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을 살짝 덮는 검은색 치마와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 정장 재킷.
신아가 어제 골라준 옷을 말끔히 차려입은 수현이 서 있었다.
“방금.”
수현이 신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또 벌어진 샤워 가운을 정리했다.
“근데.”
수현이 리본을 단단하게 묶으며 고개를 들었다.
“…….”
“누구랑 같이 일하길래 좋기까지 해.”
“뭐, 뭐가.”
신아가 한 발자국 떨어졌다. 몇 발자국만 더 뒤로 가면 유리창과 부딪힐 거리였다.
“…….”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수현이었지만, 오히려 그 침묵이 더 대답을 종용하는 기분이었다.
“오늘 배정될 상사가 누군가 싶어서 한 소리였어!”
“그러고 보니 오늘 첫 출근이었나?”
“…….”
신아가 눈을 맞추자 수현이 살짝 웃었다.
창에서 스며든 햇빛이 수현의 얼굴에 닿았다.
한쪽 눈을 살짝 찌푸린 게, 꼭 윙크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제 네가 골라준 옷 입었는데, 잘 어울리나 싶어서.”
그걸 왜 나한테 묻느냐는 듯이 신아가 수현을 바라봤다.
“봐줘야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나. 명색의 첫 출근인데.”
그래서 잘 어울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신아가 홀린 듯이 수현의 앞으로 다가갔다.
“잘 어울려, 잘 입었고.”
“…….”
누가 고른 옷인데.
신아가 수현의 카라를 정리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근데 화장은?”
수현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신아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는 건데.”
그렇지.
수현이 알 리가 없었다.
“따라와 봐.”
신아가 수현을 지나쳐 앞장섰다. 조용한 방 안에 슬리퍼 쓸리는 소리가 울렸다.
***
방에 들어온 신아가 바닥에 둔 가방에서 파우치를 꺼냈다.
수정 화장을 하거나 집에서 화장하지 못하는 상황을 대비해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여기 앉아봐.”
턱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의자를 꺼낸 수현이 착석했다.
“너 옷은?”
“이거 다 하고 입으면 되지.”
수현의 물음에 대답한 신아가 화장품을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고개를 살짝 돌린 수현이 화장품 하나하나를 눈으로 훑어봤다.
“자, 나 봐봐.”
신아가 수현의 턱을 살짝 잡아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예상치 못한 신아의 행동에 수현의 눈이 커졌다.
“기초는 다 발랐어?”
“기초?”
“스킨로션 같은 거.”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기초는 마친 상태고.
손등에 선크림을 동전 크기 모양으로 짠 신아가 수현의 얼굴에 선크림을 가볍게 발랐다.
톡톡. 부드럽게 피부를 두드리는 신아의 손길에 수현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시야가 차단되니 소리와 향에 더 민감해졌다.
신아의 섬세한 손길과 함께 익숙한 샴푸 향이 코끝에 스쳤다. 수현과 같은 냄새였다.
신아의 손가락이 눈두덩이 위를 부드럽게 스쳤다.
“눈 떠봐.”
암전된 시야가 순식간에 신아로 가득 찼다.
수현이 멍하니 올려다봤다.
“위 쳐다봐. 혹시나 눈에 들어가면 비비지 말고 깜빡이고.”
신아가 수현의 속눈썹에 마스카라를 발랐다.
위로 솟은 속눈썹에 마스카라가 묻어나면서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다 바른 마스카라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신아가 그 옆에 있는 립스틱을 집었다.
“어디 봐.”
신아가 다시 한번 수현의 턱을 잡았다.
이리저리 돌려보는 신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 봐야지.”
수현의 눈동자가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샤워 가운에 가려진 어깨뼈에 시선을 고정했다.
수현의 턱을 부드럽게 잡은 신아가 립스틱을 발랐다.
“음…….”
뒤로 물러난 신아가 수현의 얼굴을 살폈다.
