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솜이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몸이 이리저리 기울고, 시야가 마구 흔들렸다. 취할 대로 취한 그녀의 몸은 이미 그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뒤에서 시원이 그런 다솜의 모습을 보며 불안한 듯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시원이 데려다준다 했는데도 폐 끼치기 싫다고 굳이 혼자 간다는 다솜이었다. 시원에게는 그게 더 곤란한 행동이라는 것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시원아아! 오늘 고마웠어어어! 내일 보자아아!”

　 다솜이 휙 뒤를 돌아, 시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시원은 다솜을 따라 손을 흔들면서도 불안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제 몸도 똑바로 가누지 못하는 애가 혼자 어떻게 들어간다는 거야! 아무래도 다솜을 따라가야 할 것 같았다. 몰래 뒤를 쫓는 게 적절치 못하다는 건 알지만…… 그녀가 집에 무사히 들어갔음을 확인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하… 내가 어쩌다가…….”

　 시원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자신은 항상 뒤에서, 이렇게 지켜보기만 했다. 다솜이 그 자식이랑 처음 연애하기 시작했을 때도, 다솜이 그 자식 때문에 힘들어했을 때도, 다솜이 그 자식과 웃고 떠들 때도. 용기가 없어서 항상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 이 짓도 끝이다. 다솜이 드디어 그 자식이랑 헤어졌단다. 이번에는 좀 더 용기 내어서, 적극적으로 변해보리라. 해서 내가 다솜의 옆자리를 차지하리라.

　 시원이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했다. 그리고 적정한 거리를 두고 다솜을 뒤따랐다. 우선 쟤가 집에 들어가는 모습부터 봐야지 오늘 평안히 잠들 수 있었다.

　 “으엉… 결국 헤어졌어……. 한가람…….”

　 다솜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가람. 그는 다솜이 3년 가까이 사귄 남자였다. 그리고 오늘 헤어진 남자였다.

　 다솜과 가람은 풋풋하게, 따스하게 사귀었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보며 힐링커플이라 불렀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치유되고, 따듯해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이 식어 헤어지는 주위 커플과 다르게, 둘은 초반의 설렘을 유지했다. 물론 함께 나날들을 보내면 보낼수록 서로에게 익숙해지기도, 서로가 편해지기도 했지만 다솜은 우리의 사랑이 익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그녀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어느 순간부터 다솜의 연락도 잘 받지 않고, 다솜과 만나서도 전처럼 기뻐 보이지 않던 가람이 이윽고 헤어짐을 말했다.

　 ‘다솜아… 우리 헤어지자.’

　 떨리는 목소리로 이별을 고하던 목소리가 다솜의 뇌리에 박혀 도무지 잊히지 않았다. 어떻게든 잊어보려 시원을 불러 주구장창 술을 퍼마셨지만, 오히려 더 선명해지기만 했다.

　 가람의 태도가 변했을 때부터, 다솜도 어느 정도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이별을 맞닥뜨릴 줄은 몰랐다. 그래도 한때는 함께 가정을 꾸리는 상상까지 나누었던 남자였다. 당장은 그가 밉기도 하지만, 그를 향한 사랑은 여전히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삼 년간의 정은 그리 쉽게 다솜을 놔주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힝, 그냥 시원이한테 데려달라고 할 걸… 아냐, 아냐! 오밤중에 달려 나와 준 것도 고마운데 데려다주긴 뭘 데려다줘.”

　 다솜이 술 때문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혼잣말했다. 시원은 고등학교 때부터 쭉 함께 한 친구였다. 흔히들 말하는 남자 사람 친구. 그게 바로 하시원이었다.

　 누군가가 다솜에게, 그리 긴 시간을 함께 지내면서 시원에게 설렌 적이 단 한 번도 없느냐고 물어보면 명쾌하게 그러하다고 답하지는 못한다. 훤칠한 키에, 훈훈한 얼굴에, 시원시원한 성격의 그에게 가끔 설렐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끔. 시원은 즐거울 때든 힘들 때든 늘상 곁에 있어주던 소중하고 고마운 친구였다.

　 “오늘도 내가 그 자식이랑 헤어졌다니까 바로 달려 나와서 같이 술 마셔주고… 나 토 하는 것도 도와주고… 헤, 이제 시원이 없으면 토도 못하겠엉.”

　 다솜이 헤실헤실 웃으며 총총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시원이 그녀의 혼잣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들으며, 혼자 한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와아! 오늘 달 짱 예쁘다! 달님이 떴어~ 토끼가 찍어~ 방아 찍어~”

　 다솜이 밤하늘에 은은하게 뜬 보름달을 보며 흥얼거렸다. 그 모습을 뒤에서 모두 다 보고 있던 시원이 입을 막고 큭큭 웃었다. 미치겠다, 이다솜.

　 “어? 어?!”

　 그 때, 흥에 취해 걸음을 옮기던 다솜이 꽝꽝 언 빙판길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만 발을 헛디뎠다. 다솜은 재빠르게 중심을 잡으려고 했지만 갑자기 느껴지는 엄청난 중압감에 완전 중심을 잃고 말았다.

　 ‘뭐야. 이거 왜 이래! 막, 뭔가가 날 찍어 누르고 있는 것 같아!’

