
오로지 와인만으로는 사람을 하루 종일 잠들게 할 리가 만무했다.
에단이 방문을 열었고 역시나 필리아는 자리에 없었다.
와인잔 3개는 탁자 위에 있었고 흰 가루가 반쯤 남아있는 작은 병이 굴러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
.
.
“형, 형!!!”
“왜 그러니? 에단.”
늦은 시간까지 집무실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다.
“누나가 사라졌어!”
“뭐? 필리아가? 언제부터?”
“시녀 말로는 오늘 낮부터라는 것 같아.”
“곧 자정인데, 그때면 돌아오겠지.”
“카일 제이드는 언제 나갔지? 누나를 데려갔나?”
“...”
아이작의 눈빛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카일이 필리아를 데려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고 순번을 마치고 돌아온 경비대원이 외쳤다.
“왕자님! 외곽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러는가?”
“숲 외곽 쪽 순찰대가 돌아오질 않습니다.”
그때서야 둘은 심각성을 느꼈다.
모두가 바쁜 일정 속에 전날 오크와의 전투를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시스웰의 소튼 회담에 가신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사고가 났다.
“지금 소집할 수 있는 병사들은 모두 준비시켜라. 최소한의 수비대만 두고 숲을 뒤져야 해.”
아이작이 경비 대원에게 말했다.
에단은 그사이 방으로 돌아와 허리띠만 착용하고 평소 쓰던 검에 손을 가져다 댔을 때,
왠지 ‘고대 검이 더 유용할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고대 검으로 손을 옮겼다.
아이작이 병사를 모으는 사이에 에단은 먼저 말을 타고 성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에단, 혼자 가지마!!! 어두운 곳에선 불리해!”
형의 말을 무시하고 곧장 숲으로 말을 달렸다.
“누나! 누나!!”
숲 입구에 말을 묶어두고 돌아다니며 외쳤다. 메아리만 울릴 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저 멀리 보이는 성 쪽에서는 아이작과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래, 조금만 더 안으로 들어가 보자.’
어두워서 그런지 저번에 왔던 길과는 사뭇 달랐다.
그의 오감이 모든 소리에 민감해졌다.
크아아아아!
숲 안쪽에서 오크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따라가서 제거했어야 했어...’
녀석의 소리를 따라갔다.
더 깊이 더 깊이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 대자 검의 열기가 느껴졌다.
칼자루에서 고대 검을 뽑아내었고 그것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좋아.’
어느새 놈의 소리는 사라졌지만, 검의 푸른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근처에 있구나.’
주변 나무들 사이 사이로 온 신경을 쏟았고 숨을 가다듬었다.
후우-
“그래, 와봐, 어디 한 번.”
검을 양손으로 꽉 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른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얏!”
탱~!
“어?”
“에단?”
카일이 검을 거두었다. 카일 뒤로 필리아가 보였고 둘은 매우 지쳐 보였다.
“뒤에!!!”
잔가지들을 부러뜨리며 그들을 따라 오크가 등장했다.
‘나랑 마주쳤던 놈이다.’
“에단, 한 놈이 더 있어.”
왼쪽에서도 오크 한 마리가 더 튀어나왔다.
“누나, 무기 있어?”
필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우선, 이거 받아.”
에단이 부츠에 꽂아두었던 단검을 건넸다.
오크가 바짝 다가서자, 고대 검에서 불꽃이 한 번 크게 일었다.
‘오크도 당황했어.’
이내 오크와 사람 간의 결투가 벌어졌다.
챙!
태앵!
몇 번의 검이 오가기 전에 가까운 곳에서 아이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횃불을 든 병사 여럿과 함께였다.
오크들은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이대로 두면 다시 도망갈 것이 염려되었던 에단이 우두머리에게 뛰어들었다.
크아악!
깡!!!
놈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검을 놓쳤다.
위기의 순간, 숲속 어딘가에서 초월적인 힘이 날아들었다. 에단, 카일, 필리아는 물론이고 오크 두 마리가 나가떨어졌다.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별안간 사내가 숲에서 뛰어나오더니 순식간에 오크 한 놈의 머리를 잘랐다.
“가.. 가디언이다.”
카일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가디언?’
우두머리 오크는 저항한답시고 녀석의 무기를 휘둘렀지만, 사내는 가볍게 피해냈다.
이쯤 되면 허공에 무기를 휘두르는 수준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두머리 오크의 머리는 어디선가 나타난 사내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곧이어, 아이작 일행도 당도했고 사내를 보자마자 전부 무기를 꺼내 들었다.
“도우러 온 사람에게 예의도 참 바르군, 인간?”
사내가 아이작과 일행을 노려봤다. 사내의 눈에서는 짙은 보랏빛이 돌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백발이었다.
“아이작 왕자님, 저 사람은 ‘가디언’입니다.”
가디언, 하지드’로 인해 등장한 오크, 트롤, 흡혈귀들을 상대하기 위해 마법사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돌연변이 생물이다. 수명이 200세까지 정도였고 엘프처럼 유연하며 드워프처럼 힘이 강하고 마법 능력을 지닌 존재로, 몇 없지만 주로 금지된 골짜기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사내가 ‘가디언’이라는 소리에 모두 무기를 집어넣었다.
“이건, 당분간 내가 보관하지.”
가디언이 에단의 고대 검을 주우며 말했다.
이제보니 가디언이 가지고 있는 검과 굉장히 유사해 보였다.
“필리아, 괜찮니?”
아이작이 필리아의 상태를 살폈다.
“아이작이라 하오. 여긴 동생, 에단과 필리아.”
칼을 언제 겨눴냐는 듯 아이작이 가디언에게 가족을 소개했다.
