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이름을 잃어버린 자
(프롤로그)
모두가 잠든 고요한 새벽, 왠지 모르게 스산한 숲에 있는 한 성에서 칼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진다.
'챙'
그 선율은 창가의 바람을 타고 그대로 그녀의 가슴에 꽂혀버린다.
그와 동시에 작은 칼의 비수는 재빨리 그의 목으로 향한다.
창가를 통해 들어오던 차디찬 바람은 더 이상 그녀의 타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리고, 오직 뜨거운 열기만이 방안을 가득 메운다.
"...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
감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채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그였지만, 이윽고 들려오는 재촉하는 물음에 입술을 달싹이며 겨우 입을 연다.
"대답 안 해?"
"... 죄송합니다."
돌아오는 그의 대답에 다시 한번 잔인한 현실을 자각한 듯, 이미 한 방 맞은 그녀의 가슴에 더 큰 비수가 꽂힌다.
그녀는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 모든 것이 거짓이었군."
"... 그건,"
그녀의 눈빛을 보던 그가 머뭇거리다 겨우 입을 뗐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만, 거기까지."
"..."
"같잖은 변명 따윈 듣기 싫다."
"..."
"... 당장 꺼져, 내 손으로 널 죽여버리기 전에."
자신을 죽일 거라는 날이 선 말과는 다르게 너무나 위태로워 보이는 그녀였기에, 결국 그는 하려던 말을 잇지 못한 채, 조용히 작별을 고하고 성을 떠났다.
"... 안녕히 계세요. 마녀님."
그가 떠나자, 그녀는 온몸에서 영혼이 다 빠져나간 듯이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가느다란 몸으로 겨우 버티고 있던 압력을 더 이상 이기지 못한 탓이다.
그와 동시에 매서운 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눈에서부터 얼굴을 타고 점점 바닥으로 불규칙적이게 떨어지는 새하얀 눈물들은 그녀의 엉망이 돼버린 기분을 잘 나타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색상은 그녀의 마음과 대비되는 너무나 눈부신 빛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녀는 머릿속이 꽤나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그 물음에 대한 정답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건 아마 널 처음 본 그 순간부터겠지.
그때, 널 모질게 내쫓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불행하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그날의 행동을 땅을 치고 후회했다.
-
(1) 마녀라 불리는 자
스플렌도르 왕국, 알베로 국왕 18년.
외부 사람들의 침입이 전혀 없어서, 겉으로 보기엔 어느 왕국보다 안전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그 시기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스플렌도르' 왕국은 대체로 건물들이 크고 휘황찬란하게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곳이다.
단, 백성들이 살고 있는 집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어느 나라의 어느 시기에나 그렇듯, 스플렌도르 왕국에도 마태효과(부익부 빈익빈)가 강력히 존재했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을 한 번에 역전 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전쟁'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왕국 사람들과 전쟁을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전쟁을 해야 할 대상은 다른 왕국도, 심지어 사람도 아니다.
그 대상은 바로, 스플렌도르 왕국의 출입구인 라노떼의 숲에 있는 검은 성의 '마녀'였다.
마녀는 포확한 얼굴로 나타나 강력한 마력을 내뿜기 때문에 스플렌도르 사람들에겐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마녀가 사는 그 숲의 본래 이름은 '쏠레'의 숲으로 '태양'이 가장 잘 비치는 숲이었으나,
마녀가 강력한 흑마법을 숲 전체에 걸어놓은 후부터, 그곳은 언제나 어둠이 가득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숲을 '밤의 숲', 즉 '라노떼의 숲'이라고 명명하였다.
마녀를 잡기 위해 그 숲에 들어간 사람들은 두 가지 결과를 나타냈다.
공포에 질려 돌아오거나, 영영 돌아오지 못하거나.
스플렌도르 왕궁 군사들은 이미 마녀에게 패한 이력이 있기 때문에, 몇 년간 재정비를 하면서 다시 한번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백성들은 마녀가 언제 침략해올지 몰라 위험을 느끼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마녀를 찾아 나섰는데, 그 이유는 앞서 말한 역전을 위한 한 방 때문이었다.
그 역전은 바로 마녀에게 걸린 현상금이었고, 액수는 일반 백성을 기준으로 한 가족이 평생을 살아가기에 풍족한 금액이었다.
그래서 가난한 백성들은 두려움을 무릅쓰고 마녀를 찾아 나섰다.
물론, 결과는 모두 패배했지만 말이다.
어느 날, 열여 명의 백성들이 여느 때와 같이 마녀를 죽이려고 라노떼의 숲으로 갔다.
숲에 둘러싸인 흑마법으로 인해, 그 숲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이미 두려움에 휩싸였지만, 그들은 집에 있는 부인과 자식들을 생각하며, 마녀가 있는 성 앞까지 도착했다.
그들은 그곳에 들어갈 방법을 몰라서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그들 앞에 사나운 맹수들이 등장했고, 곧바로 그 뒤에서 새하얀 백발에 몇 백 년을 산 건지 알 수 없는 늙은 마녀가 등장했다.
무리 중 마녀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소리쳤다.
"마... 마녀다!!!"
강렬한 눈빛과 강철같이 강한 이빨을 가진 맹수들과, 그런 맹수들을 뒤에서 조종하며 포악한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는 마녀,
그 모습을 실제로 본다면, 누구나 그 자리에서 벌벌 떨며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인원수로는 한참이나 우세했던 백성들은 심각한 공포감에 벌벌 떨어대면서 소리를 지르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으악!!!!!"
