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저와 같이 역사를 공부하실래요?”
“네!”
지니어스 백작저에 입성한 이래로 가장 활기차게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엔토니 지니어스의 친구라더니, 얘도 어딘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다. 아실리는 역시 치트키는 배반하지 않는다며 기뻐했다. 착각이 견고해지고 있었다. 큰일이었다.
“역사를 잘 아시나요?”
“웬만큼 압니다.”
웬만큼 안다. 지니어스들 앞에서 이것은 금기어였다. 모크니 제국 전前 재상 등 자기 지식을 믿고 설치다가 깊은 지성으로 후둘겨 맞는 경우가 잊을 만하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당당했다. 웬만한 역사 지식은 다 꿰고 있으니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에드워드 글리터에게 역사는 검술 다음으로 자신 있는 분야였다. 역사 공부나 토론이라면 낯가림을 내려놓고, 보다 편안하게 대화에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았다━보통은 반대 아닌가?━.
“오! 그럼 공부보다는, 역사토론은 어떠세요?”
“아주 좋습니다.”
Brilliant! 안 그래도 요즘 가족들이 역사 이야기에 시큰둥해서 속상하던 참에━아실리도 알버트가 귀여운 함수들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시큰둥할 터였다━, 괜찮은 역사 파트너를 발굴한 듯해 신이 났다.
그렇게 아실리가 고대하고 고대하던 역사토론의 서막이 열렸다. 오늘의 주제는 ‘파르체 제국은 컬투라 왕국의 계승 국가인가?’였다.
“저는 파르체 제국이 당연히 컬투라 왕국을 계승한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에드워드가 확고하게 주장했다. 그가 머릿속으로 차분히 근거들을 정리하고 있는 것을, 아실리도 나름의 생각에 잠겨선 기다렸다. 그녀도 이전에 에드워드처럼 생각했더랬다. 이어질 설명들이 기대되었다.
“우선 파르체 제국을 건국한 사람인 파운더Founder는 컬투라 왕국인이었습니다. 그리고 파르체 제국은 지배층이 컬투라 왕국인, 피지배층이 지브로주 왕국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파르체 제국의 유적에서 컬투라 왕국 문화가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그렇기에 파르체 왕국은 틀림없이 컬투라 왕국을 계승한 나라입니다.”
일반적인 역사 서적은 십중팔구 에드워드의 설명을 따를 터였다. 아니, 그가 서적의 해설을 따르고 있으니 이때는 반대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전형적으로 훌륭한 주장이었다.
하지만 역사 자체가 누군가가 남긴 ‘기록’이다. 그렇다 보니 역사는 서술자나 작성 시기에 따라 천차만별 달라졌다. 따라서 역사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자는 절대적인 믿음을 내려두고 다양한 사료를 비교하며 비판적으로 사고해야 했다. 그게 어려워서 문제일 뿐이다.
“공자는 파르체 제국의 건국자가, 그러니까 파운더가 컬투라 왕국 사람이라고 확신하나요?”
“물론 확신합니다.”
“왜죠?”
네? 에드워드가 일순 당황해 되물었다. 아실리가 다시 한번 왜 확신하는지를 묻자, 곰곰이 영문 모를 이유를 찾아 나섰다. 왜라니, 왜일까? 되짚어보면 에드워드는 지금껏 이세계의 역사를 배우면서 ‘만약’이라는 가정이나 ‘왜’라는 근거를 좇아보지 않았다. 전자는 부질없다고들 말하지만 ‘만약’과 ‘왜’가 같은 뿌리임을 고려하면, 다시 말해 그는 역사를 그냥 과거의 사실로써 받아들였다.
“그야, 책에서 그렇게 나와 있었으니까…….”
이게 무슨 엉터리 같은 이유지. 스스로 보아도 유치한 핑계에 말끝이 절로 수그러들었다. 이전에는 역사의 기록들을 맹목적으로 수긍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에드워드는 연유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일정 정도에 다다라 회상을 멈추었다. 기껏 막아둔 둑을 다시 터뜨릴 수는 없었다. 여기서 그치는 게 옳았다.
“그렇죠. 우리가 주변에 흔히 접할 수 있는 책들은 전부, 파운더가 틀림없는 컬투라 왕국인이라고 서술합니다.”
조곤조곤한 동의 또는 반박이 에드워드의 정신을 현실로 옮겨왔다. ‘흔히’에 유독 강세를 두는 것을 보아하니 흔하지 않은 책들이 더러 있나 보다.
