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 마라톤을 마친 뒤, 지니어스 남매는 마법진방으로 넘어가기 위하여 침대 밑에 나란히 누웠다. 아직 어린이들이라 체구가 작았으니 망정이지, 침대와 바닥 사이는 아슬아슬하게 비좁았다. 누군가와 이 마법진을 함께 이용해본 적이 없어 다소 긴장한 엔토니와 달리, 아실리는 이 상황을 못내 즐기고 있었다.
“아실리, 오빠 손 잘 잡고 있어야 해.”
“응. 괜찮아, 오빠. 긴장하지 마.”
“기, 긴장은 무슨!”
엔토니가 아실리의 손을 꼭 잡고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О, мая магія магія магія я магу гэта зрабіць Ях Ях……. 마법진에서부터 환한 빛이 쏟아지고, 이내 몸이 붕 뜨는 게 느껴졌다가 오래지 않아 가라앉았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방을 가득 메운 광활한 마법진들이 보였다. 우와! 생전 처음 접하는 별천지였다. 마탑을 들락이며 마법진방은 진작 익숙해진 엔토니는 별 감흥 없이 마법 성공에 안심하고 있는 사이, 아실리는 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저마다 마법진을 살폈다.
“오빠, 마탑으로 통하는 마법진이 뭐야? 다 비슷하게 생겨서 잘 모르겠어.”
“그거.”
엔토니의 손가락이 아실리의 발밑을 가리켰다. 아실리의 눈에는 똑같이 보일지라도 마법에 미친 엔토니에게는 거대 마법에 표상된 황홀한 차이점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왠지 여기일 것 같았어!” 몰랐으면서 아실리가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나 천잰가?”
“너 천재 맞아, 바보야.”
어느새 바짝 다가온 엔토니가 아실리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아실리가 째려보자 순진무구하게 웃으며 슬그머니 손을 잡는 게 아주 영악했다.
“이제 마탑으로 갈 거야. 준비됐어, 아실리?”
“당연하지! 얼른 가자, 기대된다.”
엔토니가 마탑으로 이동하는 주문을 외우고 마침내, 아실리 지니어스는 처음으로 마법의 탑과 대면했다. 눈앞에 하늘에서 휘날리는 종이들과 여기저기서 불꽃처럼 터지는 약품들이 먼저 담기고, 잇따라 불기둥이 무섭게 솟아올랐다. 홀린 듯 고개를 들면 높다란 천장에 수십 개의 별이 수놓아져, 그 주변을 반짝이는 빛무리가 맴돌았다.
“……Awesome!”
아실리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작게 소리쳤다. 마탑의 풍경에 완전히 넋을 놓아, 본인이 옛 언어를 쓴 줄도 모르는 눈치였다. 세 살 버릇 다음 생까지 간단 옛말 틀린 거 하나 없었다.
‘고대어? 잘못 들었나?’
아실리가 놀라는 순간들을 빠짐없이 살피다, 귀를 흘리는 낯익은 언어에 엔토니가 갸웃했다. 때때로 희귀한 주문이 고대 문서에서 발견되기도 하기에, 엔토니는 고대어에 친근한 편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어릴 적 고대의 탑 고고학자들에게 무진장 시달리곤 했다. 고대어 천재일 거라 뭐라나. 아무튼 고대어를 곧잘 해석하거나 능란하게 구사하지는 못하지만, 고대어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는 있었다.
그가 알기로 아실리는 태어나서 한 번도 고대어를 접해본 적이 없기에━고대어는 본래 세간 사람들에게 굉장히 낯설고 난해한 언어 체계였으며, 더불어 언제부턴가 알버트가 백작저의 고대어 서적들을 영문 모를 곳으로 옮겼다.━ 저리 자연스럽게 고대어를 말할 리가 없었다. 무언가 착각했나 보다. 아, 알았다. 어쩜! 하고 놀란 거구나.
약품을 제조하다 결국 시원하게 터뜨려버린 마법사 하나가, 오, 아까 아실리가 마주한 형형색색의 폭발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하여간 붉은 머리 마법사, 아만다가 마탑의 영원한 츤데레 엔토니를 발견했다.
