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짐을 챙겨 집으로 향하면서 상중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주 통화 하지는 않지만, 일본으로 갈 때는 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던 그였다.
“그래, 일은 잘하고 있어?”
상중의 아버지는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그의 안부를 물었다.
“안 바쁘신가 봐요? 바로 전화를 받으시게.”
“바쁘지만 하나뿐인 아들 전화는 바로 받아야지.”
아버지는 늘 다정한 사람이었다. 말도 부드러웠고, 늘 사람의 마음을 잘 살펴보는 사람이었다. 가끔 본인이 직접 작성한 자작시를 보내곤 했는데 꽤 좋은 시라 그걸 읽을 때면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빠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머니 뵈러 갑니다.”
“.......그래”
아버지는 항상 어머니 말만 나오면 말을 삼켰다. 알 수 없었다. 아버지가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어머니가 결혼을 한 것도 아니었다. 헤어졌을 때 아이 가진 것을 알았고, 어머니가 홀로 키우긴 했지만 그 안에 연락을 안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각자 살며 그를 키웠다. 왜 아버지 호적에 오를 수 없고, 아버지를 일본에서만 만날 수 있고, 한국에 가서는 아는 척을 하면 안 되는지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가 <할아버지가 허락하실 때까지 안 돼>라는 말에 납득했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왜 이렇게 사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익숙해서 그러냐 물었을 때도 아니라고만 하고 답을 하지 않았었다. 문젠 아버지도 어머니에게 적극적으로 함께 살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두 사람에게 틈만 나면 묻지만, 그 질문에 단 한 번도 대답한 적이 없는 두 사람이라 기면은 거의 포기 상태였다.
“어머니께 전할 말 없으세요?”
“내일 공연 축하한다고 전해주거라.”
“엄마가 공연해요?”
아버지는 말을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엄마가 유명해지면서 아빠가 엄마에게 직접 연락하는 일이 없었다. 유명세 때문에 그런 건지 알 수는 없었으나 늘 상중을 통해 안부를 전했던 사람이었다. 근데 그도 모르는 엄마의 소식을 아는 걸 보면 놀라웠다.
“잘 다녀오거라. 몸 상하지 말고.”
잠시 말이 없던 아버지는 먼저 전화를 끊었다. 상중은 전화를 끊고도 아버지와 어머니 생각을 하다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 기면이 횡단보도 앞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놀라 그의 앞에 차를 거칠게 세웠다.
“몹니까? 그렇게 해외 가는 게 신납니까?”
“한 시가 급하니까 나왔지. 근데 오늘은 요란한 차가 아니네.”
“공항 주차장에 얼마나 세워놓을지도 모르는 데 애마를 그런 곳에 둘 수 없죠. 근데 전화하시죠.”
“사랑이랑 통화했어.”
“귀요미 율동은 봤습니까?”
“시간이 없어서 못 봤어. 해결되면 가야지.”
기면은 말을 하면서도 몸 둘 바를 모르는 사람처럼 목소리가 작아졌다.
“질문 있습니다. 사적인 질문입니다.”
“한 개만 받을게.”
“별거가 익숙해져서 그냥 이혼이나 재결합 없이 계속 이렇게 사시는 겁니까?”
“꽤 어려운 질문을 하네.”
“한 개 받으시겠다고 하셨으니 하셔야 합니다.”
기면은 생각에 잠겨 등받이에 기댔다. 뭐라 말할 것인지 정리하느라 오래 걸리는지, 스스로 답을 찾고 있어서 오래 걸리는 지는 확실하지 않았으나 기면은 꽤 오래 답을 하지 않다가 한 참만에 입을 열었다.
“익숙함은 아니야. 이런 삶이 익숙해질 수는 없지. 나나 지희나 우리 사랑이 모두 익숙해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야.”
“그럼 왜요?”
“이렇게 사는 가정마다 다 각자의 이유가 있겠지만, 나의 경우 지희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야. 나랑 함꼐 하면 지금보다 더 많은 부분을 지희가 포기하고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 그래야 하거든. 그래서 지희를 위해 이런 삶을 사는 거야. 사랑이한테는 미안하지만 난 말이지, 엄마가 행복하지 않으면 아이가 행복해질 수 없다고 생각해. 지희가 행복한 선택을 한다면 어느 쪽이든 다 받아드릴 생각이야.”