“하지만 몇몇 기록에서는 그가 지브로주 왕국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파운더가 지브로주 사람이라고요? 그렇다면…… 역사가 왜곡된 건가요?”
“글쎄요. 저희가 그 시대를 직접 겪어보지 않았으니 역사적 사실을 모두 가릴 수는 없겠지만, 여러 해석이 열려 있지 않고 기록과 서술이 지나치게 한 측에 치우친 것을 보면…….”
“역사가 후대의 손을 탔군요.”
일부러 말끝을 흐린 아실리의 의도대로 에드워드가 적절히 뒷말을 받았다. 일순 서로의 시선이 교차하고, 아실리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렇게 잘 맞아 주고받는 대화가 얼마 만이지? 짜릿했다.
“저만 해도 파운더가 지브로주 사람이라는 기록을 전혀 접하지 못했으니까요. 의도적으로 한쪽을 지우려 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네요.”
현 모크니 제국 유일무이 공작가의 후계자가 접하지 못한 문헌들이라는 건, 국가의 권력이 일정 정도 기능한 결과였다. 만약 아실리가 지식의 창고 지니어스 가문이 아니었더라면, 그녀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갔을지 모른다.
“네, 섣부른 추측일 수 있지만…… 과거 파르체 제국을 현재 모크니 제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로 보여요.”
“현재적 필요성이 역사에 작용한 것이군요?”
“바로 그거예요!” 아실리가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곧장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또, 공자께서는 파르체 제국의 지배층이 컬투라인이었기에 컬투라 계승국이라고 말씀하셨죠?”
“네, 맞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지배층보다 피지배층이 다수라는 사실, 알고 계시나요?”
아. 에드워드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침음을 흘렸다. 그, 렇죠. 어렵사리 대답하는 것과 달리, 그의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피지배층 지브로주인이 대다수인 파르체 제국이 과연 컬투라 왕국을 계승한 나라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에드워드가 아실리의 주장을 반갑게 이어받아 사고하다가, 불현듯 일어나 그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종이와 펜을 빌릴 수 있느냐는 부탁이었다. 당연지사 아실리는 흔쾌히 수락했다. 열정적인 파트너와 함께하는 토론만큼 설레는 일이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파르체 제국의 유적에서 컬투라 문화가 많이 나타난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지배층의 문화가 피지배층까지 확산되었다는 지표가 될 수 있어요. 그리고 우리는 문화가 지니는 전全사회적 권위를 알고 있지요.”
“맞습니다. 어떤 국가이든 문화적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거예요. 다만, 파르체 제국의 유적지에는 컬투라 문화만이 아닌 지브로주 문화도 아울러 존재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네? 하지만…… 오, 이런.”
“물론 파르체 제국의 고유한 문화도 있었고요. 세 가지 혹은 그 이상의 문화가 융합되었던 나라가 바로 파르체 제국인데, 단지 그중 한 국가를 계승했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요?”
에드워드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기울여 듣던 내용이 펼쳐진 종이 안에 정연하게 옮겨졌다. 곳곳에 표시된 온갖 도형들━도대체 직육면체나 육각형은 왜 있는 걸까?━, 국가 간 깔끔한 관계도 등이 눈에 띄었다.
“좋아요. 그럼 지니어스 영애께서는 파르체 제국이 이전의 국가들과 무관한 독립적인 나라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토론이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에드워드도, 아실리도 간만에 마주한 괜찮은 파트너 덕에 잔뜩 흥이 오른 채였다. 초반의 쌀쌀한 정적이 거짓말 같았다. 열렬한 두 학생이 방안을 후끈하게 달였다.
“아니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파르체 제국은 컬투라 왕국이나 지브로주 왕국과 분명 연관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관련성을 ‘계승’의 차원까지 확대하는 것은 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파르체 제국의 기록을 살폈을 때 두 왕국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언급된 적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길었던 주장을 비로소 끝마치고, 아실리는 숨을 고르며 에드워드의 종이를 슬쩍 엿봤다. 그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혹은 그리고 있던가.
제일 먼저, 컴퓨터 작업을 거친 듯한 단정한 체계도가 눈에 들어왔다. 원체 노트 정리에 소질이 없는 아실리에게는 별세계였다. 그러나 사방에 어지럽게 그려진 여러 도형이 정결한 그림을 너저분하게 만들었다. 밑줄이나 별표시는 보편적으로 그렇다 쳐, 도대체 원기둥이나 사다리꼴은 왜 있는 건데? 분명 어울리지 않는 모양들인데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 있는 게 신기했다.
