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세희가 매니저로 있는 바 "붐"에서 윤지은 주임은 한 대리와 회사일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세희를 한 대리에게 소개해 줄까 하다가, 들어올 때 약간 뻐기고 들어온 자신의 얘기가 들통날까 봐, 그냥 가기로 마음먹는다.
"어머, 벌써 8시가 다 되어 가네요! 그만 가죠, 한 대리님."
"아, 그러죠! 윤 주임은 신랑 밥 지어 드려야죠? 제가 집 앞까지 태워다 드릴게요. 어서 갑시다. 계산은 내가 할게요. 하하."
윤 주임한테서 Y 아파트 제조 원가를 알아낸 한 대리는 일단 기분이 개운해져서, 웃으며 윤 주임을 바래다주기로 한다.
윤 주임이 사는 24평 연립 반 지하 집은, A 시 외곽의 신설된 주택 단지에 있는데 여기서 승용차로 20분 정도의 거리다.
버스에서 내리면 집으로 들어가는 삼거리 코너에 시댁 부모님이 운영하는, 문방구 도소매를 겸하는 가게가 있고, 그 안채에 시부모님이 살고 있다.
매일 퇴근할 때마다 가게에 들러서 시어머니에게 눈도장을 찍고, 거시서 5분도 안 걸리는 자기 집으로 들어간다.
오늘 회식이 있을 거라고 어제 얘기는 했지만, 이번 주에는 벌써 세 번이나 되고, 월요일에는 신랑 대준 씨 일로 오밤중에 들어가는 바람에, 화요일부터 굳은 시어머니 표정이 어제저녁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다.
"너는 시아버지가 그 비싼 돈 주고 지어온 한약 약발도 안 받게, 그렇게 하루 걸러서 술을 마시면 어떡하냐? 무슨 놈의 회사가 맨날 술타령만 한다냐?"
그저께 박 이사 건으로 네 명이 치킨호프 파티를 하고 늦게 들렀을 때, 임신이 안 되어 어디 용하다는 한의원에서 시아버지가 거금 120만 원을 들여 지어다 준 한약 얘기를 꺼내면서, 심하게 꾸중하였다.
‘통닭이라도 좀 사다 드리는 게 좋겠다. 대준 씨도 혼자서 챙겨 먹게 해서 미안하고.’
마침 길거리에 시댁 식구들이 좋아하는, 기름기 적은 전기구이 통닭이 두 마리에 1만 원인 것을 보고, 얇은 지갑을 열어 메추리만 한 네 마리를 샀다.
"한 대리님, 이거는 가져가서 출출할 때 드세요."
한 마리를 따로 포장해서 건네주자, 한 대리가 미안해하면서도, “감사히 먹겠습니다” 하고 반갑게 받는다.
총각인 한 대리는 전철역 근처 원룸에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고, 홀어머니는 시외버스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형님네 집에 살고 있다.
‘박 이사가 오늘 중으로 원가를 알아내라고 했으니까, 애 좀 태우다가 전화 오든지 하면 그때 알려줄까? 고약한 양반!’
하고 생각하다가, 한 대리는 이왕 알려줄 거 괜히 쓸데없는 잔소리 듣기 싫어서, 문자로 “원가 4억 5천만 원”이라고 짤막하게 찍어 보낸다.
일찍 끝날 거로 생각하고, 비싼 공용주차장 대신에 모텔 근처의 골목길 여유 공간에 주차했던 아반떼 승용차에 시동을 걸었다.
"차 안에 닭똥 냄새깨나 배이겠는데요?"
"그러게요. 왜 이리 심하게 난대요? 호호~"
한바탕 깔깔거리고 웃고 나서 익숙하지 않은 길을 윤 주임에게 물어보고 서서히 출발한다.
어둠이 내려 업소의 간판 조명등이 환하게 비치고, 네온사인 등불이 점멸하는 공단에 인접한 식당 유흥가 도로변에는, 토요일 여름밤의 열기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일주일 내내 어딘가에서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무언가 필요한 것들을 사고, 오래간만에 입과 배를 호사시키면서 뜻이 맞는 사람들과 오붓한 즐거움을 누리려는 사람들일 것이다.
또한 밤낮이 뒤바뀐 시간의 일터에서 돈을 벌어, 자신들의 버거운 생활을 유지해 나가려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지, 진정한 삶의 깊이를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그저 매일같이 발생하는 새로운 문제들을 처리하는 것이 해야 할 당연한 책무인 것처럼, 반복되는 일상에 자신의 소중한 시간과 육신을 소모한 대가로 받아 쥐는 몇 푼의 금전에 매료되어, 누려야 할 권리마저 포기해버린 대다수의 무리가 이루는 무의미한 군중의 흐름인지도 모른다.
