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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Brilliant
작가 : 장하다
작품등록일 : 2022.2.8

공부하기도 바쁜데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니?


*

“에드워드.”
“응.”
“우리 나중에 결혼하려나?”

모크니 제국에서는 영애·영작들이 정략혼이 허다했다. 어린아이들도 가문의 이익을 위해 인위적으로 엮이곤 했다. 부모님 성격상 제게 부득불 짝을 이어주진 않겠지만, 나중에 결혼을 한다면 에드워드와 하지 않을까━알버트 지니어스가 안다면 경을 칠 생각이었다━. 부모님 간 친분도 두텁고, 신분도 비슷하고.

“……네가 좋다면.”
“응?”
“네가 좋다면 나도 괜찮다고.”
“그게 뭐야. 에드워드는 상관없는 거야? 아, 그러고 보니 황녀전하도 계시네. 에드워드는 공작이 될 테니까 전하와━”
“너라서.”

에드워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황녀에 관하여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는 아실리를 막았다.

“너라서 상관없는 거야.”

바보 같은 아실리 지니어스. 제 앞에서 놀란 듯 휘둥그레진 애가 천재라니 말도 안 됐다.


-본문 中-


*

#천재가문의 금지옥엽 #고대어천재 여주 #가족사랑 #수학천재아빠+마법천재오빠=웰컴투수학나라 #언어천재남동생 #저세상 딸사랑·시스콤 #괴로운남주들 #(전생_전남친)공작 #(전생_남사친)상단주 #삼각관계

 
첫 번째 만남 (1)
작성일 : 22-02-22 11:17     조회 : 267     추천 : 0     분량 : 7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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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버트! 알버트 지니어스!”

 

  글리터 공작이 난감해하는 기사들을 제치고 백작가의 대문을 두드렸다. 우연히 백작저 앞을 지나던 사람들은 우락부락한 귀족 하나가 벌이는 실랑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때때로 공작이 지니어스 백작저 문전에서 난동을 피우는 건 이미 제국 내에서 자자한 해프닝이었으니, 결국 딱한 건 기사들이었다.

 

  자, 그렇다면 글리터 공작이란 누군가? 제국의 유일무이한 공작, 케니스 글리터는 알버스 지니어스의 나랏일 파트너이자 빌어먹을 친구였다. 덧붙여 현 황제 엠페라도르 레예스 모크니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하자면, 모크니 황제와 글리터 공작, 그리고 지니어스 백작은 어릴 적 멋모르고 도원결의를 나눈 염병할 동무였다. 정확히는 지니어스 백작에게만은 땅을 치고 후회하는 도원결의였다.

 

  공작과 백작은 각기 황제의 오른팔과 왼팔이라 불리며 다른 이들의 동경과 시기를 샀다. 당연했다. 지인 정치라니, 말이 되는가! 이건 학연·지연·혈연 세 쌍 년과 맞먹는 너무한 체제였다. 하지만 이건 황제의 입장도 들어봐야 했다. 알버트 지니어스보다 똑똑한 문인, 케니스 글리터보다 강건한 무인이 없어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실제로 알버트는 ‘자네, 수학 잘하지 않나?’라는 무성의한 황제의 말씀 하나로, 제국의 재상으로서 모든 재정 업무를 책임졌다. 임명 초반에 거리낌 없이 퍼지던 낙하산 루머는, 그가 누구보다도 훌륭히 맡은 바를 처리해나가며 금방 사그라들었다. 소문을 접하고 은근 파직을 기대하던 알버트에게는 암울한 결과였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기도 모자랄 시간에 서류와 싸우는 매일매일이 너무나 아까웠다.

 

  알버트 지니어스가 황궁 집무실에서 머리를 싸맬 때, 케니스 글리터는 궁밖에서 몸을 굴렸다. 남사스러운 표현이 아니라, 체력이 바닥날 때까지 고되게 일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가끔은 단어 그대로 흙투성이가 되도록 땅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기도 했다. 몸도 좋고 머리도 좋은 케니스 글리터는 유능한 감사관으로서 제국 곳곳을 누볐다. 모크니 제국식 암행어사였다.

 

  “알버트 이 친구야! 폐하께서 자네에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다며 나를 보내셨네! 몹시 중요한 전언이야!”

