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그 꿈이다.
다 큰 성인남자라고 하지만 스물 넷이란 나이에 맞게 아직 옛된 티가 남아 있는 얼굴.
"결혼 축하해."
축하한다는 말과 달리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는 너는 내게 다가와 가볍게 입을 맞춘다. 놀란 내가 뒤로 물러나자 너는 이제 슬픔을 아예 감추지도 못한다. 결국 너의 옛된 얼굴에서 눈물이 툭 떨어지고 그렇게 너는 내게서 뒤돌아 멀어진다.
"..."
꿈에서 깨어난 다은은 멍한 눈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그렇게 떠나간 너를 붙잡지도 못하고 혼란스러워 하기만 했던 그 날. 이미 몇년이 지난 일인데도 요즘 들어 자꾸만 그 녀석이 나오는 꿈을 꾼다.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너무나도 생생해서 그때의 혼란한 감정이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계속 느껴진다. 다은은 혼란한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차가운 물 한 잔을 들이키자 멀어졌던 현실감각이 돌아오며 텅 빈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어둡고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이 넓은 집에는 오직 다은 한 명뿐이었다.
6년 전 다은은 현재 하성그룹의 이사이자 장남인 차진혁과 결혼했었다. 다은은 진혁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믿었기에 그와의 결혼에 한치의 망설임이나 두려움 따윈 없었다. 그러나, 다은의 결혼 생활은 상처와 불신으로 얼룩진채 3년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미안해, 나 다른 여자 생겼어."
그가 자신에게 남긴 마지막 한마디를 다은은 아직도 또렷히 기억했다. 진심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말투와 표정. 그와의 마지막이 그렇게 잔인하고 아픈 줄 알았다면 절대 그를 사랑하지 않았을텐데. 늘 그 꿈을 꾼 후 현실로 돌아오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드문드문 찾아왔다.
"그만 생각하자."
다은은 더 이상 기억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가볍게 자신의 뺨을 두드렸다. 그때, 세희에게서 메세지 하나가 도착했다.
[다은아, 오늘 출판사 미팅 3시로 잡아뒀어. 시간 여유 많으니까 아침 꼭 챙겨 먹어. 너 요즘 너무 말라서 나랑 비교 돼. ㅡㅡ]
다은은 피식 웃으며 답장했다.
[저녁 때까지 배부를 정도로 오늘 아침 거하게 먹을거니까 걱정마.]
"오늘 아침은 배 터지게 먹어야지."
찌뿌둥한 몸에 기지개를 키고 거실 창문으로 향했다. 글을 쓰느라 자주 밤낮이 바뀌는 탓에 달았던 암막커튼을 걷자 맑은 날씨와 어울리는 따스한 봄 햇살이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다은이 몇 년만에 다시 작가 영란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마치 24살로 돌아가 작가 영란으로 데뷔를 앞둔 것처럼 가슴이 두근댔다.
'그때 걔한테 첫 출간 된 책까지 줬었는데.'
.
.
.
"첫 책은 꼭 나 줘."
"주면 뭐 해줄건데?"
"와, 진짜 유치해 서다은."
"서다은? 너 점점 누나라고 부르는 횟수가 줄어든다?"
.
.
.
'6년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는 녀석 생각해봤자 뭐해.'
꿈 속에서 나타나는 걸로 모자라 현실에서도 문득문득 생각나는 그 녀석을 애써 떨쳐내며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주방으로 걸어갔다. 거실창문 밖에선 파란 하늘과 그 아래 길었던 겨울을 밀어내고 찾아온 봄을 맞이하듯 벚꽃들이 조금씩 피어나고 있었다.
출판사로 가기 위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다은 앞에 의문의 빨간색 고급 스포츠카 한 대가 멈췄다.
"서다은! 얼른 타!"
