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나가사키
“저는 웅천 사람입니다. 일본군은 조선의 남쪽인 진해, 정확히 말하면 웅천에 진지를 구축하고 조선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았습니다. 일본과는 뱃길도 가깝고, 배들을 정박시키기 좋은 지형적 장점이 많은 곳입니다.
당시 조선에 파견된 대장으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있었는데, 웅천성은 고니시가 맡았고, 그 밑에는 사위인 요시토시가 있었습니다.
유키나가는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기에 조선에 와있던 그의 휘하에는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에, 일본에 있던 그레고리오 신부를 웅천으로 불러, 종부성사를 하도록 했답니다.
이 스페인 신부는 1593년 12월 말부터 웅천성에 머물면서 주로 일본군인들에 대한 포교와 예배, 고해성서, 종부성사 등을 했는데, 중요한 것은 진지 근처에 사는 조선인들과 접촉을 시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웅천의 병영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그레고리오 신부가 그곳에 부임한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시점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 주변에 모여든 어린이들에게 기독교를 이야기 해줬는데, 저는 전쟁 통에 부모를 잃고, 그야말로 고아의 처지에 있었기에, 스페인에서 온 신부를 동행하여 왜군의 성에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기본적인 일본말은 어느 정도 하였으나, 조선말은 전혀 못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저를 통해 몇 가지 조선어를 배우는가 하면, 저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아, 나보다 먼저 고려 땅을 밟은 스페인 사람이 있었군. 아마 그는 예수회 신부였을 것 같소. 유럽에서 신교의 등장과 기독교 내의 혼란으로 인해 기독교는 오히려 해외로 방향을 전환했소.
세상의 소란을 등지고 신과의 조용한 합일 만을 원했던 사람들은 산 속으로 들어갔고, 종교적 논쟁을 하는 사람들은 신교와 철저히 대결하는데 전념했는데, 이 과정을 통해 기독교 자체의 문제를 직시하는 계기가 되었소.
한편, 이런 복잡한 양상을 외부로 돌려,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경향이 강해, 신세계로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오. 마침 아메리카의 발견이 있었고, 이어 태평양에까지 진출하는 시기였기에, 세계 곳곳을 갈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해외 선교의 속도를 높여 갔는데, 그 중에서도 예수회는 가장 적극적으로 교육사업에 뛰어들었소.
사람은 태어나 그냥 두면 동물과 다를 바 없으니, 교육을 받아야 신앙을 이해하고, 진정한 인간으로 성장한다는 원칙 하에 무엇보다도 교육을 중시했던 것이오. 물론, 타고난 운명의 지배를 받던 기존의 인간형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운명을 개척하고 바꿀 수 있다는 사고, 즉 자유의지가 중심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오.
이런 시기에, 프란시스꼬회와 예수회야 말로 험지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아니 죽음까지도 불사하고 선교에 힘을 다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오.
종부성사를 이유로 고려, 아니 조선에 갔다고는 했어도, 그 스페인 신부가 조선에 간 궁극적인 목적은, 조선인에 대한 포교였을 것이오. 그래서 먼저 주변에서 자발적으로 모여든 어린이들을 교육했을 것이고, 그 어린이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선교를 확대하려 했을 것이오.
그레고리오 신부는 대충 내 나이 정도는 되었을 법한데, 나보다 더 대단한 모험가였던 것 같소. 나는 기독교를 지키겠다고 맹세하면서도 기껏해야 그리스까지 간 것에 불과하지만, 그는 훨씬 더 먼 곳, 더 알려지지 않는 곳까지 간 것이니 말이오. 특히, 고려라면 내가 꼭 가고 싶은 나라인데, 그가 먼저 갔구려. 대단한 사람이오.”
“네, 그분은 일본인 뿐 아니라, 저희들에게 참으로 친절했고, 저녁에는 은밀히 웅천의 어른들과도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조선의 관원들에게 들킨다면 아주 큰 일이 일어나겠으나, 불행 중 다행은 그 지역 대부분은 일본군이 점령하여, 조선인 관원들이 이미 빠져나갔고, 통제할 능력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레고리오 신부가 조선인들을 만나는 것은 일본인들에게도 그리 반가워할 일은 아니었답니다.
이렇게 일 년여의 시간이 흐른 후, 그리고리오 신부는 일본에 있는 예수회 본부의 지시도 있고, 선교에 필요한 물건들도 가져오기 위해 일본에 가야할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는 고아인 저에게 일본에 함께 가자고 말했습니다.