　 몸이 무거웠다. 머리가 뒤로 쏠렸다. 그와 동시에 순간적으로 올려다본 커다란 보름달은 이런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달 예쁘다는 거 취소야. 쓰러지는 와중에 다솜이 웅얼거렸다.

　 “이다솜!”

　 시원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다솜을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다솜의 몸이 머리부터 뒤로 크게 쏠린 것을 보니 자칫 잘못하다가는 크게 다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니 시원의 머릿속이 하얗게 잠식되었다.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혹은 너무나도 빠르게 느껴졌다.

　 한편 다솜은 익숙한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으며, 또 자신의 뒤를 밟은 것이 분명한 시원을 떠올렸다. 그럼 아까 내가 말한 오바이트 어쩌고 한 거랑 달 보면서 노래 흥얼거리는 거 다 들었겠네. ……쪽팔려.

　 다솜의 머리가 바닥에 쾅 부딪혔다. 그리곤 순간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시원아, 미안…….’

　 얼핏, 시원의 절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

　 [으이크, 실수로 ‘기억’을 넣어버렸구나. 지니어스의 딸이라기에 기뻐서 이것저것 넣다 보니 그만……. 그래도 금방 적응할 것이니 걱정은 말려무나. 어쩌면, 이도 운명일 테지. 사과의 뜻으로 인연의 실 몇 가닥을 같이 넣어주마. 오, 이건 워낙 끈끈해서 안 가져가기도 어렵겠구나. 그럼 행복하거라, 눈부신 아이야.]

　*

　 어두웠던 시야로 가느다란 밝은 빛이 침투했다. 다솜은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어머! 예쁜 아가씨세요!”

　 “마님, 정말 축하드려요!”

　 방 안에 있던 시녀들이 탄성을 지르며 기쁨을 표했다. 식은땀으로 온 얼굴이 젖은 지니어스 백작부인, 다이애나가 그 말을 듣고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어? 그런데 아가씨가 울지 않으세요. 왜, 왜 안 우시지?”

　 아이━다솜━ 안고 있던 백작가의 유모가 아이의 엉덩이를 여러 번 내리쳤다. 아기의 입과 기도에 있는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아기가 건강하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어야 했는데, 이 아가씨는 아무리 엉덩이를 내려쳐도 울지 않았다. 큰일이었다.

　 다솜은 눈동자를 사방으로 굴리며 주위를 훑었다. 하지만 시야도 좁을뿐더러 고개도 움직여지지 않아서 모든 것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대강 살펴보니, 이다솜이던 자신은 죽고 다음 생을 시작하는 듯했다.

　 그녀는 딱히 당황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이 점이 그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말짱한 정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고? 그러나 그 당황스러움도 곧 가라앉았다. 그저 약간의 의문이 남을 뿐이었다.

　 “어, 어떡하죠! 아가씨께서 울지 않으셔……!”

　 놀라고 다급한 건 바로 방 안의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다솜을 안고 있던 유모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태로 의원을 찾았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의원은 유모와 마찬가지로 기겁하며 다솜을 받아 들었다.

　 다솜은 자신이 안 운다고 호들갑을 떠는 유모와 손을 벌벌 떠는 의원을 보며, 울까, 말까 고민했다. 가뜩이나 몸도 힘든데 굳이 울어야 하나? 다솜은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보다는 굉장히 피곤한 자신의 몸이 우선이었다.

　 벌컥! 그때 지니어스 백작, 알버트가 문을 거세게 열고 들어왔다. 그의 눈에 사색이 된 다이애나와 울지 않고 있는 딸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 알버트, 어떡하죠? 아이가, 아실리가 울지 않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이애나.”

　 알버트가 다이애나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며 그녀를 달랬다. 그리고 자신의 딸, 아실리에게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무뚝뚝한 알버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딸이 어지간히 사랑스러운 듯했다.

　 ‘이번 생의 아버지인가?’

　 다솜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알버트를 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의아함을 느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잘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보고 듣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워낙 무궁무진한 세상이니 인외 종족으로 태어난 것일 수도 있었다.━다솜은 세계 건너편 어딘가 호그와트가 실재한다고 믿었다.━

　 “딸아, 울어주지 않으련? 우리 아실리가 안 울면 엄마아빠가 걱정된단다.”

　 알버트가 의원에게서 다솜을 받아 안으며 부드럽게 달랬다. 다솜을 넘겨주던 의원, 그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유모, 알버트를 믿고 있던 다이애나, 그 밖의 시녀들이 그를 지켜보다 경악했다. 천재와 괴짜는 한끗 차이라더니! 아무리 지니어스 가문이라지만 갓난아기가 걱정되니 울어달라는 말을 듣고 우는 건 말도 안 됐다.

　 그러나 다솜은 일반적인 갓난아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게슴츠레한 시야 너머로 느껴지는 사랑과 애정을 마주하고, 지친 몸에 다시금 힘을 실어,

　 “으애애앵!”

　 아주 우렁차게 울었다.

　 한편,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지니어스 백작가라지만……

　 ‘어떻게 갓 태어난 아기가 아버지의 말을 알아듣고 울어!’

　 바야흐로 일명 천재가문 지니어스 백작가에 눈부신 딸이 찾아온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