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나요. 계획을 앞당겨야 되겠소. 오늘부터 진행해 주시오."
우주통신 정선규 사장이 단호한 표정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서 무게감 있게 뱉은 이 한마디가, 4년 반 후에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할 빅뉴스의 시발점이 될 줄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토요일 오전 근무 끝나고 전체 직원 회식을 약정한 태성의 몇 안 되는 가족 같은 분위기의 직원들은 마냥 즐거워서 기분들이 들떠 있었다.
특히 입사한 지 2개월이 조금 넘은 22살 조은정 기사는 오랜만에 젊은 총각 사원들과 정담을 나눌 기회가 생겨서 날아갈 듯한 기분이다.
청주에 출장 가 있는 기술팀에는 자기보다 서너 살 많고 외모도 괜찮으면서 성격도 좋아 보여 맘에 드는 기사들도 두 명이나 있다.
`그날은 어떤 옷을 입고 나오지? 회식하면서 무슨 말을 꺼내면 관심 있어할까? 2차 노래방 가서 부를 노래 곡명은 뭐로 고르면 히트 치려나? `
사뭇 상기된 얼굴로 혼자서 웃고 난리가 났다.
"한 대리님, 회식 때 삼겹살 말고 다른 거 시켜도 되나요?"
식후 입가심으로 영업부 한충석 대리와 응접 테이블에 마주 앉아 냉커피를 홀짝거리던 조 기사가 생글거리며 물어본다.
"어, 그럼! 조 기사는 뭐가 먹고 싶어요?"
적당한 체격에 준수한 외모의 서른 살 총각인 한 대리가 조 기사의 들뜬 마음을 훔쳐보고 미소 띤 푸근한 얼굴로 바라보며 되묻는다.
"저는 돼지갈비가 더 맛있던데요! 소주는 많이 안 권하면 좋겠어요. 저번에 취해서 혼났는데.. 히~"
술도 안 마시고 벌써 얼굴이 볼그레한 조 기사가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쳐서 못 느꼈는데, 오늘따라 제법 예뻐 보여서 한 대리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란다.
"조 기사는 애인 없어요? 토요일인데 데이트 안 해도 돼요?"
"어머~ 저 애인 없어요, 한 대리님! 히이~"
순진한 조 기사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서 눈 둘 곳을 찾아 어쩔 줄을 모른다.
`저렇게 순진한 조 기사를 저번 회식 노래방에서 블루스 추자고 억지로 껴안으려 하다니! 하여튼 박 이사 이 양반은 할 짓 안 할 짓 구분도 못 한다니까! 그나저나 이틀씩이나 연락도 안 주고 대체 어디서 뭐 하는 거야? `
"윤 주임, 여 반장은 어떻더노?"
아까 윤 주임에게 점심 먹으러 가자고 사장실에 들른 생산부 여 반장한테 윤 주임과 포옹하고 있던 장면을 들켜서, 도시락 까먹으면서 내내 안절부절못했던 태성 이재성 사장은 식사 후 옥상에서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온 윤 주임을 보고는 계면쩍게 묻는다.
담배를 하루에 반 갑 정도 피우는 이 사장은 윤 주임이 흡연하는 줄 알지만, 자기가 실내에서 피워도 덜 미안하니까,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한다.
"괜찮아요, 사장님!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녹차 다시 타 드릴까요?"
윤 주임이 조금 무안한 지 딴 데를 쳐다보고 생긋 웃으며 이 사장 곁으로 머그잔을 가지러 다가온다.
영리한 윤 주임이 하도 똑 부러지게 일을 해주니까 가끔은 기특해서, 딸 같은 마음에 한 번 안아주고 등이라도 두드려주고 싶은 충동도 느끼지만, 엄격히 자제해온 이 사장이다.
윤 주임이 왈칵 껴안는 바람에 얼떨결에 여직원 가슴에 얼굴이 파묻혔던 이 사장은 지금도 그때의 야릇한 감촉이 되살아나서, 가까이 다가서는 윤 주임을 보고, 몸을 의자 뒤로 밀착하여 기댄다.
"제가 잘 얘기했어요, 염려 마세요! 아까 많이 놀라셨죠? 죄송해요, 사장님. 너무 기뻐서 저도 모르게 그만.. 히~"
"음, 흠. 괜찮아! 나도 기분 좋을 때는 너, 안아주고 싶기도 한데 뭐…"
"정말요? 그럼 저 안아주세요, 사장님! 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와 생이별을 했던 윤 주임은 부성애에 목마르게 자라서 그런지 이재성 사장에게 아버지 같은 느낌을 받아서 별로 거리감을 느끼지 않는다.