기면의 말에 상중은 동감할 수 없었다. 솔직히 자식 입장에서 정말로 행복한 엄마 밑에서 자랐지만 그렇다고 그가 불행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남들과 동일한 모습의 가정이 갖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었다. 이걸 행복으로 말하자면 불행은 아니지만 남들만큼 행복했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상중이 심통이 나서 그에게 쏘아붙이자 기면은 그의 얼굴을 봤다. 생각해보면 그의 가정사와 기면의 가정사가 꽤 닮아 있기도 했다. 상중의 말대로 사랑이에게는 그래도 이건 아닌 삶일지 모른다. 하지만 늘 와야 하는 아빠가 늘 오지 않는 삶이, 그 때문에 속앓이하며 우는 엄마의 모습이, 오지 않아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 더 아닌 삶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지희가 웃으며 반기지는 않지만, 그래도 약속한 날은 반드시 만날 수 있는 아빠고, 지희가 그 때문에 울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했다.
*
구형사와 박형사에게 뒷일을 맡긴 곽과장은 나이든 아저씨와 어울리지 않는 예쁜 포장지를 들고 한국대 역사학과 남궁지희박사의 연구실을 찾았다. 기면이 쓰러져 오랫동안 못 깨어났을 때 병원에서 본 이후로 처음이었다.
한달이었다. 병원에서는 그가 <잔다>고 했다. 언제 깨는 거냐 물어도 병원에서는 모른다고 했다. 기면 자신이 선택할 일이라고 했다. 어쩌면 그 말에 지희가 기면을 원망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곽과장도 슬슬 기면에게 화가 난 참이었으니까.
- 오늘도 오셨네요.
곽과장은 거의 매일 기면의 병원에 들렸다. 혹시 오늘은 깨어났을까 궁금해서였다. 하지만 지금도 그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지희는 쇼파에 기대어 앉아 불뚝 나온 배를 만지며 노트북을 노려보고 있었다.
- 여기서 일하시면 힘드시지 않나요? 아기도 불편할 거 같은데요.
- 안 하면 그간 공부한 게 수포로 돌아가니 어쩔 수 없죠. 엄마 아빠를 잘 못 만난 이 녀석 복이겠죠.
냉랭하게 대답하는 듯 했으나 그녀도 스스로 많이 지쳤다는 게 느껴졌다.
- 저 녀석 깨어나도 또 잠들어 버릴 저녁이니 저랑 잠시 나가시죠. 식사는 하셨나요?
- 네. 지하 식당이 잘 되어 있어서 거기서 먹었어요.
- 그럼 좀 걸으시죠. 많이 불편해 보이시는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자신이 연신 배를 문지르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지희는 놀라서 죄송하다 말하며 얼른 손을 뒤로 감췄다. 곽과장은 험악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으며, 아내가 만삭일 때 방 걸레질을 하다가 갑자기 자기 얼굴에 걸레를 던진 적이 있어 만삭일 땐 뭘 해도 화가 날 정도의 통증이라는 걸 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병실을 나온 두 사람은 편의점에서 따뜻한 음료를 하나씩 사 들고 병원 주변을 거닐었다.
- 박사과정 밟고 계신다고 하셨죠?
- 네. 논문만 남았어요.
지희의 말에 곽과장은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힘드시겠네요 하기에는 정말 힘든 상황이었고, 잘 되었으면 좋겠네요 라고 말하기에는 잘 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기면이 지금이라도 깨어나면 답할 말이 있겠지만 안 깨어났기에 할 말이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그는 <죄송하다>고 말했다.
- 미안해 할 사람은 안에 있는 데 반장님이 대신하시면 안 되죠.
- 부하를 잘 다루지 못한 제 잘 못도 있습니다.
- 처음 쓰러졌을 때 사과한 거로 이미 충분합니다. 이제 그런 마음 안 가지셔도 되요. 지금은 미안하다 해야 할 사람이 따로 있으니까요.
- 일어나면 바로 이야기할 겁니다.
- 그땐 제가 없겠죠.
곽과장이 놀라서 그녀를 봤다.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봤다.
- 안 그래도 오시면 부탁드릴 게 있었어요.
곽과장은 불길한 기운에 뭐든 들어드리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희는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는지 말을 이어나갔다.
- 저 사람 좀 부탁드려요. 더 이상 옆에 있고 싶지 않아졌어요.
곽과장은 이 상황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인사를 하고 병원 안으로 사라지는 지희의 뒷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만 봤다. 정말로 지희는 그날 밤 이후, 병원에 단 한 차례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 달이 더 지나서야 병원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품에 사랑이를 안고 서였다. 그녀는 기면의 품 안에 사랑이를 안겨주고는 한 달 전보다 더 차가운 말투로 기면에게 할 말만 했다.