 

  하. 알버트가 머리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까지 거론된 판국에 내려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조금 더 버텨보나 했더니만. 여러모로 영악한 자식이었다.

 

  지니어스 백작과 글리터 공작은 절친한 사이지만━절친한? 이 대목에서 지니어스 백작은 살기를 날렸다.━ 둘의 성격은 판이했다. 전자는 무뚝뚝하고 냉정하며 정공법을 선호하는 반면, 후자는 대체로 온화했지만 실은 굉장히 약은 방식을 즐겨 썼다. 지금이 그러했다.

 

  글리터 공작에게는 아홉 살 아들이 하나 있었다. 에드워드 글리터라고, 엔토니와 동갑이며 아버지끼리 그러한 것처럼 둘도 친했다, 아마.

 

  공작의 목적은 아들 에드워드와 아실리 지니어스 간 인연이었다. 고위 귀족일수록 어릴 적 약혼이 비일비재한 모크니 제국에서, 아실리 지니어스는 공작에게 최고의 며느릿감이었다. 지니어스 가에서는 워낙 딸자식이 태어나길 드물었으니 포기하고 시답잖게 친우를 놀리곤 했는데, 무려 지니어스 영애라니! 정략혼에 의미를 두지 않고 예전부터 아들을 지역 사찰에 데리고 다닌 게 후회스러웠다. 수도에 머무르며 또래와, 하다못해 엔토니 지니어스와 교류하라 하여도 아버지를 따라 공부하고 싶다고 뜻을 굽히지 않으니. 누굴 닮아 이렇게 우직한지 내 아들다웠다.

 

  공작의 속사정을 모를 리 없는 알버트는 부득불 글리터 부자의 백작저 출입을 말렸다. 그나마 공작이 수도에 머무르는 시간이 적어 여지껏 버틸 수 있었다.

 

  “오, 알버트! 친우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 어쩌나. 오랜만이네.”

  “전언이라니?”

  “다짜고짜 본론이라니 너무한 거 아닌가.”

  “다짜고짜 휴일을 방해한 자네의 글러 먹은 인성을 되짚어보게.”

 

  사회 규정상 지니어스 ‘백작’은 글리터 ‘공작’에게 공대를 사용해야 했지만, 알버트 지니어스는 무려 제국의 이인자(혹은 삼인자)였다. 아내의 분노와 자식들의 사고 이외에 무서울 게 하나 없다는 뜻이다. 또, 공적인 자리라면 모를까 친우 사이에 사석에서까지 계급을 따질 필요는 없었다.

 

  “간만에 수도로 복귀한 나를 차갑게 내친 자네만 할까. 그나저나 전언이 기네. 들어가서 말해야 할 것 같아.”

  “길어도 여기서 듣겠네.”

 

  글리터 공작과 지니어스 백작이 커다란 대문을 두고 서로 대치했다. 알버트는 한사코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공작은 기어코 백작저에 발을 디디려 꿋꿋했다.

 

  “급하게 오느라 땀을 좀 흘렸네. 게다가 한창 더울 시기 아닌가. 시원한 차 한 잔만 대접해주게.”

  “더우면 벗게.”

 

  어디서 수작질을. 알버트가 정색했다. 공작이 능청스럽게 양팔을 가슴께로 모으며 몹쓸 연기를 펼쳤다.

 

  “오, 알버트. 자네가 그렇게 저돌적이면 내가━”

  “케니스 글리터!”

  “아버지?”

 

  밖이 소란스러워 의아하던 참에, 정원을 산책하던 아실리가 둘의 대치를 발견했다. 아실리 지니어스의 등장에 글리터 공작이 환하게 웃고, 알버트는 얼굴을 매섭게 구겼다. 인생의 오점 같은 자식이 기뻐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역정이 났다.

 

  다섯 살 아실리는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무엇이든 또래보다 능했다. 그녀는 발음이 꽤 정갈해진 뒤 차츰 말투까지도 예법에 신경 썼다. 지니어스 백작 영애인 이상 언젠가 해야 할 교정을 앞당긴 것뿐이었다. 따라서 올해부터 그녀는 가족들의 호칭을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로 바꾸고 높임말을 사용했다.

