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또 왜 왔어!”
방 안에서 마법진을 그리던 엔토니가 긴급히 달려 나왔다. 그날 대련 이후 아실리의 토닥임에 기분을 풀었으나 본디 응어리진 속상함은 여전히 남았다.
“흥, 또 얻어맞고 싶어? 저번에는 약하게 때렸지만 이번에는 안 봐줘. 징징 짜도 모른다?”
서투른 어린애 엔토니는 서운함을 빈정거림으로 표출했다. 그를 이해하는 어른(이)들은 귀엽게 웃어넘겼지만,
‘내 아들이지만 정말 재수 없군.’
‘오라버니, 너무 얄밉다. 에드워드 괜찮으려나?’
‘누구 자식 아니랄까 봐 알버트와 똑같군. 아들아, 저 녀석 버릇을 확실히 고쳐주렴!’
글리터 공작까지도 통쾌한 복수극을 위한 적절한 자극으로 넘겼지만 오, 에드워드만큼은 도저히 지나쳐 보낼 수 없었다. 봐주느니, 징징 짠다느니 하는 비아냥은 인자한 어른으로서 너그럽게 흘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저번에는 약하게’가 에드워드의 인심을 조각냈다.
약 보름 전 강화된 힘으로 등짝을 맞은 에드워드는 일주일이 넘도록 시퍼런 멍을 달고 다녀야 했다. 멍의 크기도, 멍으로부터 오는 통증도 대단했다. 어딘가 잘못 기대거나 누군가 잘못 건드릴 시, 짧은 비명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때때로 등이 파르르 떨리기도 했다.
밉살스러운 친구 녀석에서 복수할 겸, 그것보다도 이후로 이따금 밀려드는 회상을 누를 겸 에드워드는 아버지에게 특급훈련을 부탁했다.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은 공작이 열을 내며 아들을 단련시켰기에 훈련은 무척 고되었다.
어느 날은 어김없이 고단한 훈련 중에, 글리터 공작이 에드워드의 검날을 모두 튕겨내며 호통치듯 말했다.
‘에드워드 글리터! 무슨 잡음이 일든 아버지가 다 해결해줄 테니 어디서 맞고 오지만 말아라.’
엔토니 지니어스와의 설욕전에 더하여, 우리 아들이 누군가를 때렸으면 때렸지 맞고 오는 꼴만은 볼 수 없었다. 상상하기도 싫었다. 따라서 훈련은 계속되었다. 공작이 보기에 에드워드는 너무 정직하게 맞서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웃는 얼굴 뒤에 감춰진 야비함의 대명사 케니스 글리터는, 이번을 계기로 추후 수많은 사건·사고를 대비하여 글리터 비기를 전수했다. 말이 비기지, 주변의 지형지물과 인간의 급소를 활용하여 싸우는 방법이었다. 이미 알맞게 쌓이고 쌓이는 지식 틈으로, 선배의 경험과 지혜를 끼워 넣었다.
훈련의 효과는 굉장했다. 불과 이주 만에, 정공만을 꾀하던 에드워드는 모략을 꾀듯 머리를 썼다. 도발에는 더한 도발로 응수한다.
“징징 짜다니, 그거야말로 네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엔토니?”
어른의 포용력으로 봐주곤 했더니 이 꼬맹이가 멋모르고 까불어? 지금도 눈을 감으면 시퍼런 멍이 아른거렸다. 엔토니 요녀석을 혼내줄 때가 되었다.
오, 남자는 커서도 애라더니. 에드워드가 이어서 엔토니의 속을 긁었다.
“그리고 왜 또 오긴, 우리 아실리 보러 왔지.”
“우리…… 아실, 리……?”
알버트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우리 아들 잘한다, 잘한다 흐뭇해하던 공작이 시급히 알버트를 끌고 사라졌다. 딸려 가는 알버트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그의 서재로 향했다. ‘알버트 지니어스는 케니스 글리터에게 수학을 가르쳐야 한다. 단, 장소는 반드시 지니어스 본가의 알버트 개인 서재여야 한다. 나도 오랜만에 알버트네 집 가보고 싶네. 오늘 주제는 〈수의 기본〉 어때?’라는 황제의 친서를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형식을 갖추어 내리던 지시도 점차 친구한테 보내는 편지처럼 변질되고 있었다.
한편 아이들 세계에서는 반대로, 평안한 에드워드를 붉으락푸르락 엔토니가 대련장으로 끌고 갔다. 흥분한 오라버니를 말리려다 종내 포기한 아실리도 한숨을 내쉬며 총총 뒤를 따라갔다.