빙산의 일각처럼, 빛이 스며들지 않는 수면 아래의 이 9분지 8의 민초들이, 햇볕을 독점하며 호사스러운 생애를 즐기는 9분지 1의 수면 위 상류층을 떠받들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피곤했던 일주일간의 격무를 마치고 귀갓길에 오른 두 사람이 탄 아반떼를, 노래방부터 미행해온 예의 두 깍두기가 쥐색 투싼 승용차에 탑승하여, 눈에 띄지 않게 어둠 속에 은폐되어 조용히 뒤따른다.
운전석의 작은 깍두기는 아직 이른 밤이라서 지나다니는 차량이 많은 것이 다행인 듯, 아반떼 꽁무니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익숙한 솜씨로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미행한다.
뒷좌석의 큰 깍두기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몇 마디 하고는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남방셔츠 주머니에 꽂고 있던 만년필을 꺼내서 뚜껑을 벗기자, 만년필 몸통 끝부분에 USB 커넥터가 달려있다.
핸드폰에 접속하고 고성능 몰래카메라에 찍힌 영상들을 지정된 갤러리 번호에 저장시킨다.
작업이 끝나자 다시 전화를 걸어서 저장된 자료를 어딘가로 전송한다.
A 시 변두리의 주택단지 입구에 이르러 아반떼가 윤 주임 시어머니 문방구점 근처에 정차하자, 뒤따라온 투싼도 멀찍이 길가에 슬며시 정차해서 전조등을 끄고 동태를 살핀다.
윤 주임이 내리고 아반떼가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는 시동을 끄고 내려서, 아직 영업 중인 가게로 들어가는 윤 주임의 뒤를 몰래 미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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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주통신 정현종 부장을 만나서 얼떨결에 태성의 제조 원가를 알아내어 내일 중으로 알려주겠다고 약속해버린 박신배 이사는, 정 부장이 바지 주머니에 든 돈 봉투를 안 주고 그냥 가버리자 서운해서 입맛을 쩝쩝 다셨다.
‘엊그제 정 사장이 5만 원권 10장 줄 때보다 네 배는 더 두터워 보였는데…’
정 부장과 헤어진 박 이사는 적어도 2백만 원쯤은 되어 보이는 큰돈을 놓친 이유가, 자기에게 제조 원가도 알려주지 않은 태성의 못된 이재성 사장과 윤 주임 때문이라고 생각되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 잡것들, 어디 짝짜꿍해서 잘들 놀아봐라. 언제고 통쾌한 복수를 해줄 날이 곧 있을 것이다.’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씩씩대면서, 꼴에 머리를 굴려 한 대리가 회식 중이라 옆에 있는 다른 직원이 들을까 봐, 전화를 거는 대신에 연락하라는 문자를 찍어서 전송했다.
그리고 한 대리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엄포를 놓아서, 윤 주임으로부터 어떻게든 Y 아파트 무선 중계설비 제조 원가를 알아내어 오늘 중으로 알려 달라고 압박했다.
예상보다 정 부장이 일찍 가버리는 바람에, 무진전기 김태경 전무와 용산역 주변에 새로 생긴 물 좋다는 유흥가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8시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버렸다.
정 부장과 만났던 우주통신 본사 근처 도가니탕 집에서 수백 미터 거리에 새롭게 형성된, 고급 식당과 박 이사 기호에 딱 어울릴 듯한 룸살롱들이 즐비한 식당 유흥가 골목을 이곳저곳 기웃거려 사전 답사하며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녔다.
박 이사와 도가니탕 집에서 면담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정 부장은, 지인들과 주말 모임에 참석한 정선규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상세한 보고를 했다.
정선규 사장은 (주)태성을 무너뜨리는 대략적인 계획만 아들인 정 부장에게 일러주고, 구체적인 세세한 집행은 직접 나서거나 신임하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 아들에게 더러운 피를 묻히지 않으려는 부성애를 발휘하고 있었다.
정 부장은 태성을 제거하고 무선통신 중계기 시장을 독식하려는 부친의 계획이 좀 과하다 싶은 생각은 들었지만, 규모 있고 튼실한 기업체로 만들어서 결국 자신에게 물려주려는 부친의 갸륵한 뜻을 거스를 수 없어 마지못한 수긍을 하고 있다.