 

  ‘아실리, 무, 무슨… 아버, 지……?’ 촌철살인 알버트 지니어스는 말을 더듬었고,

  ‘오, 메드라여. 아실리, 엄마는 우리 딸이 엄마라고 불러주었으면 좋겠어.’ 무신론자 다이애나 지니어스는 또다시 신을 찾았으며,

  ‘난 네 오빠야! 무, 물론 오라버니도 맞지만, 근데 오빠가 더 맞아!’ 고집 빼면 시체인 엔토니 지니어스는 시체가 되었다.

 

  아실리 몰래 지니어스 가 대책 회의까지 세웠건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가족들은 오열했다.

 

  “글리터 공작을 뵙습니다.”

 

  지니어스 백작 영애, 아실리가 치마 언저리를 살짝 올려 잡으며 인사했다. 『중앙귀족에 대한 모든 것(13차 개정판)』을 통하여 귀족들의 안면을 똑똑히 익혀 놓았기에 가능한 처세였다. 특히 글리터 공작은 ‘현 지니어스 백작(알버트 지니어스; p. 6 참고.)과 절친한 사이’라는 주석이 인상 깊었는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글리터 공작에 대하여 일언반구 없었기 때문이다! 인물 사전을 낑낑 들고 가 알버트에게 연유를 물어봤을 때, 그의 낯에 서렸던 절망이 선연했다. 마침 곁에 있던 다이애나가 좋게 일러 아실리를 돌려보냈으니 다행이었다.

 

  낭패 어린 알버트를 사이에 두고, 글리터 공작과 지니어스 백작 영애는 나름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친우의 딸, 아버지의 친우라는 공통분모를 나누고 있으니 허물이 덜했다.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공통분모 알버트는 부러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아버지?”

 

  글리터 공작이 알버트를 향해 음흉하게 웃었다. 왜, 애가 타냐? 친구는 친구라는 건지, 아니꼬운 텔레파시가 들려오는 듯했다. 올바른 예법을 구사한 아실리를 친구놈이 더욱 탐내는 게 느껴졌다. 아, 우리 딸은 왜 이리 잘 나서.

 

  “아실리, 들어가 있으련? 위험한 사람이란다.”

  “오, 알버트, 자네 미쳤,” 글리터 공작이 아실리를 인식하고 뒤늦게 말을 틀었다. 큼큼! 저 친구 눈빛이 형형한 게, 글리터 가주 살인사건이 발생한다면 범인은 뻔했다.

 

  “폐하의 전언을 들고 온 관료에게 위험한 사람이라니, 속상하네. 그리고 자네, 나를 계속 세워둘 셈인가?”

 

  황제의 전언과 기본적 법도를 내세우며 끈질기게 요구한 덕에, 마침내 글리터 공작은 지니어스 백작저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아실리에게 약혼 제의를 넌지시 내비치다가 이후 접빈실에서 알버트에게 호되게 맞았는데, 우람한 체격의 남성이 요란스럽게 주먹을 피해 다니는 모습이 가히 장관이었다. 아야얏, 알버트! 자네, 진심으로 때리는 건가? 실상 제 죄를 아는 공작이 맞아주는 거였지만 아버지의 주먹은 생각보다 매웠다.

 

  한 가지, 지니어스 백작이 간과한 게 있다면 바로 공작의 꼬라지가 아직 한참 남았다는 사실이었다. 한 99/100 정도.

 

 

 *

 

 

  “누나, 아래층이 시끄러워.”

 

  아실리의 남동생, 아서 지니어스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아실리가 모크니 제국어 세부 체계를 구조화하던 동작을 멈췄다. 함께 공부하던 아서가 어느 순간부터 집중을 못한다 했더니만, 오늘따라 집안이 무척 소란스러웠다. 소음을 한 번 인식하고 나니 계속해서 거슬렸다.

 

  “아서,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하자. 무슨 일인지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

  “응, 그럼 난 좀 잘래. 대신 내일은 세피어닉 제국어 공부하자!”

  “아직 모크니 제국어의 체계화도 못 끝냈는데?”

  “천천히 하면 되지. 게다가 내가 재밌는 책을 발견했단 말이야.”