‘잠깐. 데자뷔가 느껴지는데?’
주장을 펼치는 나, 내 말을 경청하며 받아적는 상대, 그리고 어딘가 훌륭히 괴상한 필기. 오, 아실리는 홀린 듯이 기억의 수면 아래 가라앉아 과거를 유람했다. 아실리 지니어스가 아직 이다솜이던 시절이었다.
이미 막을 내린 영화라 할지언정, 그녀는 가람과 어여쁘게 사귀었다. 역사를 좋아하는 그녀의 권유로, 둘은 종종 박물관/유적지 데이트를 즐겼다. 그런 날이면 특히 그녀의 입에서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가람은 수줍게 귀엽다는 말을 전하곤 했다.
데이트 테마가 역사로 정해지면 그는 늘상 필기도구를 챙겼다. 왜 역사를 전공하지 않았는지 의문일 정도로 해당 분야에 해박한 다솜은, 박물관이나 유적지에서 각별히 빛을 발휘했다. 가람은 호기심이 많은 훌륭한 학생이었고, 다솜은 그의 질문이나 견문이 그녀를 찌를 때마다 유난스레 흥분했다. 추후 가람 왈, 전시된 유물 앞에서 방방 뛰며 설명을 이어가는 모습이, 마치 도토리를 목전에 둔 다람쥐처럼 귀여웠단다. 그 모습을 평생 보고 싶어서 그가 집에 들어가서도 따로 역사 공부를 이어간 사실을 다솜은 알 턱 없었다.
아무튼, 그는 데이트 중 다솜의 해설을 꼼꼼히 받아적었다. 예전부터 노트 정리에는 일가견 있던 사람이라 이게 오히려 편했다. 가만히 듣고만 있자면 들은 기억도 없이 내용이 흘러나갔다.
다솜은 그럴 때마다 아닌 척 그의 노트를 열심히 훔쳐봤는데 오, 그녀는 태어나 그처럼 유별난 필기를 본 적이 없었다! 동그라미나 네모까지는 이해의 범주에 속한다. 그런데 대학수학능력시험에나 나올 것 같은 이상한 선이며 도형은 무엇이란 말인가. 정돈된 바탕에 잉크가 날뛰니 장관이었다. 백 번이고 어긋날 조합인데 가만 보면 어우러지는 게 더 유별났다.
‘아니, 정말 비슷하잖아?’
다솜이, 아니 아실리가 묻어둔 기억을 헤집으면서 에드워드의 종이를 다시 보았다. 괴상망측하게도 깔끔한 정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실리 지니어스의 전생이 이다솜이라면 에드워드 글리터의 전생은? 라는 미친 생각에까지 닿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추하게 굴지 말자, 아실리 지니어스! 가람은 다솜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깊이 사랑한 사람이었기에 그런 만큼 상흔도 깊었다. 분명 그녀는 이제 ‘아실리 지니어스’였음에도 때때로 사랑스러운 망령에 끌려갔다. 문제는 오,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지독하게 사랑스러웠을 뿐이다.
“━영애? 지니어스 영애!”
“어? 아… 죄송해요, 공자.”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필기에 열중하느라 영애께 일방적으로 담화를 맡긴 것 같아 죄송한 걸요.”
오, 아니에요! 저야말로 너무 혼자만 얘기한 듯해서……. 아니에요, 아니에요, 죄송해요, 주저리주저리. 지니어스나 글리터나, 모크니 제국을 한 가닥 휘어잡는 가문 아이들이 겸손하게 사과를 주고받는 광경을 보아하니 모크니의 미래가 환했다. 본래 높은 분들은 거드름 좀 떨어주고 거만을 피워야 인간미가 있는 법인데, 여기는 영 현실성이 없었다. 끊임없는 사과는 다소 과한 듯하지만, 아실리와 에드워드도 얼마 지나지 않아 릴레이를 멈추고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 조심스럽게 공대를 고수하던 두 사람은, 어느덧 말을 편히 놓고 친근하게 통성명을 다시 했다. 안녕? 나는 에드워드 글리터야. 에디, 큼, 에드워드라고 불러주면 좋을 것 같아. 응! 반가워, 에드워드. 나는 아실리 지니어스인데, 아실리로 충분해.
