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장대 같은 비가 쏟아졌다.
10분 전만 해도 눈발이 날리듯 흩뿌리던 보슬비가 작은 우산으로는 들이치는 비를 피하기 힘들 정도로 퍼부었다.
퍼붓는 빗속을 뚫고 검은 세단 한 대가 한남동 고급 주택가 골목을 벗어나 대로에 막 진입했다.
고급 세단의 차창 너머로 한 남자가 손을 들어 손목에 찬 시계의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밤 11시.
후우, 하는 고단한 숨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수호 건설의 핵심 계열사인 수반 엔지니어링 사장, 송건.
법조인이었던 그가 로펌을 떠나 부친이 회장으로 있는 수반 엔지니어링 사장이 된 지도 어느덧 몇 년이 흘렀다.
지친 기색의 송건은 종일 제 목을 조였던 단단한 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풀었다.
지칠 만도 했던 긴 하루였다.
손에 잡힌 옅은 핑크색의 타이가 한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구지나. 타이를 선물한 여학생.
그리고 조금 전 그녀의 아버지, 수호 건설 한성범 회장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를 않았다.
‘건아. 네가 남매를 좀 책임져줘.’
‘내가 죽으면’이란 뒷말이 생략돼 있었다. 그 난감한 부탁에 어떤 답을 했어야 하는 걸까.
‘네가 아니면 걔들, 돈 때문에 불행해질 거야.’
친인척을 두고 왜 자신에게 그런 곤란한 유지를 남긴 건지.
난감하고 불편하고 우려스러웠다.
그럼에도 조금 전에 헤어진 한성범 회장의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걸걸하고 거침없는 성격인 한 회장은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노인으로 보일 만큼 나약해 보였고 슬퍼 보였다.
처음이었다, 철인이라고 불리는 남자의 그런 슬픈 표정은.
그의 전화를 받을 때만 해도 며칠 전 언급한 페이퍼 컴퍼니 설립 관련 호출이라고만 생각했다.
집무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송건의 핸드폰 진동이 울린 건 밤 9시쯤.
이미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늦은 밤이었다.
태블릿에 고정돼 있던 시선을 무심하게 핸드폰으로 옮기던 송건이 자세를 고쳐 앉은 건 액정에 뜬 글자 때문이었다.
회장님. 그 세글자가 의자 깊숙이 들어앉아 있던 그를 바로 세웠다.
흠, 그는 헛기침으로 가라앉은 목청을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회장님.”
그 전화를 받은 즉시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아야 할 만큼 바빠진 건 수호 건설, 한 회장의 새로운 지시 탓이었다.
만든 지 얼마나 됐다고 페이퍼 컴퍼니를 하나 더 만들어야겠다니. 내연녀인 진 여사의 베갯닛 송사가 또 먹힌 듯했다.
젠장. 이러다간 언젠간 분명히 국정 감사 자료에 오르게 될 것이다. 모기업과 계열사 간 수상한 밀어주기 정황이란 제목으로.
회사를 통째로 말아먹겠다는 건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송건의 부친과 한 회장은 수호 건설 초창기부터 파트너였다.
법조인 출신인 송건은 수호 건설의 사위나 되는 거처럼 한 회장의 수족 노릇을 해왔다. 깊은 신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업무였다.
아직 자녀들이 어리고 친동생이란 놈은 그저 형의 피를 빨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망나니였으니 아들 같은 그에게 중임을 맡기는 게 핏줄에게 의지하는 것보다 안전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런 믿음직한 한 회장의 충복답게 그는 통화 종료 후 즉시 자료를 챙겨 서류 가방에 넣었다.
재킷의 단추를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선 시각은 시계의 시침이 이미 9시를 넘겼을 때였다.
한성범 회장의 한남동 자택.
40분이 걸려 한 회장의 자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0시가 다 되어가는 새까만 밤이었다.