- 네 딸이야. 태명 그대로 사랑이라 이름 지었어. 그래도 네가 아빤데 네가 지어 준 이름으로 해야 할 거 같아서 그렇게 지었어. 아기한테 아빠가 누군지 소개시켜줘야 할 거 같아서 왔어. 다음엔 안 올 거야. 애기가 보고 싶으면 일어나서 찾아오던가 해. 너랑 나는 끝이지만 아이랑은 아니니까 보게 해 줄게. 난 친정에서 지내. 아이가 클 때까지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어. 간다.
창밖의 날씨보다 더 차갑게만 느껴지던 그녀의 말이 끝나고 지희는 바로 아이를 안아 밖으로 향했다. 기면이 깨어난 건 그때였다. 하지만, 기면은 몸이 안 따라줘서인지 아니면 이미 다 알고 포기한 상태인 건지 눈을 뜨고도 멍하니 벽만 바라보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그게 곽과장이 본 두 사람이 함께 한 마지막 순간이었다.
“실례합니다.”
연구실은 책으로 가득했다. 책장에 책이 많아서 그런 건지, 서적을 찾아보느라 그런 건지 알 수 없으나 긴 책상 위에 꺼내져 있는 책이 많았다. 줄 맞춰 놓여있는 게 지저분하게 보인다기보다 정리가 잘 된 느낌이었다. 기면이 신혼일 때 집들이를 가 정리가 잘 된 집에 놀라며, 이건 기면이 아니라고 확신했는데 역시나 지희였었다.
“어서오세요.”
“별거 아니지만 유명한 곳이라 해서 준비했습니다.”
“어머! 이거 학생들한테 꽤 유명한 곳인데 잘 먹겠습니다. 차는 뭐로 드릴까요? 커피 어떠세요?”
곽과장은 잠시 고민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카페인만 먹으면 잠을 자지 못해서였다. 곽과장도 형사시절엔 밤낮 구분 없이 하나에 꽂히면 해결이 될 때까지 잠도 잊어가며 일을 했었다. 하지만 동료 형사가 죽고, 기면이 미쳐 날뛰며 잠도 안 자고 다니더니 결국 병을 얻는 모습을 본 후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잠은 잘 챙겨서 잤다.
“카페인 없는 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귤차로 드릴게요. 얼마 전에 조교친구가 제주도 갔다 와서 귤차를 사왔는 데 맛있더라고요.”
지희는 귤차를 2잔 타와 곽과장 앞에 놓으며 그 앞에 앉았다. 두 사람은 귤차를 한 모금 음미하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면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를 듣고 믿지 않았는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그게 길의 표지판이 될 거 같습니다.”
“이번에 한강 사건이랑 흑사회 회장이 죽은 거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그것도 그거지만, 일본에서 저희와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전범기 업이 죽은 거 때문에 그러는군요?”
“알고 계셨습니까?”
“지금 조사하는 게 관련 있어서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근데 제가 수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면씨가 하는 일과 연관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럴만 합니다. 혹시 저희가 알아야 할 정보가 있을까요? 기면이 후배 형사와 조사하러 가긴 했는데 저희쪽도 준비를 해야 할 거 같아서요.”
지희는 기다렸다는 듯 책상 위에 올려 놓은 복사물을 가지고 와 곽과장에게 넘겼다. 쇼와 55년(1980년)도 5월에 작은 단신으로 난 기사였다. 일본어는 잘 모르지만 한자는 알고 있는 터라 대략적으로 무슨 내용인지 파악은 갔다.
“화재사건으로 죽은 거 아닙니까? 이게 VIP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도쿄 유곽촌이 화재가 빈번했던 지역이라 그러려니 하고 그쪽에서도 단신 기사로 빠진 거 같아요. 근데 이 화재사건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있었어요.”
“산구의교(山口 義教) 라는 사람입니까?”
곽과장이 기사에 있는 이름을 한자 그대로 음독하며 물었지만, 지희는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야마구치 요시노리(山口 義教)라는 사람이에요. 도쿄 유곽촌 대부이자 과거 위안소 관리인이었던 자죠.”
“위안소요?”
“눈치를 채셨는지 모르겠지만, 사건에서 피살된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이 있어요. 과거에 위안부 모집이나 운송, 관리 기타 등등의 업무를 맡았었죠. 그중 야마구치는 위안부 관련된 사람 중 가장 먼저 죽은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후손이 아니라 당사자 본인이에요.”