“오, 우리 막내 왔구나! 어머? 드디어 막내가 일 쳤네, 아실리 지니어스라니!” 아실리 지니어스라는 이름에 각자 일에 몰두하던 마법사들의 온 시선이 모였다. 아만다가 무안한 듯 웃었다. “이런. 죄송해요, 영애. 엔토니가 지겹게 떠들고 다니는, 아, 그러니까, 정말 아끼는 동생을 드디어 본다는 생각에 들떴나 봐. 아니, 들떴나 봐요.”
젠장……. 원체 입이 험한 데다 귀족식 예법에 익숙지 않아 당황하는 아만다 옆에서, 엔토니가 깔깔 비웃었다. 막내라며 넌더리가 날 정도로 놀려대던 아만다를 떠올리자, 역시 세상은 권선징악. 악독하게 남을 놀리는 사람을 언젠가 벌을 받게 되는 이치이다!
“안녕하세요, 멋진 마법사님. 저는 아실리 지니어스입니다.” 간단한 인사 후 아실리가 엔토니를 가리키며 귀엽게 찡긋했다. “오빠의 가족이라고 들었어요.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아, 편하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FUCK, 이렇게 귀여워도 될 일인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고대어를 읊조리며 아만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한켠에서는, 아닌 척 정황을 지켜보던 마법사들이 다가와 엔토니를 툭툭 쳤다. 가족? 가아족? 그들은 선량한 시민의 돈을 갈취하려는 건달들처럼 껄렁대며,
“우리가 막내라고 할 때마다 이딴 가족 둔 적 없다며 캬앙거리던 엔토니가?”
“우리 앞에서는 싫은 티 팍팍 내더니 내심 좋아했던 거야? 역시 우리 막내, 깜찍한 거 봐!”
얼굴이 붉어진 엔토니를 놀려댔다. 엔토니가 캬앙캬앙 사납게 아르렁댔지만, 마법사들은 고양이 애교를 보듯 즐겼다. 아실리도 그들을 따라 남몰래 이 상황을 즐겼는데, 언제나 동생 앞에서는 번듯한 코스프레를 해오던 엔토니였기에 오빠의 앙칼진 면모가 새로웠다.
당장이라도 마법이 쏘아질 것 같은 난장판 속에서, 고대의 욕을 웅얼거리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만다가 인사를 이었다.
“그러면 말 편하게 할…게……? 그, 나는 아만다라고 해. 마법사고,” 그럼 마탑 사람이 마법사가 아니고 뭔데? 엔토니를 놀리던 마법사 하나가 끼어들었다가, 파이어볼! 불꽃구를 맞고 날아갔다. 아만다는 훌륭한 화火계열 마법사였다. “그냥 편하게 아만다라고 불러도 돼. 만나서 반가워, 지니어스 영애.”
“근사한 이름이네요, 아만다. 저도 편히 아실리라고 불러주세요.”
아만다를 선두로, 마탑의 마법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워낙 적은 수라 길어질 줄 알았던 인사는 의외로 금방 마무리되었다. 마탑의 정원은 스무 명이었는데, 그중 셋은 각기 모험을 떠난다고 나가 실종 상태였고 여섯은 부름에 응해 파견 갔다. 지니어스의 꼬마마법사 엔토니도 마탑 사람이었으니, 아실리가 안면을 틀 사람은 열뿐이었다.
인사하고 친해지는 과정에서, 평소 엔토니의 허다한 동생들 자랑이 폭로되는 헤프닝도 있었다. 엔토니가 평소 동생들 이야기를 지겹도록 하며, 그래서 아실리가 요즘 읽고 있는 책 제목까지도 안다는 고자질이었다. 실제로 아실리가 실없이 오늘 읽다 만 책의 제목을 물었을 때 마법사들은, 무슨 발전의 과정이었던 것 같은데. 동생이 역사 좋아한다고 했잖아, 맞다, 고대사! 오, 정답, ‘고대사의 발전 과정’. 진짜 정답은 『고대 역사의 발전 추이』였으니 엇비슷하게 맞추었다. 아실리는 일순 엔토니가 무서워졌다.