“아르테스 가문이군.”
하며 말을 이었다.
“제넌 아르테스에게 알리시오. 하지드가 깨어나려 한다고, 앞으로 괴물들의 습격이 잦아질 거라고.”
“네? 그게 무슨 소리죠? 하지드는 영구 봉인..”
“일이 틀어졌소. 얼마 전 있었던 마법 의회 피살 사건? 그것도 우연이 아니오. 칼라덴 왕국도 움직임이 수상하던데, 방비 철저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엄청난 사안을 너무 담담하게 말하는군, 믿어도 되는 건가? 자칫하면 그 정보 하나에 전쟁이 날 수도 있어.”
아이작이 가디언의 말에 의구심을 가졌다.
“난 분명 경고 했수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가디언이 아이작을 쏘아붙이고는 다시 숲으로 가려 했다.
“그 검, 주인을 찾은 건가?”
가디언이 들고 있는 검을 가리키며 에단이 질문했다.
“내 것은 아니지만, 인간에게 있을 건 더 아닌 것 같군.”
“이름이 뭔가? 가디언. 왜 그리 급하게 떠나지?”
“이런 생산성 없는 대화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지.”
“...”
“난 앨리슨이라 하네, 당신들에게 더 불릴 일이 있을 진 모르겠지만..”
에단은 더 할 말을 잃고 그가 떠나는 모습만을 바라봤다.
“저 가디언이 말한 게 사실이라면..”
“아버지에게 알려야 해!”
.
.
.
아르테스 가문의 휘장이 펄럭이고 제넌의 일행이 소튼 성 입구를 지났다.
소튼 성은 시스웰 왕국의 제2의 수도라고 불릴 만큼 거대했다.
각 가문의 유력 가문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프레데릭 가문, 햄슨 가문, 리안 가문 등 휘장들이 보였다. 단, 제이드 가문과 그들을 따르는 가문의 휘장만이 보이지 않았다.
회담장은 제넌이 들어가기도 전에 시끌벅적했다.
“이전의 칼라덴은 이제 없습니다!”
“그래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들은 왕위찬탈자들이에요.”
“이제는 우리 독립 왕국들까지 넘보고 있으니, 나 원.. 참.”
끼이익
쿵!
제넌이 회담장으로 들어섰다.
시끌벅적하던 회담장이 잠시 조용해졌다.
“환영합니다. 아니발 왕국의 제넌.”
시스웰 왕국의 왕, 프레데릭 타이가르가 그를 반갑게 맞았다.
그레고리 햄슨의 옆자리가 비어있었다.
햄슨이 고개만 까딱 인사하고는 준비된 다과를 자기 앞으로 가져와 우걱우걱 씹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는 반쯤 까져있었고 회색의 턱수염은 길게 땋아져 있었다.
“자자, 이제 초청된 대다수가 도착했으니. 회담을 시작하려 합니다. 모두 정숙 해주십시오.”
회담의 임시회장인 프레데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모두 선서하고 시작합시다.”
각 가문의 수장들은 목을 가다듬고 선서했다.
“나 제넌 아르테스, 프레데릭 타이가르, 그레고리 햄슨, 핸디 리안 ... 은 회담의 모든 내용에 대해 진실을 고할 것을 선서합니다.”
하고는 자신들 앞에 있던 맥주 일부를 원형 탁자 가운데 노인 선서장 위에 뿌렸다.
“시작하죠. 햄슨?”
손을 들고 말할 의사를 표명한 그레고리 햄슨이 운을 뗐다.
“칼라덴 왕국에 대한 논의부터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햄슨이 프레데릭을 바라봤다.
“최근 그들의 동향이 이상하다고 들었습니다. 프레데릭?”
“예, 요즘, 국경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심심치 않게 군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진 않을 거예요. 이대로 놔두면 그들의 존재는 잠재적으로 우리를 큰 위험에 빠뜨릴 것입니다.”
점잖게 있던 젊은 왕, 금발의 핸디 리안이 끼어들었다.
그는 칼라덴 제국 시절의 마지막 황제, ‘할프단’의 적법한 혈통이었으나 왕위찬탈 사건 이후 11세의 어린 나이에 이레네 대륙 동남쪽에 리아누 왕국을 세웠다.
“내 말이 그 말이오. 우리 시스웰이 무너지면 다음은 콜란 왕국? 리아누? 아니발? 모든 왕국들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겁니다.”
“지금.. 여러분 모두 전쟁을 생각하고 계시다면, 굉장히 신중해야 합니다.”
듣고 있던 제넌이 전쟁 이야기에 반대하며 한마디 했다.
“저들보다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제넌.”
“선제공격을 생각하는 겁니까? 모두!?”
그때 다시 핸디 리안이 끼어들며 프레데릭에게 물었다.
“시스웰은 지금 도움을 약속받고 싶으신 거 아닙니까?”
“맞소.”
“리아누 왕국은 시스웰을 도와줄 의향은 있습니다. ㅎㅎ”
회담 내용은 여느 때와 같이 칼라덴 왕국에 대한 적개심으로 시작하여 숨겨 뒀던 각자의 이권 중심으로 번져갔다.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제넌은 이쯤에서 더 중요한 사안을 꺼내야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크흠!”
각 왕국의 왕들은 서로 눈치싸움을 하던 중 제넌의 헛기침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여러분, 저는 정말 더 중요한 일로 이곳에 왔습니다. 잠시만, 잠시라도 우리 칼라덴의 이야기는 내려놓았으면 합니다.”
제넌이 각 왕국의 왕들과 시선을 맞추며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 인간 왕국들 뿐만이 아니고 엘프, 드워프, 마법사들에게까지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안이 시급해 보이기에 이곳에 먼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