“일부러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사람들을 죽인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과거에 그런 일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죽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그들은 대부분 위안부와 관련한 아주 안 좋은 발언을 쉽게 했었고요, 그 예시로 한강 사건에서 죽은 옥순씨입니다.”
“그럼 다시 돌아가서 질문드리겠습니다, 야마구치가 단순한 화재 사건으로 죽은 게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사건을 조사했던 기자님과 통화를 했어요. 그 기자님은 꽤 믿을만한 분이시거든요. 과거에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기사화한 기자님이에요. 그분께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 데요, 당시 한국에서 광주항쟁이 벌어져 기사가 아주 작게 나가기는 했지만 의심스러운 사건이라고 했어요.”
지희는 바로 말을 잇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사체에서 석유냄새 같은 게 진동했데요. 건물 전체가 아니라. 그리고 화재 현장에서 불이 시작된 곳이 건물 어느 부분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했어요.”
“일부러 사람에게 기름을 뿌려 불을 질렀다는 겁니까?”
“신기한 건요, 일반 화재 사건에서 사람이 불에 그을린 흔적이 아니라고 했어요. 기자님이 하도 이상해서 따로 실험을 하셨는데, 몸 안에서 시작된 불이라고 했어요.”
“몸 안에서요?”
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곽과장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몸 안에서 불이 났고, 사체에서 석유 냄새 같은 게 진동했다면, 집 안에 석유를 부어 몸에 가득 채운 후 불을 질렀다는 말인 건가 싶었다. 왜 굳이 그렇게 번거로운 짓을 한 것일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죽은 후에 또 죽인 거네요.”
“네.”
“왜 그랬을까요?”
“쇼와 55년이면, 야마구치는 늙은 할아버지였을지 모르지만, 위안소에 끌려갔던 사람은 중년이었을 거에요. 이건 제 생각인데, 피해자가 직접 가해자에게 복수를 한 경우가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 말하곤 지희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군위안부 증언집이라는 책을 가져와 표시해 놓은 페이지를 곽과장에게 보여줬다.
<부산에서 얼굴을 가리고 손엔 장갑을 끼고 다니며 밥을 빌어먹던 소녀를 봤어. 그 아이가 내가 일하던 국밥집 앞에서 붉은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서 있더라고. 유심히 보니 내가 위안소에서 받았던 그 돈이었어. 그래서 주인아주머니가 안 계셔서 그 아이를 들어오라고 하려는 데 막 도망가는 거야. 그래서 얼른 따라가 붙잡았지. 근데 그 아이 손목 위로 뼈가 보일 정도로 피부가 녹아 있는 거야. 놀라서 그 손을 놓아버렸지 뭐야. 그게 제일 후회가 돼. 분명 그놈들이 한 짓일 텐데. 같은 고생한 내가 그 손을 놓아 버렸으니 얼마나 더 가슴 아플 거야. 꼭 만나서 사과하고 싶어.>
“사람한테 불을 지른 겁니까?”
“아무래도 병에 취약한 공간이라 병에 걸린 사람이 많았겠죠. 특히 성병에 가장 많이 노출이 됐을 텐데 당시에 치료 방법이 606호 주사밖에 없어서 그걸 맞고 죽은 사람도 있다는 기록도 있어요. 치료 약이 치료보다는 죽음으로 이어진다면 치료해질 이유가 없었겠죠. 돈만 드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을 불태웠다는 겁니까?”
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전쟁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병에 걸린 성노예들을 데리고 다닐 이유가 없었어요. 짐일 테니까요. 병만 걸려도 사체가 쌓인 구덩이에 밀어 넣어 불을 질렀다는 증언 기록도 간혹 발견되기도 하고요. 패전 직전에는 위안소 흔적을 지우라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해요. 그래서 몇몇 부대는 위안소를 불 지르고 도망갔다는 기록도 있어요.”
이야기만 들어도 곽과장은 화가 났다. 이런 이야기에 대해 관심이 없어 모르고 있던 자신한테 화가 난 것도 있었지만,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에 악마 짓을 하고도 죄책감을 안 느끼는 이들에게도 화가 났다.
“제 생각인데요, 증언집에 나온 검은 옷에 뼈가 보일 정도로 피부가 녹아 있었다는 분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야마구치를 죽인 거 같아요.”
지희의 말에 곽과장은 동감했다. 하지만 불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게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혹시 야마구치라는 자가 죽고 더 죽은 자가 있습니까?”
