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기 섞인 바람이 한바탕 휘몰아치고 지나간 뒤, 온몸에 유리조각들이 촘촘히 박혀서 격자무늬처럼 피를 흘리고 있는 오크들이 얼음조각인 양 우뚝 서 있었다.
달려들려던 발길 그대로, 팔을 치켜든 모습 그대로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서리 같은 냉기에 갇힌 그들은 입마저 얼어붙어 있었기에 괴성을 지를 수도 없었다.
세상이 조용했다.
“아! 마법사님이셨군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벽에 바짝 붙은 채 떨고 있던 여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내게 감사인사를 했다. 내가 얼음조각 만드는 걸 지켜본 유일한 관객이었다.
“당분간은 오크들이 꼼짝도 못할 테니까 안심하세요. 이제 밖으로 나가셔도 됩니다.”
“네. 하지만 바깥에도 오크들이…….”
여자가 문밖을 바라보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내 시선도 따라갔다. 깨진 유리문 너머로 혼란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크들이 다른 가게들도 마구 때려 부수고 있었다.
아직 경찰이나 군대는 출동하지 않은 것 같았다. 거리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근데 여기 주인은 어디로 사라진 거죠?”
나는 아까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주인 남자는 가게를 버려둔 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저 뒤쪽에 문이 있던데요. 거기로 나가더라고요.”
여자가 주방 쪽을 가리켰다. 나는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식당 유리문이 산산조각이 났으니 이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주인이 빠져나간 길을 찾아서 그쪽으로 가볼 생각이었다.
주방 안쪽에 작은 철문이 보였다. 가게 뒤쪽으로 나가는 문인 것 같았다. 문을 잡아 열려고 했으나 열리지 않았다. 반대쪽에서 잠겨 있는 듯했다.
주인 남자가 급히 도망을 가면서도 잊지 않고 문을 잠가 놓았다는 게 어딘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철문을 바라보았다. 뒷문치고는 꽤나 견고해 보였다.
하지만 잠긴 문을 여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아직 내 마법능력을 전부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어떻게 발동시키는지는 감을 잡았다. 나는 문을 바라보며 의념을 흘려보냈다.
철컥.
생각대로 문은 간단히 열렸다.
투시로 문의 구조를 파악했고, 염동으로 걸쇠를 움직였다.
“이쪽으로 나갑시다.”
여자를 먼저 문밖으로 내보내고 뒤따라 문을 나선 뒤, 오크들이 뒤따라오지 못하도록 다시 걸쇠를 걸어두었다. 걸쇠는 아주 단단하고 묵직했다. 마법이 아니었더라면 열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근데 여긴…… 밖으로 나가는 길이 아닌 것 같은데요?”
앞서가던 여자가 주춤주춤 발걸음을 늦추며 말했다.
이제 보니 철문은 바깥으로 곧바로 나가는 문이 아니었다. 문 뒤쪽에는 좁은 복도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일단 가보죠.”
나는 여자를 지나쳐 앞장서 걸었다. 어디로 이어지는 복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보는 수밖에.
복도 끝에는 또 하나의 철문이 있었다. 그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열자 이번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밖으로 나가는 뒷문이 아니라 지하실로 이어지는 길이었나? 주인 남자가 지하실에 몸을 숨긴 건가?
하지만 원래 그 식당 건물의 지하실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이미 꽤 긴 복도를 걸어왔다.
그때 아래쪽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한 담배냄새도 흘러나왔다.
‘여긴 뭐 하는 곳이지?’
궁금증이 일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제법 깊은 지하실인 듯 계단이 한참 이어졌다.
한 굽이 정도 남았을 때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들이 커다란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서 시끄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마작 패들이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다. 남자들은 지하임에도 아랑곳없이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공간의 넓이였다. 지하 공간은 예상외로 꽤 넓었고 홀에서 여러 곳으로 이어지는 문과 계단들이 보였다.
분명히 내가 들어섰던 식당 건물의 지하에만 해당하는 공간은 아니었다. 당장 보이는 홀만 해도 여러 채의 건물이 합쳐진 정도의 크기였고, 단지 그것만이 아니라는 짐작이 들었다.
‘차이나타운의 지하세계인가?’
중국식당 주인들이 사교하는 공간? 불법 도박을 하는 하우스?
하지만 그렇게 가벼이 여기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금세 눈에 들어왔다. 홀의 구석에 총기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저건 누구야?”
“어?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누군가 먼저 나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이어서 방금 전의 그 식당 주인이 날 알아보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제는 식당 주인이 뒷문을 걸어 잠근 것이 이해됐다. 아무리 봐도 이곳은 비밀스러운 공간임에 틀림없으니.
오크 무리를 피하려던 것뿐인데 괜한 벌집을 건드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싶었다.
“이런, 길을 잘못 들었네요.”
이 말이 먹힐 거라 생각지는 않았지만 일단 이렇게 대꾸했다.
그러면서 지하 홀 안에 있는 사람들의 수와 분포를 재빨리 살폈다. 테이블 둘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열두 명. 그리고 어딘가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문 앞에 두 명이 서 있었다.
그때 뒤에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계단을 돌아 내려온 여자가 지하의 광경을 보고 놀라는 소리였다.
돌아보니 여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 젠장. 내가 분명히 문을 잠갔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따라 들어온 거야?”
“황가, 자네 식당 종업원들이야?”
