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나는 파르체 제국이 당연히 컬투라 왕국의 연장선인 줄 알았는데 이 책을 읽어보니 생각이 조금씩 바뀌네.’

　 『역사의 그림자: 패자는 어디에 남았는가』. 아실리가 책 제목을 상기하며 감탄했다. 대중적 역사에 감춰진 이면을 샅샅이 파헤치는 이번 책은, 알버트가 특별 공수해 온 금서였다. 처음 이 책을 건네받았을 때 아실리는 기쁨과 걱정을 감추지 못했는데, 후자에 대하여 알버트는 괜찮다며 거들먹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왜냐하면 알버트 지니어스는 이 나라의 최고위 관료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서울 게 없었다.

　 아무튼, 멋진 아기 아실리는 혼자일 때면 대부분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글씨도 척척 쓰는데 책장을 못 넘길 리가 없었다. 섬세한 컨트롤은 어려워 종종 서너 장을 뭉텅이로 넘기긴 하지만, 그래서 결정적인 스포를 당한 적에는 울컥했지만! 대인배 아기 아실리는 그런 일로 노하지 않았다. 조금 욱했을 뿐이다.

　 “아실리!”

　 엔토니가 해맑게 방안으로 들어섰다. 두어 번 노크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어 의아한 참에, 방안에서 감탄 소리가 들려 문을 연 것이다. 그는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좋았는데, 무려 삼 개월만에 『너만 모르는 제국의 역사』를 완독한 까닭이었다.

　 약 13개월 전, 그러니까 황궁마법사 블루투스를 통해 아실리가 역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엔토니는 좋은 오빠가 되기 위하여 역사를 공부해보려 했다. 그래, 분명 하려 했다. 역사가 그렇게나 지루할 줄 미처 예상 못한 게 흠이었다. 잠귀신이 장난을 치는 것처럼 책만 피면 잤다. 다양한 선과 문양이 조화를 부리는 마법진을 다루다가 역사 서적만 들여다보면 현기증이 났다. 엔토니 지니어스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하여 역사 공부의 다짐을 미뤄둔 지 오래, 그러던 중 아실리가 스스로 곧잘 책을 읽기 시작하며 위험 경보가 켜졌다. 엔토니는 독하게 마음을 다잡고 기초견문서 『너만 모르는 제국의 역사』를 들었다. 독서의 속도를 높여 나가게 된 계기는, 읽기 전 제목을 비웃던 게 무색하게도 정말 엔토니만 모르던 내용이라는 점이다! 다이애나와 아실리는 진작 역사 독서 모임을 갖고 있었으니 그렇다 하지만, 믿었던 알버트마저……! 수학밖에 모르는 아버지가 이럴 수는 없었다━엔토니는 자기 아버지가 나름 재상직을 맡고 있음을 평소 인식하지 못했다. 한 나라의 재상이 기본적인 역사도 모른다면 그 나라는 문제가 심했다. 다행히 모크니 제국은 안녕했다.━

　 그리고 오늘! 기어이 엔토니는 『너만 모르는 제국의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굉장히 어려운 책을 이겨냈다는 뿌듯함과 해방감이 넘실거렸다. 더불어 아실리의 인정이 기대됐다. 그러나 엔토니의 바람은 불행히도 순탄치 않았다. 사악한 타이밍 탓이다. 아실리는 한창 집중하여 『역사의 그림자: 패자는 어디에 남았는가』를 읽느라, 엔토니의 부름에 평시와 같이 응하지 못했다.

　 ‘건국기에 컬투라 왕국인이 파르체 제국의 지배층을 이루었으니 자연스럽게 계승국이라고 여겼는데, 절대적 다수인 피지배층을 고려하지 못했어. 그렇다면 지브로주 왕국인이 대부분이던 파르체 제국이 과연 컬투라 왕국을 계승한 나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왜 이런 관점으로는 생각하지 못한 걸까. 완전한 실책이야.’

　 지니어스가 지니어스하는 중이었다. 모 교과서의 가르침처럼 착실히 비판적 읽기를 수행하는 아실리 곁에서, 아실리! 아실리? 오빠… 왔는데……. 언제나 얌팡지던 엔토니의 기가 죽어가고 있었다.