책 제목 외에도 동생들이 처음 걸은 일, 오빠 혹은 형이라고 부르며 달려올 때의 벅찬 귀여움, 무언가 집중할 때면 짓는 표정 등 엔토니가 미주알고주알 얘기했다는 걸 알고, 아실리의 볼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안다는 부끄러움보다는,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소한 것들을 모두 기억하고 남겨준 오빠에 대한 고마움이 컸다. 이를 다른 사람들을 통해 듣고 있자니 기분이 색다르고 간질거렸다. 아실리가 기뻐하는 걸 보던 엔토니도 덩달아 쑥스러워져 얼굴을 붉혔다. 마법사들은 건수를 하나 잡았다는 듯 흥이 올라 안달이었다. 그중 길게 늘어뜨린 백발이 인상적인 마법사, 파스쿠지는 가장 신나서는 엔토니를 놀리는 데 앞장섰다. 그러다 돌연 눈을 빛내며 아실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실리,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마법의 첫 대상이 되어주지 않겠니?”
“네?”
아, 그거? 주변의 마법사들이 즐겁게 호응하고, 파스쿠지가 차분히 설명했다. 근래 그가 새로운 마법을 개발했는데, 바로 일반인이 일시적으로 마나를 볼 수 있도록 돕는 마법이었다. 마법사들은 어느 경지에 이르면 숨 쉬듯 마나의 흐름을 살필 수 있었다. 마법사나 아티팩트는 저마다 특징적인 마나가 그들을 감싸기에, 마법사 혹은 아티팩트 사용자가 마법사에게 정체를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마법이 과연 유용할까요?”
아실리의 반문에 파스쿠지가 경혹하며 설명에 살을 덧붙였다.
“오, 당연하지! 마법사가 아닌 척 위장하고 있는 마법사를 알아차릴 수 있을 테고, 마법사의 공격을 쉽게 눈치채고 피할 수 있을 거야.” 마법사가 공격을 위해 캐스팅할 때는 근방의 마나가 유난히 요동쳤기 때문이다. “또, 성능이 뛰어난 아티팩트일수록 마나가 잔뜩 담기기 마련이니 아티팩트의 가치를 제대로 분간할 수 있겠고, 음.”
파스쿠지의 머릿속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마탑 내에서 하나를 말해도 열을 깨닫고 지레 흥분하는 미친놈들과 대화를 하다가,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밝혀 말하려니 골머리가 아팠다.지켜 보던 다른 마법사가 긍긍하는 파스쿠지의 어깨를 툭 치고 말을 받았다.
“아무래도 전쟁 중에 아주 유용하겠지? 전쟁이 일어났다 하면 마법사에게 온갖 요구가 쇄도하는데, 그런 것들에 적절히 예방할 수 있을 거야. 예를 들어, 원거리 범위 공격은 인근 도시를 둘러쌀 정도로 크게 마나가 너울거리니까.”
“마법사한테 너무 불리한 거 아니에요? 마나를 식별하는 건 마법사들의 대단한 강점으로 알고 있는데, 마법사들의 가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요.”
아실리가 언사가 조금 거칠었다고 생각했는지 금방 말을 고쳤다. 마법사들은 멍하니 그녀의 오목조목한 평가를 들었다.
“아, 그러니까 세간에서 상정한 가치요. 그런 마법이 있다면 확실히 전쟁 중 마법사들은 더 평안하겠네요.”
불려갈 일이 없으니까. 아실리가 눈치껏 뒷말을 흩뜨리며 말을 마쳤다. 마법사들 중 한 명이 바보같이 물었다. 네 살, 이라고 들었는데 맞…나……? 아실리가 제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네, 저번 달에 네 번째 생일을 보냈는걸요. 제가 조금……똘똘하다는 칭찬을 많이 들어요.”