“아니야. 오크들 피해서 지들 멋대로 식당으로 도망쳐 들어온 인간들이야.”
“아니 그런데 저건……? 도마뱀이잖아?”
“뭐야? 재수 없게. 도마뱀 따위가 어딜 감히 기어들어와?”
남자들이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몇몇은 벌써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기들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에 우리가 갑자기 나타났으니 당황해하고 짜증내는 건 알겠는데,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끼어 있었다.
‘도마뱀이라고?’
남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가라고 불린 식당 주인은 피우던 담배를 집어던지곤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들었고, 도마뱀 운운하던 남자는 홀을 가로질러 총기들이 놓여 있는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마력 탐지를 펼쳤다.
다행스럽게도 거기 있는 자들 그 누구에게서도 마력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사는 없다. 모두 일반인들이다. 그렇다면 상대하기 어려울 건 없었다.
“근데 여긴 뭐 하는 곳이지?”
남자들의 주의를 끄느라 내가 질문을 던졌다.
선제공격을 한다면 단번에 싹 쓸어버리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래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무턱대고 이 공간에 침입해 들어온 쪽은 나였으니까.
저들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굳이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만 대비는 해야겠기에 마력을 펼쳐내서 나와 내 뒤에 있는 여자 주위로 보호막을 생성하는 중이었다.
원래 동작이 느려터진 건지 아니면 당장 날 죽일 생각은 없어서 그런지, 남자들의 공격이 곧바로 들이닥치지는 않았다.
“네놈이 그걸 알아서 뭐 하게?”
“궁금해서 그래. 차이나타운의 지하세계인가? 사교 공간이야?”
나는 비교적 점잖게 질문을 던졌다. 존댓말은 집어치웠지만 적어도 그들처럼 막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자들은 내게 싸움의 이유를 만들어주려는 것처럼 마구 떠들어댔다.
“겁도 없이 뭐라는 거야?”
“하여간 세상이 흉흉하니까 별게 다 나타나서 지랄이네.”
“저 새끼 끌어와!”
단검을 빼든 황가가 앞장서 내게로 다가오며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으름장을 놓았다.
“너 혹시 짭새냐? 미안하지만 네놈이 짭새라 해도 그냥 보내줄 순 없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발을 들여? 네놈이 실수한 거야. 여기에 들어온 이상 곱게 돌아가긴 틀린 거라고! 비루먹은 강아지 같은 새끼.”
아까부터 참 마음에 안 드는 자였다. 말본새가 조잡하고 무례했다. 내 분노를 끌어올리기에 모자람이 없을 만큼.
슬슬 이마가 뜨거워져갔다.
“말이라고 막 하네. 손님들한테 너무 무례한 거 아냐? 그래가지고 장사하겠어?”
“저 새끼가 근데!”
“골에 구멍 뚫리고 싶지 않으면 그 입 닥쳐라.”
황가가 단검을 치켜들며 당장 나에게 달려들 듯이 자세를 취했다. 홀 구석에서는 두 남자가 자동소총을 치켜들었다.
나는 가만히 몸속의 에너지 파동을 끌어올렸다. 명치 부근에서부터 에너지가 꿈틀거렸다. 이마가 화끈거렸다. 이윽고 손끝이 저릿저릿하도록 마력의 파동이 거세어졌다.
“어서 저 새끼 끌어와! 도마뱀 년도 놓치지 말고.”
순간 도마뱀이라는 말이 또다시 궁금증을 자극했다. 그게 내 뒤에 있는 여자를 말하는 거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한데 어째서 자꾸 도마뱀이라고 하는 거지? 무슨 은어인가?
궁금증은 저놈들을 제압해놓고서 풀기로 했다.
미리부터 다가와 있던 황가를 위시하여 남자들 여럿이 내 쪽으로 달려왔다.
유리한 건 나였다. 나는 여전히 계단 위쪽에 있었다.
“멈춰라!”
내가 먼저 손을 뻗으며 외쳤다.
그러고는 손끝으로 지하 공간 전체를 휘감듯이 크게 원을 그렸다. 순식간에 푸르스름한 냉기가 공간을 가득 채워갔다.
“뭐, 뭐야?”
“저놈 마법사였어?”
쩌저적!
살을 에는 듯이 습습하고 차가운 냉기가 공간을 장악하고는 이내 날카롭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단검을 움켜쥔 손이 그대로 얼어붙고, 소총을 치켜든 팔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숨이 서리가 되어 쩍쩍 얼어붙고 갈라졌다. 지하 공간을 맴돌던 담배연기마저 급속히 얼어붙었다.
공간 자체가 차갑게 빙결되었다.
“으아아악!”
“끄윽!”
“…….”
요란하게 질러대던 비명까지 얼어붙고 나자 사위가 고요해졌다.
보호막에 둘러싸여 있는 나와 여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게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푸른빛이 도는 새하얀 빙설의 풍경. 그 광경은 그대로 두고서 오래도록 감상하고 싶을 만큼 순백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궁금한 게 많았다. 내 질문에 답해줄 입이 필요했다.
나는 손끝을 살짝 움직여 얼어붙은 공간 한 부분에 약한 전류를 흘려보냈다.
“헉!”
황가가 숨을 토해내며 꽝꽝 언 나무토막처럼 옆으로 쓰러졌다.
서리 낀 얼굴로 턱을 덜덜 떨어대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를 향해 나는 천천히 남은 계단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