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레나 후작부인.”
에밀리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눈웃음을 쳐 대며 같잖은 기싸움을 시도하던 조금 전의 에밀리와는 달랐다.
갑자기 180도 바뀐 그녀의 분위기에 살짝 당황한 세르레나 후작부인이 대답 대신 눈썹을 치켜세웠다.
에밀리는 한껏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리 깔며 말했다.
“사실.. 제 동생 에뮬이 불치의 기침병에 걸렸답니다. 얼마 전 집에 왕진을 다녀간 의사가 이미 가망이 없다고 언제 급사 해도 이상하지 않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시더군요..”
세르레나 후작부인이 놀란 눈으로 에뮬을 바라보았다. 동생인 에뮬은 활짝 만개한 장미 꽃송이 같은 에밀리와 달리 파리한 인상을 지녔긴 했다.
생각해보니 처음 응접실에 들어온 뒤로 에밀리만 주구장창 목소리를 내었지 에뮬은 목소리를 낸 적이 거의 없었다.
“전염병..인가요?”
약간 기세가 누그러진 후작부인이 아까보다 훨씬 양순 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전염병이었다면 왕성에 들어올 엄두도 내지 못했겠죠.. 우리 에뮬은 선천적으로 호흡기가 좋지 않답니다.."
에밀리가 에뮬을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그러자 눈치 빠른 에뮬이 볼 안쪽을 세게 씹어서 피를 낸 뒤 더욱 큰 소리로 기침을 했다.
"비싼 돈을 들여 델리튼 공국의 회복마법사에게 부탁을 해보려고도 했지만, 선천적인 기흉 같은 것은 회복마법으로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아이보리색의 실크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기침을 하던 에뮬의 손수건에 붉은 피가 묻어 나왔다.
“에뮬은 말 한 마디를 꺼낼 때마다 호흡 기관에 자극이 가서 멈출 수 없는 기침이 나온답니다.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았던 것은 후작부인에게 괜히 마음이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에뮬이 입을 가린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에뮬은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어머니와 생이별을 했습니다. 사선에 선 동생이 어머니의 얼굴을 한 번만 보고 싶다는 부탁을 하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겠어요..”
후작부인은 에뮬의 손을 꼭 잡은 에밀리를 보며 어릴 적 죽은 그녀의 동생인 세를리를 떠올렸다.
세를리는 20여년 전 유행했던 흑사병에 걸려서 헛간에 격리된 채 일주일간 피를 토하다가 죽었다.
전염병 환자라 가족 묘지에 묻히지도 못한 세를리는, 평민들의 시체와 섞여서 볏짚과 함께 불태워지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해야만 했다.
어린 시절 죽었던 세를리의 얼굴이 이제는 가물가물 하지만, 그래도 그때 느꼈던 감정만은 생생했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자매가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는 슬픔이란, 참으로 잔혹한 것이었다.
세르레나 후작부인의 눈에 눈물이 맺히자 당황한 에밀리가 손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었다.
손수건을 받아 든 세르레나 후작부인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렸다.
그들에게 내비치는 첫 미소였다.
“그런 사정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제가 너무 몰아붙였네요. 저도 어린 시절에 동생을 먼저 떠나보낸 적이 있어서 에밀리양이 지금 얼마나 힘들 지 잘 안답니다.”
에밀리의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친 후작부인이 조금 식은 찻주전자를 친히 들어서 그녀들의 빈 찻잔을 채워주었다.
귀부인이 하녀를 시키지 않고 직접 찻주전자를 드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조금 식었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온기가 남아 있답니다. 여기, 설탕도 넣어서 마셔요.”
후작부인이 각설탕이 들어있는 크리스탈 병을 그들 쪽으로 쭉 밀며 말했다.
“차를 마시면 기침이 좀 잦아들 거에요. 왕궁에서만 나는 호든 장미의 이파리로 우린 차랍니다. 목의 통증에 특효약이지요. 여기서 조금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금방...”
세르레나 후작부인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말 끝을 흐렸다.
흑사병에 걸려서 헛간에 격리되었다는 세를리를 몰래 만나러 나갔던 과거의 그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 번 밀려 들기 시작한 기억의 파도는 걷잡을 수 없이 그녀의 마음에서 휘몰아쳤다.
세를리가 혼자 헛간에서 심심할 까봐 걱정되었던 어린 세르레나는 세를리가 좋아하는 설탕 과자와 토끼 인형을 품에 꼭 안고 모두가 잠든 밤, 몰래 창문으로 탈출했었다.
정원의 맨 구석에 있는 헛간으로 간 그녀는 몸집이 조그마한 세를리가 볏짚 더미에 웅크려서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세를리를 불러 과자와 토끼 인형을 안겨주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서 그녀 자신의 이불까지 세를리에게 던져주었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세를리의 말은 모두 무시했다.
흑사병의 무서움을 모르는 어린아이였기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에믹 남작부인을 모셔오겠다는 말을 하며 응접실을 나서는 세르레나 후작부인의 뒷모습이 조용히 들썩였다.
***
“어쩌자고 그런 거짓말을 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를 곧 죽을 사람으로 만들어?!”