 

  오늘도 지니어스들은 남달랐다. 현 지니어스 가의 막내아들, 아서 지니어스는 어릴 적부터 유달리 언어에 관심이 많았다. 모국어━모크니 제국어━는 당연지사, 온 대륙의 언어를 섭렵할 것처럼 외국어도 파고들었다.

 

  “음, 그래! 기대할게. 낮잠 잘 자, 아서.”

  “응!”

 

  다행히 아실리 지니어스와 아서 지니어스는 공부 취향이 비슷해서 둘은 곧잘 모여 공부하곤 했다. 둘 사이에 껴서 고생하는 건 엔토니 지니어스였는데, 그는 언어나 역사 계통은 쥐약이었다. 지니어스라고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요즘 엔토니는 마탑에 가 있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엔토니는 오늘 모크니 제국어의 심화 구조를 완성해보자는 동생들의 제의에 하얗게 질려 마탑으로 튀었다.

 

  아래층을 향해 씩씩한 걸음을 옮기던 아실리가 우뚝 멈춰 섰다.

 

  “어허, 폐하의 명을 거역할 셈인가, 자네? 이렇게 친서도 가져왔지 않나.”

 

  익숙한 음성과 익숙한 레퍼토리가 귀에 잡혔다. 로비에서 글리터 공작과 지니어스 백작이 실랑이를 벌이고, 그 가운데서 글리터 공자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버지, 제발. 우리 그냥 가면 안 돼요?”

 

  그런 아버지를 매우 창피해하는 듯했다.

 

  “당연히 안 되지! 에드워드, 걱정 말거라. 아비가 다 해결할 테니.”

  “아버지, 우리가 공작저로 돌아가면 모두 해결될 일 같아요. 오늘은 엔토니도 없다잖아요.”

  “공자가 옳은 말을 하는군. 썩 꺼지,” 알버트가 주춤하다가 흥분을 낮췄다. “당장 나가게. 추후 정식으로 초대하겠네.”

 

  다른 날이면 모를까, 오늘은 엔토니가 마탑에 놀러 간 날이었다. 엔토니와 에드워드는 예전부터 친분을 유지해왔기에 만약 엔토니가 있더라면 사정이 나았겠지만 오늘은 그것마저 못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아실리를 사악한 글리터와 붙여놓을 판이었다! ━제멋대로 글리터는 ‘공작’이지 ‘공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버트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굳이 인지하지 않으려 하는 걸 수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글리터 공작은 이를 다 계산하고 쳐들어온 게 분명했다.

 

  “아버지, 귀빈을 그리 대하시면 어떡해요.” 계단을 내려오며 아실리가 인사했다. “글리터 공작, 글리터 공자를 뵙습니다.”

  “오! 반갑소, 지니어스 영애.”

 

  글리터 공작이 짐짓 환하게 아실리를 반겼다. 유레카! 부득불 로비에서 떠든 보람이 있었다. 지니어스 성격에 수선스러움을 못 참고 내려올 줄 알았지.

 

  ‘저 아이가 지니어스 영애? ……너무 귀엽잖아!’

 

  알버트의 못마땅함 속에서 글리터 공자도 조심스레 아실리에게 인사했다. 힐끗 아실리를 쳐다보는 시선에 알버트의 눈매가 더욱 매서워졌다. 글리터 공작은 여전히 싱글벙글했다.

 

  아실리가 사건의 진위를 묻자, 공작이 친서를 팔락이며 알버트의 냉대를 한탄했다. 대단히 귀중한 친서라면서 종이를 흔들어대는 손목이 방자했다.

 

  “폐하의 명으로 예까지 왔는데 알버트가 당최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니…… 여기 페하께서 친히 써주신 편지도 있는데, 참…….”

 

  말끝마다 늘어지는 여운이 아련했다. 빌어먹을 케니스 글리터. 알버트가 한걸음 뒤로 물러서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진짜, 죽고 싶냐? 글리터 공작이 천연덕스럽게 윙크를 날리고,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공자가 한숨을 쉬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그 편지를 한 번 살펴보아도 될까요?”

  “물론이오.”

  “아,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지니어스 영애보다 아실리, 라고 불러주시면 기쁠 것 같아요.”