그런 백성들의 모습을 어이없이 지켜보던 마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매번 이러는 것도 지겹다. 스플렌도르 사람들은 언제쯤 포기하려나"
그러자 나무 뒤에 숨어 있던 한 소녀가 해맑게 대답했다.
"그냥 포기하시는 게 빠를 것 같아요!"
그 소녀는 마녀의 시녀 '카리나'로, 노란색 머리에 연두색 눈을 가지고 있으며, 귀여운 외모에 청순한 매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소녀였다.
마녀는 그 시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니 수긍했다.
그 시녀는 늘 상 있는 일인 듯 맹수들에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먹이를 주었다.
그리고 그 맹수들을 흐뭇하게 보며 말했다.
"이렇게 귀여운데, 왜 다들 무서워 한담?"
마녀는 시녀의 말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카리나, 너도 취향 참 독특하구나?"
그 물음에 이어지는 시녀의 대답에 마녀는 고개를 저었다.
"와!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녀님!"
+++
(마녀 시점)
나는 성에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카리나가 달려와 말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마녀님!"
"왜 그러지, 카리나?"
나의 물음 끝에 카리나는 바보처럼 헤헤 웃으며 말했다.
"저희 바보인가 봐요! 아까 밖에 나간 이유가 로세또 정원에 있는 장미에 물을 주러 간 거잖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황급히 일어났다.
"그랬지 참, 넌 그냥 여기 있어. 내가 가서 물만 주고 금방 올게."
'로세또 정원'은 '장미 정원'이라는 뜻으로, 성 앞에 있는 작은 정원이다.
그곳의 장미꽃들은 너무나 아름답고, 몇 해가 지나도 물만 잘 주면 절대 죽지 않아서 키우는 데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그 꽃들을 키우는 것이 내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이다.
나는 아름답게 피어난 장미꽃들을 볼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로세또 정원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장미를 구경하고 있는 낯선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고, 큰 키에 수려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그는 뭐랄까...
아, 신비로운 분위를 풍긴다고 말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모른다는 듯, 순수하게 장미를 보고 있다가 나의 기척을 느끼고 내게 말을 걸었다.
" 아, 안녕하세요! 이곳 장미꽃이 무척이나 아름답네요. 혹시 직접 키우시는 장미인가요?"
친절하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그에게 나는 최대한 정색한 채,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무슨 일로 오신 거죠? 이곳은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는 곳입니다.
만약, 호기심 때문에 오신 거라면 다시 돌아가 주시고, 나를 헤치기 위해 이곳에 오신 거라면, 당신은 그에 맞는 대가를 지불하셔야 할 겁니다."
나는 그를 보며 날을 세우고 경계하면서도, 은연중에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를 그리워하고 있었기에, 경계와 그리움이라는 양가감정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저는 그저 이곳에서 길을 잃은 것뿐입니다.
그래서 돌아갈 길도 모르고, 몹시 배가 고픕니다.
제게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당신을 헤치려는 목적은 없지만, 마침 당신께 딱 어울릴만한 대가가 있답니다."
그는 살포시 내 손을 잡았고, 나는 그 감촉에 놀라서 움찔거리며, 화를 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그러자 이방인은 웃으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당신께 드리는 제 선물은 바로 '사람의 온기'입니다.
당신이 누구신지, 얼마나 이 어두운 곳에서 혼자 계셨는지는 잘 모르지만, 당신의 눈이 제게 말해줬습니다.
당신은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요."
나는 그의 말에 잠시 동조 될 뻔하였으나, 황급히 손을 빼고 그에게 말했다.
"이런 같잖은 말재주로는 제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냉정하게 뒤돌아서 가려고 하는데, 그가 '털썩'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말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 숲이 너무 무섭습니다.
이 숲에 들어온 후, 이상할 만큼 너무 두려워서 허겁지겁 길을 걷다가 이곳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이곳의 장미를 보면 무슨 이유인지,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더라고요.
이런 훌륭한 장미를 오랫동안 키운 사람이라면 분명 그 마음속에 선함이 가득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제발 저의 초라함을 보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
그 말에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왜 하필 이곳에서 길을 잃은 건가요? 다른 곳도 아니고 이 숲에 온 이유가 뭐냔 말입니다."
그러자 그는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전 세계를 여행하는 여행자입니다.
이 숲에 오기 바로 직전에 있던 마을 사람들은 인심이 너무 야박하고 이방인을 싫어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얼른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서 무작정 서쪽으로 걸었는데, 이 숲이 나왔습니다.
뭔가 으스스해서 들어가길 망설이다, 저는 여행자 신분이니 딱히 갈 길도 없고, 다시 그 길로 돌아가기 싫어서 이 숲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다 사나운 맹수들을 마주치는 바람에, 잡아먹힐까 두려워서 무작정 뛰다보니 결국 이곳까지 오게 됐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나는 잠시 동안 깊게 고민하다가 그의 안쓰럽고 절박한 처지가 나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거짓말이라곤 평생 해본 적 없을 것 같은 그의 진실되고도 간절해 보이는 눈빛을 보고 결국 그를 성으로 들여보냈다.
그것이 훗날에 내게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