태성의 핵심 직원 한두 명을 흔들어 이직시키고, 태성의 주거래 은행인 중기 은행 박대봉 부장을 활용하여, 금전 측면에서 결정적인 대미지(손상)를 입히려 한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정 부장은 마마보이로 자라면서 모계 유전 인자를 많이 물려받았는지, 음악을 좋아하고 예술적 감각이 있는, 심성이 그렇게 모질지 못한 사람이다.
부친에게 보고를 마치고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여 아무도 없는 텅 빈 사무실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태성에 들렀을 때 본 밝았던 직원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속 한 구석이 아려오는 짠한 느낌을 받았다.
토요일 오후이긴 해도, 집에 가봐야 이제 두 살배기인 아들만 있어, 더운 여름철 나들이도 할 수 없고, 왠지 혼자서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을 나온 정 부장은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서, 직원들과 마주치기라도 할까 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유흥 식당가 쪽으로 방향을 잡아 걸어갔다.
7시가 한참 지났는데도, 아직 박모의 어스름이 찾아들지 않은 거리는, 주말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아무 생각 없이 인파의 물결을 따라가던 정 부장 시야에, 저만치 낯익은 두 사람이 악수하며 어울리는 모습이 들어온다.
놀랍게도, 아까 헤어진 박 이사와 무진전기 김태경 전무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밀착 관계의 우군이었는데, 지금은 적장이 되어서 태성과 손을 잡고 우주통신에 도전장을 던진 김 전무와, 조금 전에 자기와 밀담한 박 이사의 반갑게 웃으며 상봉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불현듯 박 부장 몸속 깊은 곳에 잠재해 있던 상스러운 피가 솟구쳐 오른다.
‘아버지가 그러지 않으시면, 노회한 저들이 나를 무너뜨리겠지!’
부친의 뜻에 적극적으로 따라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며 질끈 깨문 정 부장 입술에 선홍색 피가 배어 나온다.
평소에 순한 사람이 독이 오르면 훨씬 더 무서운 법이다.
제 분수를 모르고 한여름 태양보다 더 이글거리는 허망한 욕망에 사로잡혀서, 갈 곳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어리석은 중생들로 메워져, 피곤한 영혼을 달래줄 안식이 내려앉아야 할 거리는, 낮보다 더 밝은 불야성을 이루어 습한 열기를 내뿜으며, 아까운 시간이 흘러가는 줄도 모른 채 밤새도록 왁작거리며 붐빌 것이다.
** **
그렇게 어리석은 인간들은 소리 없이 돌아가는 지구의 등에 업힌 채 어둠 속을 한 바퀴 돌아서, 언제나처럼 항상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태양과 얼굴을 마주치며, 또다시 해가 떠올랐다고 기지개를 켠다.
아침 일찍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산책을 하러 마당으로 내려선 동네 토박이, 자칭 지방 유지인 윤 주임 시아버지는 대문 안쪽에 떨어져 있는 서류 봉투를 발견한다.
"어? 저것이 뭣이여? 누가 서류봉투를 우리 집 마당에다 던져놨어? 선거 철도 아닌데 무슨 광고물을 남에 마당에 까지 뿌리고 그러나 그래?"
봉투를 들고 앞뒤를 살펴봐도 발신자나 수신자는 적혀있지 않고, 내용물은 무슨 빳빳한 종이 광고지인 듯한 느낌이 든다.
"어떤 몰상식한 놈들이 이 딴 짓을 한대? 뭐를 팔아먹으려면 제대로 광고를 하면 되지, 집집마다 쓰레기를 버리고 다니나 그래!"
이른 시간이라 혹시 봉투를 돌리는 사람이 눈에 뜨이려나 싶어, 대문을 열고 나가서 휑한 도로변을 좌우로 둘러봐도, 일찍 등교하는 학생 몇 명만 보이고 의심스러운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저만치 있는 옆집의 대문 앞에 종이 조각이 여러 장 흩어져 있고, 그쪽에서 걸어오는 학생이 손에 주워 든 종이를 들여다보면서 키득거리고 웃는다.
누가 출근하다가 집안에 떨어진 봉투를 열어보고 짜증 나서 찢어 길바닥에 던져 버렸나 싶어서,
"에이 누군지 몰라도 똑같은 사람이네! 누구더러 청소하라고 그런 짓을 했나, 그래? 쯧쯧."
하고 구시렁거리며, 도대체 무슨 광고길래 학생이 보면서 웃나 싶어 방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