응접실 문이 닫히자, 에뮬이 분노가 들어찬 목소리로 속삭이며 으르렁거렸다.
“그럼 어쩔거야! 이대로 죽 쑬 순 없잖아! 한 시가 급하다며!”
에밀리도 똑같이 으르렁대며 속삭였다.
“어차피 이렇게 됐으니까, 넌 지금부터 죽을 병에 걸린 환자야. 알겠어?”
“허..”
어처구니 없는 에밀리의 즉흥적인 행동에 혀를 내두른 에뮬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에밀리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에밀리는 ‘네가 노려보면 어쩔거야.’ 하는 눈빛으로 에뮬을 흘겨 본 뒤, 장미향이 나는 차를 음미했다.
에뮬은 뭐라고 더 말을 하려다 바깥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입을 합죽이처럼 다물었다. 지금 그녀는 말을 한 마디만 해도 기침을 수백 번 하는 불치병 환자 역을 연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응접실의 문이 활짝 열리며 세르레나 후작부인과 에믹 남작부인이 차례로 응접실로 들어왔다.
아주 화려한 남색장미자수가 올올히 놓인 은빛의 공단 드레스를 입은 에믹 남작부인은 구불구불한 은발의 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에밀리와 에뮬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가슴팍에는 왕실의 인장이 새겨진 커다란 사파이어 브로치가 빛나고 있었고, 은발의 머리카락은 델리튼 공국의 고위 귀족들이나 사용한다는 마법가루를 뿌려 놓았는지, 머리카락이 찰랑일 때마다 은빛으로 화려하게 빛났다.
화려한 응접실조차 그녀의 아름다움에 기를 못 펴고 있었다.
세르레나 후작부인은 조금 있다 뵙겠다고 작게 읊조리며 응접실의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에밀리는 호기롭게 어머니에게 뭐라할 것이라고 다짐했었으나 막상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가진 그녀의 실물을 마주하자 머릿속에 가득했던 할 말이 모두 지워진 백지장 상태로 돌아갔다.
남작가에 있었던 어머니는 분명 지금과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입고 걸치는 모든 것은 결국 남작가의 분수에 맞는 것들이었기에 여타 귀족들만큼 화려한 장신구를 지니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에믹은 왕실에서 나오는 품위 유지비를 아낌 없이 자기 치장에 쏟아부은 듯 보였다.
“에밀리, 오랜만이구나.”
무심한 듯 툭 내뱉은 에믹의 말에 에밀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에믹은 얼굴이 붉어진 에밀리의 화려한 착장을 훑어보다가, 이내 옆에 앉아있는 자신의 막내 딸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에뮬…”
에믹은 에뮬의 장성한 모습을 처음 보았다. 아멜과 에밀리는 종종 다른 무도회에 참석했기에 먼 발치에서라도 그들의 안위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에뮬은 이상하게도 사교계의 모든 활동에서 두문불출했다.
아장아장 걸어다니던 조그마한 막내딸이 장성 해서 첫째 딸인 아멜과 꼭 닮은 모습이 된 것을 본 에믹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들끓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매년 어린 영애들의 데뷔탕트에 참석했지만, 그녀의 막내딸이 참석하는 데뷔탕트 만은 참석할 수 없었다.
괜히 에뮬의 데뷔탕트에 참석했다가 페트릭 남작과 마주칠까봐 지레 질투를 한 왕이 그녀가 참석을 하지 못하게 막았기때문이다.
“세르레나 부인이 네가 불치병에 걸렸다고 하더구나. 내가 너를 낳았을 때만 해도 그런 징후는 없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아팠던 거니?”
에믹이 부드러운 손길로 에뮬의 고운 얼굴을 다 가리고 있는 치렁치렁한 긴 머리카락을 얼굴이 잘 보이도록 귀 뒤로 꽂아주며 말했다.
얼굴이 온전히 다 드러난 에뮬은 아까보다 훨씬 시원한 인상을 보여주었지만, 머리카락이 온 얼굴을 가리는 것으로 안정감을 느끼는 에뮬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언니, 도와줘.’
에뮬이 입모양으로 에밀리에게 도와달라고 청했지만, 평소 같았으면 대신 나서서 도와주었을 에밀리는 그녀의 도움 요청을 외면했다.
오랜만에 만난 엄마의 기에 눌린 것은 비단, 에뮬 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밀리는 에믹 남작부인이 짐레트 2세의 정부로 발탁 되며 거처를 옮길 때, 정말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을 느꼈었다. 누군가의 아내에서 더 높은 신분의 옆자리로 옮겨가는 어머니의 모습이 미친 듯이 꼴 보기 싫었다.
에믹 남작부인이 왕의 정부가 되어 떠난 뒤로, 에밀리는 매일같이 에믹 남작부인의 험담을 떠들고 다녔다. 이것은 펠트로 그린과 유일하게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매일 같이 싸우고 으르렁거리고 서로를 혐오하는 그들도, 가족 회의 중에 에믹 남작부인에 대한 주제가 나오면 반색을 하며 그녀의 욕을 일삼곤 했다.
에밀리의 머릿속에서 가족 회의 시간, 펠트로와 신나게 험담을 나눴던 것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