 

  글리터 공작의 환희를 뒤로 하고, 아실리가 건네받은 친서를 찬찬히 읽었다. 지니어스 백작에게 다음을 명한다: 백작은 글리터 공작에게 최소 세 시간, 최대 여섯 시간 수학을 가르쳐라. 단, 장소는 반드시 지니어스 본가여야 한다……?

 

  지니어스 가의 별장이라면 몇 군데 더 있었지만 본가는 여기밖에 없었다. 모크니 황제의 인장이 똑바로 찍혀 있긴 하나, 장난스럽게 휘날린 글씨체나 엉터리 내용만 보면 깜찍한 장난 편지 같았다. 알버트에게는 끔찍한 소식이었다.

 

  “……. 아실리, 잠시만 그 종이를 줘보겠니?”

  “하하, 내가 요즘 앉아 있는 시간이 줄다 보니 머리가 굳었지 뭔가.” 글리터 공작이 넉살 좋게 웃었다.

 

  “어떻게 조작한 거지?”

  “조작이라니! 폐하의 인장을 위조하면 중형을 받는 걸 몰라서 묻는가!”

 

  그럼 폐하 그 개자식이 이랬다고? 내가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하는데 내게 이럴 수가 있나?

 

  알버트 지니어스가 근면히 나랏일에 종사하는 것은 모크니 제국의 귀족이라면 모두가 아는 진실이었다. 그러나 최근 일주일 동안 알버트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글리터 공작이 부지런히 일을 처리한 것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가 친필 서한을 받아내기 위하여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간사한 황제만 알았다. 겨우 두 줄 써주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그렇게 일을 시켜대던지!

 

  “영 믿지 못하겠다면 내일 폐하께 직접 물어보시게.”

 

  필체도, 인장도 확실한 데다 이렇게나 자신 있게 나오는데 더 막을 턱이 없었다. 따라오게. 알버트가 짓씹듯 내뱉고, 공작이 그의 뒤를 따랐다. 와중 사랑하는 아들에게 응원의 윙크를 날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버지, 제발……. 로비에는 자연히 에드워드 글리터와 아실리 지니어스만 남았다.

 

  에드워드가 다시금 힐끗 아실리를 엿봤다. 이세계에서 하나뿐인 친구━엔토니 지니어스━가 매일같이 자랑하는 귀여운 여동생이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며느릿감으로 점찍어두고 있는 영애이기도 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원체 낯을 가리는 데다 귀여운 것에 약한 에드워드에게 하드코어 미션이었다.

 

  “음, 그럼 우선 제 방으로 가실까요, 공자?”

  “네.”

 

 

  그리고 방안.

 

  “…….”

 

  끔찍한 침묵이 둘 사이를 타고 흘렀다. 서로 하염없이 눈치만 보는 듯싶더니, 못 견디게 답답했던 아실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공자는 취미가 무엇인가요?”

  “검술, 입니다.”

  “오, 저희 가족 중에는 검술을 즐기는 사람이 없어 새롭네요. 검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라도 있나요?”

  “아, 어쩌다 보니…… 아버지께 배웠습니다.”

 

  오라버니와 친하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가까워진 건가요? 아버지께서 백작님과 친분이 있으셔서 자연스럽게 친해졌습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있나요?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습니다.

 

  일방적인 질의응답에 지친 아실리가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오가는 티키타카가 있어야 대화를 이어가든가 말든가 하지, 한쪽만 계속 질문하는 건 피폐했다. 대화하기 싫은 건가, 하고 낌새를 살피니 또 그건 아닌 듯했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쩔쩔매는 모양이 꼭 부끄러움을 타는 것 같았다. 주변에 또래라곤 열렬한 형제뿐이라 그만 착각하고 살아왔다. 세상에는 엔토니처럼 미친 망아지 같은 아이도, 그와는 반대로 숫기가 없는 아이도 있었다. 이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치트키를 꺼내 들어야 했다.

 

  아실리가 나름대로 예쁘다고 자부하는 미소를 만면에 장착하고 나긋나긋하게 제안했다.

 

  “공자, 저와 같이 역사를 공부하실래요?”

 

  정말 천재와 둔재는 한 끗 차이인 걸까? 어딘가 단단히 잘못된 치트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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