짙게 선팅 된 창문이 내려가자 그 안에는 긴 흑발생머리에 빨간색의 차와 어울리는 빨간색 가죽코트를 입은 세희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누군간 이런 걸 누가 입냐며 기겁할 수도 있는 의상이었지만 얼굴이 제일 화려한 세희에겐 그저 가벼운 일상복이었다.
"혼자 가도 된다니까. 미팅 처음 하는 것도 아닌데 뭐하러 데려다 줘."
"야, 명색이 스타작가인데 혼자 버스타고 가는 건 너무 멋이 안 나지. 게다가 그 일 있고 나서 오랜만에 가는 거잖아? 무조건 뽐나게 가야 돼. 그래야 넌 몰라도 내가 이사로서의 간지가 살아."
"네네. 알겠습니다, 이사님."
다은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조수석 안전벨트를 맸다. 그래도 이사님 덕분에 든든하네. 세희는 다은과 대학 새내기 시절부터 친자매처럼 지냈던 친구이자 SH엔터테이너먼트 소속사 이사였다. 그녀는 연예인 외에도 자신이 마음 가는 운동선수들 혹은 작가들을 영입 했는데 세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인생을 쉽게 산다는 말을 자주했다. 하지만, 다은이 아는 그녀는 사실 그 누구보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있고 속도 깊은 사람이었다. 실제로 세희는 한때 다은을 둘러쌌던 많은 루머들에도 불구하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든 상황의 그녀를 자신의 회사로 영입했다. 그 덕분에 다은은 다시 용기를 내 펜을 잡을 수 있었다.
"늘봄출판사 대표도 바뀌었잖아. 이름이 뭐였더라."
"대표가 바뀌었어? 언제?"
"재작년쯤에 바뀌었을걸? 갑자기 왜 바뀐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대표 그 새끼 더럽게 재수 없었는데 잘 됐어 아주."
엔터 사업은 물 사업이라며 툭하면 자신을 깔보는 한 대표를 병적으로 싫어했던 세희는 정말 기뻐보였다. 다은은 이혼 후 올해 초까지 거의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이슈에 대해 아직 모르는게 많았다.
"근데 너 필명 바꿀 생각 정말 없어? 영란이 뭐냐 영란이. 필명 때문에 아직도 너 60대로 아는 사람 엄청 많아. 넌 그 이쁜 얼굴 가지고 할머니로 오해 받으면 좋냐?"
"어차피 그 일 때문에 알 사람은 다 아는데 뭐. 난 누가 바꾸라고 협박해도 절대 바꿀 생각 없다."
"에휴, 하여튼 여러가지로 얼굴 값 못하는 기지배. 내가 너였으면 책은 미끼고 청순가련한 얼굴로 방송 타서 돈 더 쓸어담고 남자 여럿 달고 다녔다."
세희는 아직도 책 밖에 모르는 듯한 다은이 답답했다. 아직도 희고 부드러운 피부, 예쁘게 쌍커풀이 자리잡은 부드러운 눈매와 오똑한 콧날. 그녀가 보기엔 대학교 오티에서 봤던 다은과 서른 중반의 다은이 다른 거라곤 귀 밑까지 짧게 자른 머리 밖에 없었다. 세희는 여전히 싱그럽게 빛나는 다은이 이혼 후에는 조금은 더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즐겼으면 했다.
"이미 그러고 있으면서 뭘."
"당연하지. 돈 많고 예쁘게 태어난 운 좋은 인생 제대로 즐기다 가야지."
세희가 선글라스를 엣지있게 올리며 씨익 웃어보였다. 두 사람이여러가지 의미로 꽤 농도 깊은 농담을 주고 받는 사이 어느 새 늘봄출판사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헛소리하면 그냥 박차고 나와 알겠지! 안되면 언니가 투자 해줄테니까!"
"절대 기 죽지 마! 넌 자랑스러운 현성회사의 외동딸이야! 알지!"