수현이 눈을 깜빡이며 신아를 바라봤다.
“좀 뭉쳤나?”
은은한 샴푸 향이 수현의 코끝에 스쳤다.
눈앞으로 다가온 신아가 수현의 입술을 살살 문질렀다.
간질간질했다. 아찔한 기분에 눈을 감았다.
“됐다. 이제 눈 떠도 돼.”
눈앞에 드리워진 무거운 그림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신아를 응시하던 수현이 눈을 깜빡였다.
‘착각인가.’
분명 앞에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인데.
“화장하는 게 좀 낯설긴 하지?”
왜 이신아가 보이는 거지.
넋이 나간 수현의 앞으로 신아가 손을 흔들었다.
“저기요, 원수현 씨? 여기서 주무시면 큰일 나요.”
정신이 번쩍 든 수현이 신아를 바라봤다.
역시나 착각이었던 듯, 자신의 얼굴이 앞에 있었다.
***
부사장 비서실.
데스크 뒤로 ‘진영 그룹’이라는 로고가 큼직하게 박혀 있다.
출근한 비서들이 하나둘 비서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인사성 밝은 은솔이 현규를 발견하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은솔은 현규의 대학교 후배이자 현규 다음으로 짬이 높은 비서였다.
“하이.”
데스크 옆에 서 있는 현규가 손을 들었다.
옷매무새를 다듬은 은솔이 현규의 옆에 섰다.
“오늘 새로운 분 오신다면서요.”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어?”
“우리 사이에선 완전 핫이슈죠. 일 잘하기로 아주 소문이란 소문이 다 났던데요? 부사장실 배정받는 것도 일 잘해서 그런 거라면서요?”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지.
현규가 은솔의 말에 맞장구치려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선배, 안 어울리게 왜 한숨을 쉬세요, 한숨을.”
“뭐야, 그 호칭은.”
깜짝 놀란 현규가 은솔을 바라봤다.
사내에선 선배란 호칭을 쓰지 않는 은솔이었다.
“선배가 너무 푹 쳐져 있으니까 그렇죠. 왜요, 무슨 일인데?”
아…….
현규가 대답 대신 눈썹을 긁었다.
주말에 신아와 수현을 본 후로 마음이 복잡했다.
신아에게 스카웃 제의를 할 때만 해도 이런 걱정은 없었다.
그녀의 오너에게서 ‘이신아 씨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가’라는 소리를 들었을 땐 오히려 든든하기까지 했다.
경영에 관심 없던 부사장님이 각성하고 제 세력을 키우나 싶었으니까.
“그런 게 있다, 그런 게.”
누가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일 줄 알았냐고.
뒷좌석에 함께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이 두둥실 머릿속에서 떠다녔다.
잔상까지 모조리 쫓아내기 위해 현규가 머리를 흔들었다.
“뭐, 뭐야. 왜 이래?”
덕분에 깜짝 놀란 건 은솔이었다.
현규가 고개를 이리저리 꺾으며 외부로 이어진 복도를 바라봤다.
“어?”
현규의 눈이 커졌다.
은솔이 현규의 시선을 따라 앞을 봤다.
단정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수현이 비서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저분이야?”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은솔이 물었다.
하지만 현규는 그녀에게 대답도 해주지 않고 수현에게로 다가갔다.
“이, 이신아 씨!”
수현이 불쾌한 시선으로 현규를 올려다봤다.
“에?”
은솔이 의아한 눈으로 그 둘을 바라봤다.
“이게 지금…….”
“오, 오늘부터 어디에 배정되고 어디 팀 소속인지 아직 못 들었죠?”
현규가 슬쩍 은솔을 살피며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갑자기 붙잡힌 팔이었다.
‘이게 무슨 꿍꿍이야.’
수현이 싸늘한 눈으로 자신의 팔을 붙잡은 현규의 손을 쳐다봤다.
“그, 그니까 따라와요.”
수현을 끌고 복도를 지나 빈 회의실에 들어갔다.