존나 천재네. 존나 멋있어, 시━. 파스쿠지가 급히 아만다의 입을 틀어막았다. 애 앞에서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아만다의 평소 언어 습관을 익히 알던 엔토니도 말조심하라며 핀잔했다. 조심할게, 미안. 아만다가 잘못을 인정하고 깔끔히 사과했다.
“아실리, 네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뭐랄까, 마법사들은 다 그래. 이…… 이걸 뭐라고 했더라.”
“이해관계?”
엔토니가 알맞은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자 아실리가 도왔다. 엔토니는 오늘도 아실리의 명석함에 감탄했고, 다른 사람들은 경악했다.
“아, 응. 이해관계가 어떻든, 그냥 궁금하면 파고들고 연구하는 거야. 아마 파스쿠지도 그런 허점은 예상하지 못하고, ‘일반인이 우리처럼 마나를 볼 수 있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에 시작했을 거야. 특히 여기 있는 사람들이 심한 편이지.”
우리 막내 잘한다. 틀린 말이 하나 없었다. 마법사들이 달갑게 동조하며 넌지시 아실리를 설득했다.
“그러니까, 제게 실험대상이 되어달라는 거죠?”
아실리의 담담한 물음에 사방이 싸해졌다. 그제야 이 권유가 ‘처음’ 시도하는 마법임을 뒤늦게 깨달은 엔토니가 다소 사납게 아실리를 감쌌다. 그도 마법사라는 건지, 새로운 마법이라는 사실에만 꽂혀 다른 관계를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엔토니가 내 동생은 절대 안 된다며 필사적으로 반대하자, 마법사들이 다급하게 그를 말렸다. 애당초 완성된 마법이었다. 그들도 엔토니를 동생으로 여기는데, 동생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불완전한 마법을 시험할 리 없었다. 파스쿠지가 정립한 이론을 모두가 검토해보았고 획기적인 방향이라며 놀라 했지만, 정작 마탑에는 이미 마나를 볼 수 있는 자들뿐이라 아쉬워하던 참이다. 아실리를 모질게 피실험자로 이용한다는 게 아니라, 그저 새로 만들어진 마법의 대상이 되어줬으면 하는 거였다!
“메드라여, 맙소사. 아니야! 실험이라니. 여기 마나를 볼 수 없는 일반인은 너뿐이라, 문득 떠올라서 그냥 마법의 대상이 되어주었으면 했던 거야.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해.”
그렇게 느꼈다면? 애초에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 새로운 형식을 사용해보는 것을, 실험이 아니면 뭐라고 표현한단 말인가.
오, 맞다. 마법사들은 자신감이 지나치게 과했다. 아주 높은 기준을 넘어 마탑에 입성한 마법사들은 정도가 더 심했다. 완벽하게 정립한 이론인데다가 그들이 다 같이 검토까지 진행한 마법이 실패할 거란 가정을 조금도 두지 않았다. 여태껏 그래왔기 때문이다. 오직 엔토니만이 아실리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상정하고 불같이 화를 냈다. 마법사들은 오히려 엔토니가 동생을 과보호한다고 간주하며 그를 만류했다.
“좋아요. 한 번 해볼게요.”
고심 끝에 아실리가 무덤덤하게 받아들이자, 열불이 난 건 엔토니였다.
“뭐? 아실리, 진심이야? 아니, 다들 제정신이야? 날 말리는 게 아니라 파스쿠지 저 자식을 말려야지! 네 살밖에 안 된 어린애한테 갓 발명한 마법을 쓴다는 게 말이 돼?”
“오빠, 나 어린애 아닌데…….”
“너 어린애 맞으니까 가만히 있어!”
엔토니가 이렇게나 분개한 모습은 처음이라 놀란 아실리가 헙,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 풀어보겠다고 던진 농담이었는데 발바닥에 달린 눈치가 잘못했다.
