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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군인들의 아랫도리 쓰레기통으로 이용당한 후에는 일어나 앉아 있을 힘조차 없었다. 방안에 조바(帳場)가 주먹밥을 한덩이 던져주었지만 먹을 수도 없었다. 아침에 던져준 주먹밥도 점심에 던져준 주먹밥도 먹을 시간 없이 군인들이 쳐들어와 방안에는 주먹밥이 세개나 굴러다녔지만 그 어떤 것도 손을 뻗어 먹을 수 없었다. 눈물이 났다. 배가 고픔에 저게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또 굶으면 죽도록 맞을 생각에 두려워 억지로라도 먹어야 하는 압박감에 죽을 것 같았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도망갈 기운도 없게 만들어 도망칠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는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은 죽음뿐이었다. 유월은 흐느껴 우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온몸을 휘감은 통증에 흐느낌마저도 온 힘을 다해 참아야 했다. 유월은 남은 힘을 다해 서러움을 참았지만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눈물이 그녀의 얼굴과 머리칼을 적신 후 다다미 위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스며드는 눈물 속에 그대로 스러지듯 정신을 놓았다. 잠이 든 것인지 기절을 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위안소의 모든 위안부들이 잠인지 기절인지 알 수 없는 밤으로 깊이 빠져들어간 그 시각, 일본군용차가 모든 일본군을 싣고 위안소 앞에 멈춰 섰다. 잠시 후, 조바와 그의 일꾼들이 짐을 싸서 위안소를 빠져나와 밖에서 굳게 위안소 문을 걸어 잠궜다. 그리고 군용차는 그들을 싣고 떠나가며 위안소를 향해 폭탄을 쏘아댔다. 위안소로 향한 폭탄은 요란한 굉음을 내며 폭발해 통나무집을 불태웠다. 위안소 안에서 연기와 굉음에 깨어난 위안부들이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 했지만, 군용차는 멈추지 않고 그들에게서 가장 멀리 떠나갔다. 위안소는 그렇게 아이들의 비명과 함께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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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만이 훤히 보이는 호텔 스위트룸. 유월은 쇼파에 앉아 차(茶)를 우리며, 태블릿을 통해 호텔 CCTV 속 시게코(成子)와 재성을 지켜보고 있다. 그들은 로비를 지나 스위트룸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유월은 재성이 사라졌던 그날을 생각했다.
캘리포니아공대 인근 호텔 스위트룸은 어두컴컴했다. 유월은 방 안의 불도 켜지 않은 채였다. 커튼으로 빛마저 가려 방안은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어둠이 유월의 머릿속 같기도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하다 못해 깜깜했다. 재성을 만난 그 순간부터 계획한 일이 그의 도주로 모든 세 수포로 돌아갈 것만 같아 불안했다. 솔직히 재성이 사라질 것을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 일찍 오리라 생각하지 않아 대처방안을 준비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유월을 만난 그 순간 탈북과 학업을 도와주면 유월의 일을 돕겠다 했지만 조국과 가족을 버린 순종적이지 않은 눈을 가진 아이였다. 그러나 자신이 먼저 제안한 일을 쉽게 어길 아이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그녀는 길게 호흡을 했다. 지금 이 순간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좋았다. 생각도 멈춰야 했기에 그는 자신의 호흡에만 집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서야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청바지에 캘리포니아공대 마크와 레지던스 어드바이저(Residence Adviser)라 크게 새겨진 옷을 입은 남자가 마스크와 모자를 눌러쓰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안에 들어와서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유월이 앉은 소파 맞은 편에 자리를 잡은 남자는 불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일본인 여자와 함께 렌트카를 타고 동부로 향한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 여자라..... 관심이 없는 것 같더니 그것도 아닌가 보구나.
- 언제 도착할지 모르나 올 거 같습니다.
- 일정은?
- 미루는 게 좋다 생각합니다.
- 유리코와 타로만으론 안 되겠느냐?
- 타로도 실력이 있으나, 이 아이만큼은 아닐 겁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주머니에서 USB를 꺼냈다. 유월은 질문 대신에 남자를 빤히 봤다.
- 이곳에서 혼자 연구를 이어나간 모양입니다. 알약형 폭탄이고, 위력뿐만 아니라 작동방법도 현재 사용되고, 공개 예정인 폭탄의 형태와 매우 다릅니다.
- 네 생각은 어떠냐?
- 이걸 활용할 겁니다.
- 어떻게?
- USB에 담겨 있는 내용은 연구자료입니다. 프로그램은 컴퓨터 자체에 내장되어 복사 불가로 만들어 빼낼 수가 없습니다.
- 근데 우리가 어떻게 활용하겠느냐?
- 컴퓨터와 자동차를 교내 기증사이트에 올렸습니다. 자동차는 이미 매입자가 나왔고, 컴퓨터는 아직인 거 같습니다. 그걸 제가 구매하겠다고 연락했습니다.
- 프로그램을 삭제하지 않겠느냐?
- 완전히 폭파한다 하더라도 복원은 가능합니다. 프로그램 복원이 안된다 하더라도 연구자료는 반드시 복원될 겁니다. 그 자료를 기반으로 다시 연구해서 만들면 됩니다.
- 너만 믿으마.
유월은 과거를 회상하며 차를 한모금 마셨다. 곧이어 노크소리가 들리고, “룸서비스입니다.”라는 소리와 함께 호텔직원이 들어왔다. 남자는 유월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음식을 식탁에 정갈하게 깔았다. 유월이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앞에 앉자 남자는 그녀 앞에 마주 앉았다.
“복원을 잘 했더구나.”
“감사합니다.”
“이번에 사용할 거다.”
“타로에게 전달하겠습니다.”
“네가 직접 처리한다.”
남자는 유월을 봤다. 그녀는 아무런 답 없이 음식에 집중했다. 그런 유월을 바라보던 남자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하겠습니다.”
남자는 다시 유월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고, 써빙카트를 끌고 밖으로 향했다. 유월은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식사에 집중하며 도쿄만을 바라봤다. 노을을 품은 도쿄만은 빨갛게 물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