***
“후.”
문에 등을 기댄 현규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여전히 수현의 팔을 붙잡은 채로.
“뭐 하…….”
현규를 나무라려던 수현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너 회사 사람들한테 꼭, 꼭 존댓말 써야 하는 거 잊지 마! 너 지금 원수현 아니고 이신아니까. 명심해, 꼭!”
하필이면 이때 신아의 말이 생각나다니.
수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아, 미안해요.”
뒤늦게 제 손을 발견한 현규가 황급히 손을 뗐다.
수현이 사늘한 눈으로 현규를 바라봤다.
아무리 몸이 바뀌었다고 해도 신아와 단둘이 붙어있는 걸 방지해 미리 출근시켜 놓은 현규였다.
근데 이렇게 따로 부를 줄이야.
“지금, 나랑,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정확히는 이신아랑.
굳은 얼굴로 수현이 입을 열었다.
일부러 단어 하나하나에 강세를 주며 끊어 말했다.
“죄송합니다.”
현규가 고개를 숙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다급함에 함부로 타인의 몸에 손을 댄 자신이었으니까.
“그쪽의 태도, 상대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행동이라는 걸 인지하길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부사장님.
이라고 하마터면 말할 뻔했다.
깜짝 놀란 현규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뭡니까.”
불쾌한 얼굴로 수현이 회의실을 훑고 있었다.
긴 회의용 탁자와 빙그르르 그 주위를 둘러싼 의자가 보였다.
“아 그게.”
한 번 부사장님 같다고 생각한 후로, 말이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이신아 씨도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네.’
왜 그녀의 오너가 신아가 없다면 회사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했는지 이해가 됐다.
수현이 사늘한 눈으로 현규를 바라보다가 문고리를 잡았다.
“할 말 없으면 그냥 가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현규가 다급하게 말했다. 문고리를 잡은 상태로 수현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뭡니까.”
“우리 부사장님에게서 떨어지세요!”
아, 이런.
현규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다.
무슨 자신이 여자 주인공한테 경고하는 서브 여주도 아니고.
하필 나와도 이런 말이 나왔다.
“지금 나한테 한 말입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신아를 경계한다고?”
“…….”
“허, 참.”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문고리에서 손을 뗀 수현이 가만히 현규를 바라봤다.
“오해하지는 말고요!”
현규가 모터가 달린 것처럼 격하게 손사래를 쳤다.
“그럼 뭔데요.”
“저 다 알고 있습니다.”
“…….”
무엇을?
수현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신아 씨와 부사장님, 서로 만나는 사이이신 거요.”
수현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저 진짜 다 알고 있습니다!”
현규가 비장한 얼굴로 수현을 바라봤다.
해도 아주 단단히 했네. 오해.
하지만 그 오해가 나쁘지 않았다.
한껏 풀어진 수현의 얼굴을 본 현규가 이 틈을 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 많으신 분입니다. 이사회에서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요. 괜한 구설수가 부사장님껜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소리입니다.”
“…….”
“이신아 씨도 알다시피 부사장님은 앞으로 진영 그룹을 책임지실 분이시지 않습니까.”
“…….”
“무슨 말씀인지 알 거라고 믿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이신아 씨.”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수현이 입을 꾹 다물며 대답을 아꼈다.
현규의 충성도가 증명되는 순간이었지만.
“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몸이 바뀐 이상,
“떨어지는 건 무리입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니까요.”
억울한 듯, 현규가 말꼬리를 늘렸다.
적당히 조심해달라 이런 이야기였는데.
“무슨 말인지 다 이해했습니다.”
이해하긴 뭘 이해해.
현규가 살짝 수현을 째려봤다.
진지한 수현의 눈과 마주치자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정도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뭘 알아서 한다는 건데?
현규의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했지만, 수현은 가차 이 문을 열었다.
“그럼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이, 이신…….”
현규가 말을 걸 틈도 없이 수현이 회의실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