저는 일본에 가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그레고리오 신부와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저의 스페인어 실력이 늘었고, 기독교에 대한 기본 교육도 받아기에, 그분도 저를 필요로 했습니다.
한편, 몇 개월 전에는 한양에서 온 권성빈이라는 형이 우리와 합류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형은 장군 아들이었습니다. 1581년생이니, 저보다 세 살이 많아, 당시 열세 살이었습니다. 1593년 가족과 함께 있는 가운데 인질로 생포되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조선 땅에서 전쟁을 하면서, 상대방 제압의 효과적인 방법으로 먼저 인질을 잡아갔습니다. 그 중에서도 장군의 아들을 잡아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장군은 전장에 있고, 상대적으로 가족들은 무방비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잡아가는 것은 아주 쉬웠고, 가장 효과적인 교란작전 중 하나였습니다. 이렇게 권성빈 형처럼, 다른 장군의 아들들도 일본에 잡혀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레고리오 신부는 저희들에게 아주 잘 대해줬습니다. 일본인들과 조선인들 간의 관계가 아닌, 이해관계가 없는 이방인들 간이라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신부께서는 국적과 신분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천주 아래서 모두는 자녀, 형제라는 개념에 투철했습니다. 이리해서 저희 셋은 함께 일본으로 가는 배에 탔습니다.
저희 일행은 진해를 떠난 지 얼마 안되어 대마도에 도착했고, 대마도주의 집에 도착, 그의 부인께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레고리오 신부는 그녀를 마리아 자매라고 불렀는데, 그녀는 어린 저희들을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자신의 집에서 일을 하지 말고, 대신 그레고리오 신부와 함께 떠나도록 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 유키나가처럼 기독교도였으며, 그레고리오 신부가 저희들이 기독교 선교에 크게 쓰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제안함에 따라, 그렇게 하도록 승인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저희들을 규슈의 나가사키에 와있는 수만 명의 조선인들을 상대로 하는 포교사업에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와 함께 성빈 형은 장군의 아들답게 모든 면에서 제가 배울만한 면모를 보여줬습니다. 뼈대가 있는 집안의 자손인 그는 언젠가 조선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보다는 늦었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도 아주 빨리 이해했습니다.
저희들은 마리아의 집에 약 한 달 간 머물렀고, 성빈 형이 먼저 신부와 함께 그 집을 떠났고, 다시 몇 달 후에, 저도 그 집을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와 성빈 형은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아리마 학교에서 다시 만났고, 본격적인 예수회 교육을 받았습니다.”
일본에는 도미니꼬회, 프란시스꼬회, 아구스띠노회, 예수회 등 기독교의 여러 종파 소속 선교사들이 있었는데, 저희들과 같이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들은 마침 교육을 강조하여 교육제도를 잘 확립해온 예수회에서 담당했기 때문에, 저희들같이 기독교 교육을 거쳐 서품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회 소속이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석희는 스스로 말을 끊었다. 세르반테스가 자신의 문학세계를 길게 이야기할 때, 자신도 잘 알아듣지 못 했듯이,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세르반테스가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긴 대화에도 불구하고 딸 이사벨과 훈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후의 햇살은 또 다른 벽을 비추고 있으나, 어느새 힘은 약해져 있었고, 서재는 점점 어두워졌다.
“괜찮소. 계속 이야기하시오. 나는 집중해서 듣고 있소. 아주 흥미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소”
주저하면서 말을 끊은 석희에게 세르반테스의 반응은 의외였다. 세르반테스에게는 석희가 말하는 모든 게 흥미로웠던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에서 기독교 사제들로부터 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조선인을 상대로 포교에 힘쓰다가 여기 스페인에 오게 되었다는 말이군.”
“네, 이야기는 아주 깁니다만, 대략의 내용은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럼, 그 이야기를 해주시오. 그 먼 곳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는 중에 일어난 모험담 말이오. 조선에서 일본으로 간 이유는 알게 되었고, 이제는 여기까지 온 사연과 오기까지의 모험에 대해 듣고 싶소.”
모험이라는 말을 하면서 세르반테스의 눈이 다시 빛났다. 칠십에 가까운 나이지만, 그가 갖고 있는 강력한 호기심은 그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일상보다는 먼 나라,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일일수록 그의 관심은 더욱 커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