“엔토니.”
“왜, 글리터.”
허? 먼젓번에는 에-디라며 골려대더니 이번에는 이름도 불러주지 않았다. 어처구니없었지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기막힘일랑 잠시 제쳐두고 에드워드가 사뭇 장엄하게 제안했다.
“내기하자.”
“내기? 무슨 내기? 들어나 보자.”
“이번 대련에서 네가 이기면 오늘부터 일 년간 백작저에 얼씬거리지 않을게.”
“뭐? 그건 내가 싫어!”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아실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또래 친구는 에드워드뿐인 데다가, 그처럼 나무랄 곳 없는 역사토론 파트너를 잃을 순 없었다!
“진심이야?”
“당연하지.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못 봤다. 날 때부터 친구 사이였던 엔토니가 증명하건대, 에드워드 글리터는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위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주 솔깃한 내기였다.
“만약 네가 이기면?”
이건 예의상 던져보는 질문이었다. 엔토니는 자신이 이기는 것 외에 조건을 들을 필요 없었다. 어차피 그가 이길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기면, 다음번에는 아실리가 우리 공작저에 놀러 오는 거야.”
“아, 그건 좋다.”
영애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내기 조건에 반대하던 아실리가 긍정했다. 안 그래도 최근 글리터 공작저에 방문하고 싶다고 넌지시 바람을 흘렸다가 문턱도 넘어보지 못하고 제지당했더랬다. 공작저의 공기가 영 좋지 않다는 둥, 가는 길이 무척이나 험하다는 둥 얼토당토않은 반론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래도 내기 조건이 에드워드한테 너무 일방적으로 불리한 거 아니야?”
“글리터도, 나도 승낙한 조건이니까 괜찮아. 그렇지, 글리터?”
엔토니는 끝까지 에드워드에게 거리를 두었다. 그래, 그래. 에드워드가 헛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그리고 내 의견은? 내기 조건이 온통 나와 관련된 건데 내 의사는 안 물어봐?”
“…….”
이 부분은 오빠들이 잘못한 게 맞았다. 아실리는 짐짓 입을 부루퉁 내밀며 속상한 척했다.
“뭐야, 둘 다 대답 안 해줄 거야? 무시당하는 것 같아…….”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대역죄인들이 허둥지둥 눈빛을 교환했다. 어떡해? 아니, 네가 먼저 내기하자고 했잖아. 너도 좋아했잖아! ……우선 우리가 잘못한 건 맞아. ……맞지.
저를 사이에 두고 주고받는 시선을 느끼면서, 아실리가 웃음이라도 터질까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동의 없이 내기 조건으로 만들어버린 게 괘씸해서 시작한 삐친 적이었지만, 남자애 둘이 제 눈치를 보며 어찌할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썩 유쾌했다.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아실리가 웃는 표정이 들킬라 고개를 푹 숙이자, 엔토니가 다급해져서는 서둘러 입을 떼었다.
“아, 아니야, 아실리! 가뜩이나 귀여운 네가 삐치니까 더 귀여워서━”
“야!” 미친놈아. 에드워드가 아실리를 보고 겨우 삼킨 뒷말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 그러니까, 우리 아실 리가 귀여워서 말을 잇지 못한 건데, 네가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워 그런 거━”
“아니, 그게 아니잖아!”
“맞아! 그게 아니지, 네가 이쁜 탓이 아니고……”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그만해.”
듣다 못한 아실리가 어딘가 고장난 오라비를 말렸다. 에드워드도 미쳐버린 친구의 작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실리에게 깔끔한 사과를 건넸다. 물론 아실리는 깔끔하게 사과를 받아주었다.
“정신 차려, 팔불출 지니어스.”
동생 바보 엔토니까지 의식을 다잡고, 대화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나를 조건으로 건 것까지는 그렇다 쳐. 둘 다 사과했으니까. 그런데 나는 이 내기 반대야.”
“오빠는 좋은데…… 아실리는 왜 싫어?”
“오빠야 당연히 좋겠지. 에드워드한테 불공평하잖아.”
“나도 괜찮아, 아실리. 내가 좀 불리해도,” 이 대목에서 엔토니가 에드워드를 노려봤다. 저 혼자 멋진 척한다 이거지? “상관없어.”
“왜 상관없어. 나는 에드워드가 좋단 말이야!”
에드워드가 없으면 나의 역사 파트너는 누가 해주는가? 가족들은 역사에 별 흥미가 없었고, 각기 좋아하는 분야가 너무나 달랐다. 아서(남동생)가 그나마 호응해준다지만 조금만 심화되면 이야기가 금세 언어로 빠졌다.