"예끼 놈! 이쁜 짓을 해야 안아주지! 오늘은 매를 맞아야 되겠다! 허허~"
"그럼 뿔 자 들고 올게요. 때려주실 거죠? 힝~"
이 사장과 윤 주임이 불편할 뻔했던 순간을 이무럽게 웃어넘기고 있는데, 앞문이 벌컥 열리며 박신배 이사가 얼굴을 들이민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엉덩이 뿔난 미꾸라지, 참 타이밍도 절묘하게 맞춰서 등장한다.
"어, 그래! 더운데 수고가 많네, 박 이사."
"안녕하세요?"
윤 주임도 예의상 박 이사에게 시큰둥한 인사를 한다.
이틀 만에 출근하는 박 이사는 두 사람이 다정히 붙어서 즐겁게 얘기하는 꼴을 보고는 들어오려다가 고개만 꾸벅 숙이고 문을 닫고 돌아선다.
`하여튼 사장이라는 게 저 모양이니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겠어? 내가 없어 봐라, 이놈의 쥐구멍만 한 태성, 하루아침에 문 닫을 거다!’
김태경 전무 전화를 받고부터 동남무선에서 부산 Y 아파트 견적 의뢰한 내용을 자기에게 얘기도 안 해줬다고 잔뜩 삐쳐있던 박 이사는 점점 회사에 대한 정나미가 떨어진다.
사장실 문을 닫고 옆방 영업부로 들어서니, 한 대리와 조 기사가 일은 안 하고 응접 테이블에 다정히 마주 보고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노닥거리고 있다.
"안녕하세요? 박 이사님!" "안녕하세요?"
조 기사와 한 대리가 이틀 만에 보니까 반가워서 웃으며 인사를 한다.
"어, 그래... 한 대리! 너는 어찌 된 게 보고가 없냐?"
박 이사가 흘깃 두 사람을 쳐다보고는 자기 자리로 가면서 큰소리로 한 대리를 꾸짖는다.
`이것 좀 봐라! 내가 이틀만 자리 비우면 회사 꼴이 개판이 된다니까!`
한참 토요일 회식 건으로 기분이 들떠 즐겁던 두 사람은 얼른 테이블에서 일어나 자기들 자리로 서둘러 가서 앉는다.
아무 연락도 없다가 이틀 만에 불쑥 나타난 박 이사에게 다짜고짜 영문도 모르는 야단을 맞은 한 대리는 끓어오르는 분을 억지로 삭이며 조심스레 묻는다.
"보고라면.. 무슨 일 말씀인가요?"
"부산 Y 아파트 견적 의뢰 왔다면서! 그 큰 건을 나한테 보고를 안 해주면, 내가 어떻게 밖에서 영업하고 다니겠냐, 엉? 안 그래?"
한 대리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찾지 못한다.
자기도 아침에 조 기사한테 회식 얘기하다가, Y 아파트 설계한다는 말을 듣고 윤 주임에게 확인했더니, 박 이사 출근하면 사장님께 보고할 때 함께 들으라고 해서 그런 줄 알고 있는데, 얘기해줘야 될 사람이 되레 야단을 치니, 황당한 생각만 들 뿐이다.
"저.. 박 이사님, Y 아파트 건은 저도 잘 모릅니다. 윤 주임한테 물어봤는데, 박 이사님 들어오시면 들으라고 하던데요."
"뭐? 너한테도 얘기 안 해줬단 말이야? 뭐야 이것들! 영업팀은 제쳐놓고 자기들끼리 뭐 하자는 거야? 아~ 서그벌! 둘이서 다 해 처먹으라, 그래!"
그저께 점심때부터 만 이틀 동안 회사를 위해서는 단 한 가지도 한 일이 없으면서, 오히려 태성을 무너뜨리려고 작정한 적장, 우주통신의 정선규 사장을 만나서 태성의 패망 후에도 든든한 직위를 보장받았다고 착각하는 뿔난 미꾸라지는, 해서는 안 될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고 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일컫는 것인가?
옷걸이에 양복을 벗어 건 박 이사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으로 훔치며 큰 소리에 놀라서 가만히 숨죽이고 있는 조 기사를 바라본다.
`저것도 윤 주임 시다가 돼가지고, 내 말은 개뿔로 듣고 있지!`
"야, 조 기사! 너는 어른이 이 더운 날 밖에서 들어왔는데, 냉커피 한잔 타 줄 생각도 못 하나? 그것도 윤 주임 저 가시나 허락받아야 되나?"
윤 주임한테 쌓인 앙금이 죄 없는 조 기사한테 불똥이 되어 튕겨간다.
"아, 아닙니다, 박 이사님! 금방 타 드리겠습니다. 음 흠."