실내로 들어서자 그 집안 살림을 총괄하는 집사, 김 여사가 그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늦은 시간인데. 사장님 고생이 많으시네요. 회장님 미술관에 계세요.”
“아. 네.”
송건은 가벼운 묵례 후, 긴 복도를 따라 제법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걸어서 저택의 서쪽에 위치한 별채 건물로 향했다.
좌우로 길게 뻗은 외관의 대저택. 저택의 별채 건축물 지하 1층은 미술관이다.
몇 년 전 사고로 작고한 한성범 회장 부인이 생전에 애지중지 모아둔 미술품을 전시한 개인 미술관.
미술관 출입문이 열리자 한 회장이 한 그림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 달 전 심근경색 발작으로 쓰러진 후 그는 상당 부분 업무에서 손을 뗀 상태였다.
“왔니? 늦은 밤에 오라고 해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한 회장은 시선을 그림에 고정한 채 버릇처럼 가슴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며 송건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 그림. 지나 엄마가 유독 좋아하던 그림이야. 근래 왜 이 그림이 자꾸 눈에 밟히는지 모르겠어. 지나 엄마가 날 데리러 오려는 건지.”
그 말의 의미를 알기에 송건의 등골이 순간 서늘해졌다.
“과로하지 마시고 당분간 건강 관리에만 신경 쓰세요.”
“실은 어제도 죽다 살아났어. 통증에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기분. 넌 느껴 본 적 없겠지.”
느껴본 적 없기에 선뜻 그 어떤 답도 할 수가 없었다.
“낮에도 극심한 통증이 찾아와서 김 박사가 다녀갔다.”
김 박사는 그의 주치의였다.
심상치 않은 건강 악화에 우려는 했지만 이제 진짜 현실적인 문제를 대비해야 하는 걸까.
그런 상념이 머릿속을 채웠을 때 한 회장의 가라앉은 음성이 들렸고 송건은 제 귀를 의심했다.
“건아. 네가 남매를 좀 책임져줘.”
“………!”
“내가 죽으면 애들 좀 부탁한다.”
건강이 위태로운 걸 알기에 송건은 차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알잖아? 네가 아니면 걔들, 돈 때문에 불행해질 거야.”
***
“형님, 어쩌실 겁니까?”
운전 중에도 수시로 레어미러에 비친 송건의 표정을 살피던 그의 수족, 강 실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장 돌아가시는 것도 아닌데 그런 걸 왜 물어? 친인척이 가만있지도 않을 테고.”
“…네? 회장님과 페이퍼 컴퍼니 문제 의논하신 거 아니었어요?”
“…아.”
머릿속이 온통 한 회장이 남긴 충격적인 유지로 가득한 그였다. 자신의 동문서답에 헛웃음이 터진 그가 지친 눈을 감았다.
“눈 좀 붙일 게 도착하면 깨워줘.”
“예. 주무세요.”
송건이 막 눈을 감았을 때였다. 핸드폰 수신음이 울렸다.
너무나 피곤했던 송건은 진저리가 난다는 듯 미간을 구기다 핸드폰 액정에 뜬 글자를 보고 힘주어 눈꺼풀을 올렸다.
그 시각에 전화할 리가 없는 의외의 발신자.
수호 건설, 한 회장의 장녀, 구지나.
얘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는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학창시절 한때, 그 아이의 과외 선생질을 좀 했던 탓에 아는 척은 하고 지내는 사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이 시간에 사적인 통화를 하는 사이는 아닌데.
“무슨 일이지?”
뜬금없는 연락에 의아했던 그는 안부 인사는 생략하고 바로 물었다.
“쌤….”
이후 말을 잇지 못하고 쌕쌕거리는 숨소리만이 잠시 들렸다.
“구지나?”
“아빠가, 아빠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셨는데 아줌마가 119를 안 부르고 김 박사님에게만 연락했어요. 오시려면 한참 걸릴 텐데.”
