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웃으며 대화를 하고 있는 고야를 넋이 빠진 듯이 쳐다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 나를 발견하고도 고야는 저번에 봤을 때처럼 태연하게 행동했다. 오히려 지우가 먼저 내 친구를 소개해 주었다.
"여기가 아저씨 친구분 맞죠? 세상에, 내가 여기 도착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글쎄 이 분이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창가에서 저를 보고 있는 거예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저씨 이름을 말했더니 그 친구분이더라고요.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는지 모르겠어요. 진짜 신기하죠?"
"어이~ 친구야! 다시 만나서 반갑다. 아메리카노 한잔 내려줄까?"
"..."
지우는 그렇다 쳐도 저 얄미운 놈은 38일 만에 나타나 한다는 말이 '다시 만나서 반갑다. 아메리카노 한잔 내려줄까?'라니, 옆에 지우가 없었으면 또다시 유혈사태가 발생할 뻔했다. 평행우주인지 뭔가 하는 이 미친 세상은 어떻게 하면 사람을 놀라게 할지를 연구하는 것일까? 고야가 사라지고 또 TV가 나오고 또 지우가 나타나고 그 지우가 내가 알던 지우가 아닌 후에 비로소 이제는 놀라지 말자고 다짐을 하였건만 이렇게 막상 겪으면 기분이 더러울 정도로 또 놀라게 된다. 나는 애써 썩은 미소라도 지은 후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커피는 내가 알아서 내려 마시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계속 대화를 나누라고 하고는 커피머신이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 오빠라고 불러. 편하게 대해줘~"
"그래도 될까요? 아저씨한테 미안해서..."
"저 자식은 애도 둘이나 있고 와이프도 있는데 아저씨 맞지. 나는 정말 싱글이야. 믿기 힘들면 저 아저씨한테 물어봐도 되고. 기남아~ 나 싱글이지?"
미친놈.
"그리고 얼굴도 엄청 다른 것 같아요. 옷 때문에 그런가?"
"내가 좀 관리를 하는 편인데 요즘 이 정도 안 하는 남자 없지. 우리 기남이가 좀 털털해서 그렇지 오히려 터프한 매력은 내가 배우고 싶을 정도야."
"그럼, 정말 오빠라고 부를까요?"
"그래. 네 살 차이에 아저씨는 좀 아니지."
아메리카노 한잔 내리는 시간에 저런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리고 고야가 피부도 남자치고 하얗고 좀 꽃미남 스타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나 보고는 아저씨라더니 만난 지 얼마 됐다고 오빠냐... 아, 갑자기 나의 지우가 보고 싶어졌다. 나는 다 들리게 대화를 나누는 두 발칙한 생명을 항하여 못 들은 척 신사답게 다가가 지우와 고야 사이 중간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둘이 말이 잘 통하는가 봐?"
"하하하, 그러게."
"호호호, 그래요?"
놀고 있네. 설마 이것들 지금 이런 곳에서 연애질 하는 건가? 어쨌든 지우는 확실히 나의 아내가 아니었다. 고야와 서로 호감이 생기던 말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그보다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저기, 최고야. 너 사라진 지 38일 만에 나타난 것은 알고 있니?"
"안 그래도 그 일에 대해서 네가 오면 이야기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된 거, 둘 다 잘 들어. 그러니까 그게..."
항상 여유롭던 고야가 무언가에 대해서 그토록 진지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부터 매우 심각한 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야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고야는 38일 전 6월 4일, 나와 만나서 함께 본인의 집으로 간 후 뻗어서 곧바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있다가 눈을 떠보니 다시 본래 세상이었다고 했다. 본인이 겪은 것이 꿈이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생생했는데 나와 있었던 이곳에서 처음 눈을 뜨던 시각에서 조금도 지나지 않은 2051년 5월 5일 저녁 7시 45분임을 알고는 꿈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충격이 너무 컸던 나머지 아버지에게 말하기 힘들었던 여자 친구와 관련하여 생긴 어마어마한 채무를 솔직히 아버지에게 말씀드리고 용서를 빌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찾아갔고 생전 처음으로 따귀도 한 대 맞았는데 다행히 재산을 물려받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나서 채무는 아버지께서 해결해 주셨다고 했다. 그 후 이제 일상을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데 가끔씩 계속 자신이 혼자 있었던 세상에 대한 기억이 너무도 강렬하게 떠올라서 또 어쩌면 꿈 같은 그곳에서 다시 눈을 뜨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에 정신과 상담까지 받으며 지냈다고 했다. 그러다 그것이 꿈이었다면 현실에서 내가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를 수소문하였다고 했다. 며칠간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물어봐서 결국 나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고 전화를 걸었더니 익숙한 목소리의 내가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역시 꿈이었다고 생각하고는 정신과 약도 끊고 그냥 살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 집에서 눈을 뜨니 또다시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럼, 고야 네가 살던 세상에는 또 다른 내가 있었다는 말이야?"
"여기 지우도 네가 알던 지우가 아니라며? 너도 아마도 나와는 다른 지구에서 온 것 같다."
빌어먹을, 그러면 나는 도대체 어느 지구로 찾아가야 한단 말인가?
나는 답답한 마음에 잠시 담배 좀 피우고 온다며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