세희는 건물 안 사람들에게까지 들리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차 안에서 우렁차게 파이팅을 넣어줬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집중되자 다은은 들고 있는 종이들로 얼굴을 가렸다. 알읐니끄 을른 가라고. 다은은 이를 꽉 물며 그녀를 보내기 위해 얼른 가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녀는 건물 내에서도 여전히 자신에게 몰린 시선을 피해 때마침 도착한 엘레베이터로 빠르게 걸어가 탑승했다.
"하여튼 김세희... 제일 극성이야 진짜."
엘레베이터 문이 닫히고 더 이상 자신에게 쏟아지지 않는 시선에 다은은 숨을 돌리며 얼굴을 가렸던 종이를 내렸다.
"몇 층 가세요?"
급하게 탑승하느라 있는 줄도 몰랐던 누군가가 중저음의 목소리로 친절하게 물어오자 다은은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다은의 심장은 쿵하며 내려 앉았다.
"..."
짙은 검은 머리 아래 부드러운 눈매지만 웃지 않으면 차가워 보이는 눈, 오뚝한 콧날과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입술. 마치 소설 속 왕자를 그려놓은 듯한 얼굴.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꿈 속의 얼굴보다 선이 굵어져 더 남자다워졌다는 점.
"오랜만이야, 누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6년 전 저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홀연히 사라진 그리고 여전히 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차민혁이었다. 너무 놀란 다은은 순간적으로 손에 힘이 풀려버렸다. 그녀가 들고 있던 종이들이 바닥으로 후두둑하고 떨어졌다. 굳어버린 다은 대신 민혁은 종이를 하나씩 주워 정리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거 아니야? 다 흘려버리면 어떡해."
장난스럽게 웃자 그의 양쪽 볼에 예쁘게 자리잡힌 보조개들이 깊게 패였다. 민혁은 정리한 종이들을 다은에게 건넸다.
"10층 가는 거지? 오랜만에 미팅하는거네."
"너가 왜 여깄어?"
"그야 내가 늘봄출판사 대표니까."
결혼식 후 한번도 볼 수 없었던 민혁의 소식을 우연히 들었을 때 그는 하성그룹의 막내아들이자 본부장으로서 기업계승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출판사 대표라니? 다은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나 아버지한테 쫒겨났어. 이제 완전 내놓은 자식이야."
"뭐? 대체 왜?"
한때 다은의 시댁이었던 하성그룹은 전자사업으로 시작해 건설, 금융, 바이오 분야까지 사업을 넓혀가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는 곳이었다. 기업의 회장인 차인구는 윤리 경영을 추구한다는 기업 이미지와 맞게 겉으로는 온화해보였지만 사실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할 수 있는, 선과 악에 구분을 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어린 자식들을 일찍부터 계승경쟁에 내몰 만큼 잔인했다. 그런 그의 눈 밖에 났다는 건 절대 좋은 쪽으로 해석할 수 없었다.
오직 걱정뿐인 다은과 달리 민혁은 든든한 뒷배라도 있는 건지 그저 놀란 강아지처럼 눈이 커진 다은을 조금 놀려주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민혁은 갑자기 사뭇 진지한 얼굴로 다은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왜냐면 내가..."
여유로운 걸음으로 민혁이 저에게 점점 다가오자 뒷걸음치던 다은은 결국 엘레베이터의 벽과 민혁 사이에 갇혀버렸다. 몸을 낮춰 자신의 얼굴로 다가오는 민혁에 어젯밤 꾸었던 꿈이 생각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누나를 사랑한다고 했거든."
민혁이 다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귓가에 닿는 그의 숨결에 온 몸의 감각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띵-, 10층입니다.
엘레베이터 도착음과 함께 문이 열리자 민혁은 낮췄던 몸을 살짝 뒤로 뺐다. 다은은 급하게 엘레베이터에서 내렸다.
"번호 안 바꿨으니까 미팅 다 끝나면 연락해. 같이 저녁 먹자."
"좀 이따 봐, 다은아."
좁아지는 문 사이로 민혁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쩐지 저 여유로운 미소가 너무나도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다은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풀썩 주저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