마땅히 공부 동지가 아니더라도 그가 좋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함께하면 즐거웠고 평소보다 빠르게 달려가는 시간이 아쉬웠다.
“……괜, 찮아. 어차피 나는 이길 거거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에드워드는 귀여운 거에 무척이나 약했다. 그의 손가락이 주인의 제재를 벗어나려는 듯 움찔거렸다. 볼 한 번만 잡아보면 안 되겠지? 당연한 걸 묻고 있네, 변태같이 굴지 말자 에드워드. 하. 제가 좋다며 소리치는 몰랑이는 심장에 해로웠다.
“닥,” 엔토니가 힐끗 아실리를 의식하고 잽싸게 말을 풀었다. “조용히 해, 에드워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기는 건 나야.”
에드워드의 코웃음을 배경 삼아, 드디어 대련이 시작되었다.
“아실리, 다칠 수 있으니 비켜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다음주에는 우리 집 구경시켜줄게.”
도발에 넘어간 엔토니가 씨익거렸다. 오라버니 너무 흥분한 것 같은데. 아실리가 불안하게 엔토니를 힐끔거리다 대련장 구석에 자리 잡았다.
“대련은 저번과 같은 방식으로, 상대의 등을 먼저 치는 자가 승리합니다. 그럼…… 시작!”
붉은 깃발이 위로 솟구치자마자, 에드워드의 현란한 검술이 엔토니를 들이몰았다. 엔토니가 당황스러워하며 급하게 마법을 날렸지만, 무엇이든 조급한 움직임에는 허점이 많았다. 허점을 포착한 에드워드가 더 매섭게 엔토니를 밀어붙이고, 가파르게 처리하는 마법에는 빈틈이 남고, 또다시……. 경기의 흐름을 완전히 에드워드가 잡고 있었다. 적당한 시기를 노려서 이번에도 슬라이드 마법으로 마무리하려던 엔토니는 벅찬 리듬에 휩쓸려 안달복달 주문을 외웠다.
“슬라이━”
엔토니가 주문을 마치기 직전에, 에드워드가 순식간에 그의 코앞까지 다가가 미리 뒤편으로 몸을 기울였다.
“━드!”
때마침 마법이 완성되었을 때 에드워드는 원하던 대로 마법의 동력을 받아내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어느새 그가 엔토니의 뒤쪽에 서서, 톡. 엔토니의 등을 터치했다.
“에드워드 글리터 승리!”
엔토니가 털썩 주저앉았다. 말도 안 돼. 그가 얼떨떨하게 승패를 부정하는 걸, 에드워드는 한껏 후련하게 내려봤다.
“내가 이겼네?”
에드워드가 얄궂게 엔토니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졌네?”
확인 사살이었다.
아실리가 달려와 에드워드에게 축하를 전했다. 내심 그가 이기길 바랐기에 대련의 결과가 달가웠다.
“그럼, 나 글리터 공작저에 놀러 가는 건가?”
“응, 아실리. 기다리고 있을게.”
“좋아, 에드워드. 기대할게.”
아실리가 환하게 웃고, 그녀에게 화답하듯 에드워드도 잔잔히 미소 지었다. 이쯤 되면 둘이 너무한 게 맞았다. 지금 이곳에서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죽상인 사람은 엔토니 혼자였다.
엔토니는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우리 아실리가 염병할 글리터로 놀러 가는 것도 못마땅했지만 무엇보다,
‘나는 아버지께 죽었다…….’
대련의 결과로 아실리가 글리터 공작저에 가게 되었다는 경위를 어떻게 말씀드린단 말인가. 엔토니가 야차 같은 알버트를 떠올리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엔토니, 약속 잊지 않았지?”
“그래, 이 자식아…….”
내가 죽게 될지언정 약속은 약속이었다. 엔토니가 괜히 얼음 뭉치를 만들어 에드워드에게 던지며 머리를 싸맸다. 에드워드가 일부러 뭉치를 맞고선 이번에는 진심으로 엔토니를 토닥였다. 극성맞은 지니어스 백작을 익히 알기에 건넬 수 있는 위로였다.
하. 엔토니가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아실리가 다가와 귀엽게 타박하며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해주었다. 심심찮은 위로도 함께였다. 힘내, 오빠.
……고마워, 아실리.
그래도 제엔장. 아냐, 이미 끝난 일인데 어쩌겠어.
에드워드에게 지면 엄청 우울하고 짜증 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아실리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생각보다 기분이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