아줌마는 내연녀 진 여사다.
“진 여사님 바꿔.”
“몰래 전화하는 거예요. 아빠가 쓰러진 사실이 외부로 새어나가면 안 된다고 119에 전화한다는 지환이 핸드폰을 빼었어요.”
진 여사에게 핸드폰을 빼앗긴 구지환은 구지나의 남동생이다.
그 광경을 서재 문틈으로 우연히 본 구지나가 현장을 몰래 벗어나 위급 상황을 알려온 것이다.
“지나야. 쌤 15분이면 도착해. 내가 지금 119에 신고할게. 119가 나보다 먼저 도착할지 모르니 정원 출입구 쪽에 미리 대기하고 있어.”
진 여사가 훼방을 놓을지 모르니 사전에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한 회장의 죽음보다 수호 건설 주가 하락이 가장 우려되는 동거인,
뭔 짓을 해도 놀랍지 않은 사악한 여자가 그 집에 살고 있다.
“네.”
한숨에 섞여 나온 한 음절이 애처롭게도 떨렸다.
“강 실장 들었지? 밟아.”
통화를 마친 그의 첫마디였다.
“네!”
자세히 듣지 않아도 위급한 상황이었다.
탈이 난 게 분명했다. 조금만 더 늦게 출발했다면 이런 상황은 면했을 텐데. 제 잘못은 아니었지만 송건은 위급한 현실에 자신을 자책하게 됐다.
망할 여우 같으니. 사람탈을 쓴 여우는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한 회장의 건강 이상설이 새어나가는 것만 신경 쓰고 있다.
사람 목숨보다 돈이 더 중요한 여자니 어찌 보면 이런 반응이 당연하다 싶다.
송건이 한 회장의 저택에 도착했을 땐 이미 119 대원들이 다행히도 실내로 들어간 후였다.
송건이 허겁지겁 저택 내부로 들어가려던 찰나, 이미 구급 침대에 누운 채 실려 나오는 한 회장이 보였다.
“한국대학 병원으로 가주시겠습니까.”
응급 대원들과 마주친 송건의 목소리가 여자의 앙칼진 음성과 겹쳐 들렸다.
“이미 내가 전달했어요. 송 사장님 어쩌자고.”
말을 끝맺지 않고 한숨을 쉬는 진 여사가 뒤따르고 있다는 걸 송건은 그제야 확인했다.
“사람의 생명이 가장 우선이 아닐까요?”
대원들과 함께 송건 앞을 지나친 진 여사의 시선이 몹시도 싸늘했다. 한 씨 집안일에 사사건건 끼어드는 송건이 아니꼬워서 죽겠다는 표정이다.
“회장님 건강은 집안일이니 내가 알아서 해요. 사장님은 회장님이 지시한 문제나 조속히 처리해 주세요.”
눈앞에서 알짱대는 송건이 밉살스럽고 눈에 거슬린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한 회장이 아들도 아닌 그를 신뢰하는 게 영 못마땅한 그녀였다.
한국대학 병원 응급실.
한성범 회장의 싸늘한 육신 위로 천천히 흰 천이 덮였다.
찰나의 순간이 삶과 죽음을 갈랐다.
죽음은 어린 남매를 나락으로 끌어내렸고 나락 끝에 닿은 절망을 위로할 수 있는 말은 없어 보였다.
쉴 새 없이 아빠를 부르는 애절한 절규에 송건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매가 견뎌내야 할 삶의 무게는 가혹했고 안타까운 상황은 현실이 되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한 회장의 심장은 결국 멎었다.
좀 더 신속하게 조치를 취했다면 살 수 있었을까. 생과 사의 경계는 언제나 애절하다.
이제 세상에 남매 둘만이 남았다.
예고 없는 불행이고 이별이었다.
그리고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한 또 한 사람.
송건.
그에게 남겨진, 피해갈 수 없는 숙명. 법정 후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