마법사들이 엔토니의 격한 반응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이런저런 이유를 끄집어내 그를 회유했다. 완성된 마법이다, 함께 확인해보지 않았냐, 걱정할 일 없을 거다, 블라블라. 아실리도 슬쩍 껴서 엔토니를 다독였다. 새로운 마법의 대상이 되는 건 어느 정도 위험을 부담해야겠지만, 크게 염려되진 않았다. 마탑의 마법사나 되는 사람들이 일신의 안녕을 보장해주지 못할까. 오, 아실리도 탑의 명성을 너무 믿는 경향이 있었다.
“부작용은 없죠?”
“그럼, 당연하지!”
“봐봐, 오빠. 딱히 부작용도 없다잖아. 괜찮아. 나도 궁금하기도 하고. 오빠가 보는 세상은 어떨지 궁금해.”
“이런, 아실리…….” 순간 넘어갈 뻔한 엔토니가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래도 절대 안 돼. 이론적으로는 완벽하다지만 실제로 적용했을 때 어떤 부작용이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잖아!”
“그런데 오빠도 나한테 실험마법 쓰잖아.”
마법사들이 따가운 시선이 엔토니에게로 옮겨졌다. 엔토니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으며 아니라고 반박했다.
“아니긴. 오빠 만날 나한테 슬라이드 마법 써서 나 넘어뜨리잖아.”
엔토니는 종종 아실리에게 슬라이드 마법을 사용해 장난을 쳤다. 슬라이드 마법의 자연스러운 운동과 유연성을 실험하는 거라는 명분으로 매일 둘러댔는데, 사실 진짜 이유는 아실리가 미끄러져 그의 품에 안기는 것이 좋아서, 놀란 얼굴이 너무나 귀여워서였다. 아주 못된 오빠였다. 꼬마 악동 엔토니는 그동안 자기 무덤을 착실히 파오고 있었다.
엔토니가 당황한 틈을 타 마법사들이 재차 엔토니를 설득했다. 마법사들의 끈질긴 종용, 이전에 확인한 이론의 완전성, 마탑의 뛰어난 실력과 높은 명성, 무엇보다 아실리 본인이 원하는 일이었다. 결국 엔토니가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해봐. 가만 안 둬.”
파스쿠지가 허락해줘서 고맙다며 엔토니에게 악수를 건넸다. 엔토니는 내밀어진 손을 가만 보다가 툭 치고 말았다. 파스쿠지가 멋쩍게 웃었다.
“음, 그러면 잠시만 눈을 감고 있어 줄래?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파스쿠지가 주문을 읊는 소리가 은은하게 퍼졌다. 아무리 돌아봐도 아닌 것 같아, 엔토니가 뒤늦게 파스쿠지를 말리려 동작을 취했다. 취하려 했다. 다른 마법사들이 기겁하며 엔토니의 양팔을 잡아 막았으니 다행이었다. 오히려 마법을 억지로 중단하면 정말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젠장! 마법의 기본도 순간 잊어버리고 일을 저지를 뻔한 엔토니가 거칠게 머리를 헝클였다.
“후, 끝났어. 이제 눈을 떠도 돼.”
아실리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아닌가, 뜨지 않았나? 아니다, 틀림없이 눈을 떴다. 그런데 온 세상이 암흑같이 깜깜했다. 눈을 감았다 뜨는 느낌은 드는데, 예상했던 시야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온통 어둠, 어둠, 어둠뿐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래? 눈이 좀 뻑뻑해서 그래? 아무래도 눈에 시전한 마법이라 그런가 봐. 혹시 많이 불편해?”
엔토니가 팔을 붙들고 있던 손들을 매섭게 뿌리치고 아실리에게 다가갔다. 아실리, 괜찮아? 불편한 데 있으면 말해봐. 얼른, 제발, 아실리…….
십수 번 눈을 깜빡인 뒤에야 상황을 직시한 아실리가 입술을 꾹 깨물고, 엔토니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엔토니와 마법사들이 차츰 이상함을 느끼고 서둘러 상태를 물었다. 분명 엔토니를 바라보는 듯한 두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았다.
“아……. 오빠, 나 앞이 안 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