　 엔토니가 제게 관심을 앗아갈 책놈의 면면을 살피려 슬쩍 허리를 숙이다,

　 ‘역사의 그림자: 패자는 어디에 남았는가’

　 제목을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흑마법의 그늘: 싸늘하게 잠든 마법사들, 이런 책이라면 모를까 눈앞이 아찔해지는 이름이었다. 제목을 알고 나니 더 괘씸해졌다. 물론 아실리가 아니라 책이. 게다가 좋은 오빠가 되고 싶어 만만찮은 책 한 권을 끝마치고 오는 길이기에 서운함이 더했다.

　 엔토니가 흘끗 책 페이지를 엿본 후 아실리에게서 책을 빼앗아 덮어버렸다.

　 “어?”

　 그제야 엔토니의 존재를 눈치챈 아실리가 그를 올려다봤다. 아, 책 페이지 확인 못했는데. 흥미로운 독서 시간을 방해받은 아실리의 눈에 미약한 짜증이 어렸다. 가장 재밌게 읽던 때 말없이 책을 가져가버리면 어떡하냐고, 아실리가 언뜻 쏘아붙이듯 말했다.

　 내가 말을 얼마나 했는데, 얼마나 불렀는데. 억울한 엔토니가 입을 꾹 다물고 책을 아실리에게 돌려주었다.

　 “오빠.”

　 “……내가 기억하고 있어. 116페이지야. 그리고 말했는데 네가 못 들은 거야. 그래도 책 읽는 데 방해한 건 미안해.”

　 툴툴거리듯 문장을 끝맺었다. 속상하긴 했지만 까다로운 책을 다 읽었다고 아실리가 당연하게 알아주어야 하는 건 아니었고, 무엇보다 멋대로 책을 빼앗아 간 건 잘못이 맞았다.

　 아. 자신의 비뚤어진 집중력에 대하여 익히 들은 아실리가 엔토니의 기분을 살피며 사과했다. 어디 하나에 꽂히면 셀프 노이즈 캔슬링을 해버리는 건 지니어스의 특징이었으니, 엔토니 지니어스도 흔쾌히 사과를 받아들였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아마 엔토니 지니어스는 언제나 아실리 지니어스에게 한 발짝 양보할 것이었다. 저를 향하는 푸른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도무지 화를 낼 수 없었다.

　 “조금 서운하기도 했는데,” 미안! 아실리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다시 사과했다.

　 “아냐, 지금은 괜찮아! 맞다, 아실리, 나 『너만 모르는 제국의 역사』 다 읽었다?”

　 엔토니가 으쓱거렸다. 우와, 오빠 대단하다! 엔토니의 역사 멀미를 알고 있는 아실리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조금 더 으쓱해져서는 이어질 칭찬을 기다리고 있을 제,

　 그럼 오빠는 프레시나 황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역사토론의 서막이 열렸다.

　 당시 운이 안 좋았다고 여기고 말았던 역사토론은 이다음에도 오래 계속되었다. 혼을 쏙 빼놓는 질문 세례는 지니어스의 아침·점심·저녁 인사로 자리 잡기까지 했다. 결국 한계에 봉착한 알버트가 크아앙 울부짖으며 백작저의 역사책을 봉인시켰지만, 그것도 아실리의 애교에 이틀도 채 못 가고 풀어졌다.

　*

　 10월의 어느 행복한 날, 지니어스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훗날 언어의 귀재로 명성을 떨치는 아서 지니어스였다.

　 우와……. 지니어스 막내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지니어스 남매가 제각기 탄식을 뱉었다. 처음 본 남동생이었다. 아실리가 엄청 작다며 놀라고, 엔토니는 괜스레 못생겼다고 심술을 부렸다. 그러면서도 지켜줄 동생이 늘었다며 듬직하게 주먹을 쥐는 모습이 보였다.

　 아서, 아서 지니어스. 아실리가 새근새근 자는 동생의 이름을 몇 번인가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예쁜 내 동생, 내가 심심하지 않게 매일매일 재밌는 역사책 읽어줄게.

　 오, 무슨 그런 끔, 아니 깜찍한 생각을. 아실리, 동생이 참 기뻐하겠구나. 그동안 역사에 너무나도 시달린 알버트가 부자연스럽게 미소 짓다가 엔토니와 눈을 마주쳤다. 수학과 마법, 순수 이과 부자가 서로를 측은하게 이해했다. 이제 역사는 지긋지긋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