박 이사 호통에 깜짝 놀란 조 기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뭐, 박 이사?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이 사장한테는 사장님~ 하면서, 나한테는 왜 꼭 성을 붙이냐? 너는 네 아버지한테 조 아버지~ 하고 부르냐?"
원래 다혈질에 성질이 개차반인 박 이사가 흥분해서 말하다 보니, 제바람에 화가 증폭되어, 엉뚱한 조 기사에게 막말을 하고 만다.
잘못한 일도 없으면서 괜히 박 이사한테 아버지 관련된 말까지 들은 조 기사는 영문도 모른 채 서글퍼져서, 빨개진 얼굴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커피를 타러 냉온수기 앞으로 걸어간다.
옆에서 박 이사가 하는 꼴을 보고 있던 한 대리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한마디 내뱉고 나선다.
"박 이사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조 기사가 뭘 잘못했다고 집안 아버지까지 들먹이십니까? 너무하시네요, 정말!"
"뭐가 어째? 이게 어디서 눈깔을 부라리고 함부로 대드노? 이 사장이 너를 오냐오냐하니까, 네 눈에도 내가 개똥으로 보이나? 아~ 참말로 돌아버리겠네! 웬 거지발싸개 같은 것들이 작당을 해서 나를 완전히 물로 만드나? 그래! 아~이 시브럴,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입에 거품을 물고 자가발전이 되어 부글부글 끓던 박 이사는 벗어둔 양복을 도로 내려 가방 든 팔에 걸치고는 씩씩거리며 입구 쪽으로 걸어가다가 뒤돌아선다.
"한 대리 너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해! 이놈의 회사, 얼마나 갈지 알기나 하나?"
하고는 문을 열고 휑하니 나가버린다.
도대체 이유도 제대로 모르고 박 이사의 같잖은 원맨쇼를 지켜보던 한 대리는 어안이 벙벙하여 우두커니 서서 망연자실한다.
커피를 타던 조 기사도 놀라서 자기가 당하던 기분은 잊은 채, 걱정 어린 얼굴로 한 대리를 바라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회식 얘기를 하며 모처럼 즐거운 담소를 나누던 두 사람은 혹시나 자기들이 무슨 실수라도 안 했는지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안절부절못한다.
옆방까지 들린 큰소리에 윤 주임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영업부로 들어오고, 화장실에 있던 여 반장도 놀란 토끼 눈을 뜨고 뒤따라 들어온다.
"무슨 일이야? 조 기사. 박 이사님 소리 같던데…"
놀라서 하얗게 질려있는 조 기사를 보고 윤 주임도 따라서 놀라며 묻는다.
"잘 모르겠어요, 주임님!~ 어떡해요?"
조 기사는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울먹인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윤 주임이 안쪽에 멍하니 서 있는 한 대리를 보고 소리친다.
"박 이사가 조 기사한테 무슨 짓이라도 한 거예요? 한 대리님?"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요.. 저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네요. 박 이사님이 괜히 혼자서 역정을 내다가 나가버렸어요! 처음에는 나보고 Y 아파트 건 동남에서 견적 의뢰 온 거 자기한테 보고 안 했다고 야단치더니…"
윤 주임이 두 사람을 응접 테이블로 불러서 흥분을 가라앉히게 하고, 차분하게 자초지종 얘기를 하게 한다. 여 반장도 옆에 앉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귀담아듣는다.
"아니, 그런 거라면 오히려 자기가 잘못한 거 아녜요? 이사님이라 안 하고 박 이사님이라 불렀다고 그 야단을 쳐요? 오늘 처음 부른 것도 아니고, 맨날 부를 때는 가만히 있다가, 왜 갑자기 난리래요? 그러고, Y 아파트도 그저께 도면 받아서 숨 쉴 틈도 없이 이제 겨우 원가 분석 나와서, 지금 함께 의논하려는데, 영업 내용은 오늘 와서 자세히 보고하겠다고 어젯밤에 사장님한테 전화해놓고는, 자기는 어디서 뭐 하느라고 이틀씩이나 한 대리님한테 전화 한 통 없다가, 이제 나와서 무슨 보고를 안 했다고 그런대요? 출근 안 할 때 자기한테 전화하지 말라고 야단쳤다면서요?"
두 사람 얘기를 다 듣고 난 윤 주임이 오히려 격앙되어 언성을 높이며 흥분한다.
누가 들어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태다.
아무것도 모르는 생산부 중국 동포 여 반장이 들어봐도, 그 못된 성질머리 고약한 박 이사가 분명히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순진한 심성을 지니고 열성적인 자세로 자기 일에 매진하며 살아가는 열 명도 안 되는 이 ㈜태성 가족들의 안식처를 엉덩이에 뿔 난 미꾸라지 한 마리가 진흙탕으로 만들어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