지희는 핸드폰을 켜 기자한테 추가로 받은 단신 기사를 곽과장에게 보여줬다. 역시 불로 인한 사망사건이었다.
“기자님의 얘기로 소문에 야마구치가 패전 후 돌아왔을 때 2명의 남자를 데리고 왔다고 해요. 그게 지금 기사 속의 남자들이고요. 전쟁이 끝나고 일본으로 넘어와 공창제도를 폐지했던 시기에 적선지대(赤線地帶)라는 합법적인 유곽촌을 만들어 운영해 부귀영화를 누린 게 야마구치 일당이랍니다. 처음엔 저급한 유곽을 운영하다가 야마구치가 재물과 권력에 맛을 들이면서 VIP만 이용하는 특A급 유곽을 운영했다고 해요. 근데 그걸 반대한 사람이 그 두 남자예요. 형제처럼 지냈던 세 사람이 크게 싸우고 두 남자는 야마구치를 떠나 오사카에 유곽촌을 세워 대부가 되었다더군요.”
“원수지간이었겠네요.”
“그래서 야마구치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죽었을 때 원수지간이라 서로가 서로를 죽였다고 소문이 났다고 해요. 그래서 그 신문 기사도 단신으로 나고, 경찰에서도 내사 종결했어요.”
이해할만 했다. 같은 모습으로 죽었다면 야마구치가 당하고 야마구치 조직이 동일한 방법으로 오사카에서 범행을 저질러 복수했다고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80년대라면 그쪽도 과학수사가 크게 발달하지 않았을 테니, 내사 종결이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경찰에서 서로가 죽였다 판단하는 사건을 교수님은 아니라 생각하는 이유가 뭡니까?”
“오사카 사체도 도쿄 야마구치 사체와 동일한 방법으로 살해되었다더군요.”
“야마구치 일당이 동일한 방법으로 처리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지희는 이야기를 하며 컴퓨터로 향했다.
“야마구치한테는 104보병연대 위안소 장부와 옛날에 작성한 일기가 있었는데 그게 없어졌다고 유곽에서 잡일을 맡는 아이가 증언했다더군요. 아무래도 오이란 견습생이었겠죠. 청소를 비롯한 유곽 어르신의 시중을 드는 아이들이니 모르는 게 없었을 거예요. 기자님 추정으로는 사람을 태울 때 같이 태운 거 같다 하시는 데, 제 생각은 달라요.”
지희는 이야기를 하며 컴퓨터 파일을 출력해 곽과장에게 전달했다. 각 연도별로 죽은 날짜와 과거 소속 부대와 직급이 적혀 있었다. 총 7명으로 104보병연대 장교 출신이었다. 갑자기 뒷목의 서늘함을 느낀 곽과장은 손으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혹시 모두 전소한 겁니까?”
곽과장은 다시 죽은 자들의 사망 날짜를 확인했다. 야마구치가 죽은 후 5년 뒤부터 1년에 1명씩 죽어 나갔다.
“왜 5년을 쉬었을까요?”
“접근이 쉽지 않아서 그랬던 거 아닐까 생각해요. 죽은 7명 중 절반은 자위대 소속으로 재입대하여 지휘관으로 활동했고, 몇 명은 육상자위대 고등공과학교 강사로 활동한 사람들이고 합니다.”
“정년을 채우고 제대했어도 젊은 남자와 다르지 않은 힘과 공격기술이 있었겠네요.”
“지휘가 높은 사람들이라 접근할 방법을 찾았을 수도 있고요. 문제는 91년 이후로 다시 잠잠하다 최근 7년 전부터 사건이 시작되었는데, 이제부터는 가해자가 아닌 후손들이 죽어간다는 거예요.”
“살해자가 동일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건가요?”
“위안부가 살아나서 복수를 한 거라면 나이만 생각해도 이미 생존 여부가 반반인 시기이기도 하고요.”
“그자가 자신을 대신할 사람을 키운 거라면 굳이 가해자 당사자를 죽일 필요가 없겠죠. 말씀하신 장부에 적힌 사람도 이미 죽어 없어진 시기기도 하고요. 목표가 변질된 겁니다. 복수에서 심판으로.”
곽과장이 마음이 급해졌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지희에게 물었다.
“혹시 다음 타깃이 누구일 거라 예상되십니까?”
지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즉시 답했다.
“하벅교수요. 지금 일본에 도착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곽과장은 인사를 하고, 지희가 준 자료를 챙겨 바로 서를 향해 달렸다. 정말 다음 타깃이 하벅이라면 이건 한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막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