사이좋게 인사를 마친 뒤 장난스럽게 눈을 마주치곤 또다시 꺄르륵 웃었다. 만난 지 세 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마치 삼 년은 알고 지낸 것마냥 친밀했다. 이게 바로 공부의 효과인가?
오순도순 화목하게 오늘의 토론을 되짚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서너 번 들려왔다. 그 소리들 마저도 이야깃소리에 묻히는가 싶었는데,
“아들! 아실리! 잘 놀고 있었느냐!”
글리터 공작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뒤편에는 알버트가 심히 못마땅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아버지, 노크는 필수입니다.”
“아들, 확실하게 노크 했는데 네가 듣지 못한 거야.”
“그래도 갑자기 큰 소리로 들어오시면 어떡해요. 아실리 놀랐잖아요.”
자식새끼 키워봐야 아무 소용 없다더니……. 에드워드와 아실리의 인연을 바란 것은 맞지만 이렇게 아비를 몰라보라는 의도는 아니었다. 낯도 많이 가리는 놈이, 겨우 세 시간 보았다고 그새 여자친구 편을 들어?━여자친구라는 어휘는 에드워드 글리터뿐 아니라 지니어스 가족의 소견도 들어봐야 했다. 공작은 김칫국을 물처럼 마시는 경향이 있었다.━글리터 공작은 왜인지 씁쓸해져 아들의 얄망궂은 머리통을 콩 쥐어박았다. 아버지! 흥.
평소라면 제 친구의 찌질한 면모를 비웃어주었을 알버트가 웬일로 조용했다. 에드워드의 ‘아실리’ 발언이 알버트를 둔탁하게 치고 간 탓이다. 감히 내 딸을 제멋대로 불러대? 이런, 에드워드는 아실리에게 호칭 허락을 받았으며 막무가내로 불러대지도 않았지만, 분노한 알버트의 머릿속에는 더 이상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글리터 공작이 백작저를 방문했을 때부터 이미 이성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제 가야 하나 봐. 오늘 즐거웠어, 아실리. 덕분에 많이 알아가. ……아쉽네.”
흘러가듯 혹은 움켜쥐듯 내려놓은 뒷말을 듣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너무너무 아쉽다. 다음에 또 올 거지, 에드워드? 아니면 내가 가도 좋겠다! 물론 너랑, 공작께서 괜찮으시다면.”
아주 괜찮다며 오버하려는 공작을 붙들고, 알버트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훼방 놓았다. 잔뜩 아쉬워하는 아이들 얼굴을 보자니 심사가 뒤틀렸다. 그가 글리터 부자를 속히 백작저에서 내보내고, 아실리와 에드워드는 다음을 기약하며 살가운 미련 남기고 헤어졌다.
*
달리는 마차 안에서 다소곳이 눈을 감고 에드워드가 생각에 잠겼다.
‘닮았어. 아무리 생각해도 닮았단 말이야.’
아실리 지니어스. 천재 가문의 금지옥엽 고명딸. 친한 친구의 동생. 오늘 만나본 바를 토대로 새로운 수식을 추가하자면, 꾸밈없는 수재에다 심각하게 귀여우며 역사에 능함.
고민할 때면 왼쪽으로 턱을 괴고, 좋아하는 분야를 이야기할 때면 상체를 평소보다 앞으로 내밀곤 함. 혹은 두 손을 기도하듯 마주 잡음. 화들짝 놀랐을 때는 최대한 놀란 척을 안 하려 하지만, 작게든 크게든 ‘아빠야!’하는 감탄사를 내뱉음. 보통 불러도 ‘엄마야!’를 찾는데 특이함.
‘이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될 건 또 뭐지? 내가 이곳에 존재하는 것도…….’
말투와 행동, 취미나 특기, 사소한 버릇 하나까지도 비슷했다. 팔 년째를 기점으로 저편의 기억은 저편으로 묻어두었다고 여겼다. 그런데, 자만이었나? 아니면 내가 미쳐가고 있는 건가?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에게 특별히 오늘 하루가 더 즐겁고 행복하고 보람차게 다가왔을 리 없었다. 다른 삶을 얻어서도 여전히 소중한, 어쩌면 평생토록 소중할 그녀와 함께하는 듯했기에.
‘……다솜아.’
에드워드 글리터는 이전 생에서 더없이 사랑했던 연인, 아니 전 연인의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렸다. 그 이름은 차마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한참 동안 안에서만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