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깼는데도 눈을 감은 채 그대로 누워 있는 호림. 그녀는 어둠 속에서 들리는 빗소리에 집중했다. 아직까진 빗소리를 들으며 잠에 들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들리는 그릇 부딪히는 소리에 그녀는 눈을 떴다. 몸을 뒤집어 고개를 파묻은 후 서서히 다리를 천장까지 올려 물구나무를 섰다. 그리고 굽히고 있던 양팔에 힘을 주어 발끝이 천장에 닿도록 몸을 길게 뻗었다. 그것도 잠시 팔을 굽혔다 펴며 몸을 스프링같이 튕겨 침대 밖으로 몸을 던졌다. 침대 아래 두껍게 깔린 매트 위로 착지한 그녀는 목을 양옆으로 당겨 어깨와 목근육을 풀어준 뒤 거실로 나왔다. 늘 그렇듯 요리를 하고 있는 조음의 모습이 보였다. 2미터가 넘는 키에 미세한 근육 하나하나까지 발달해 영화 속 헐크를 떠올리게 하는 그는 어울리지 않게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를 뒤에서 끌어안는 호림. 둘은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고 그렇게 한 참을 있었다. 잠시 후, 구석에 있던 방문이 열리고 재성이 나왔다. 하지만 예전처럼 호들갑을 떨며 떨어지라고 하지 않고 거실 쇼파에 앉아 TV를 켰다. 호림은 그런 그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고 그를 빤히 봤다. 한국에 온 이후로 더 말이 없이 일만 하는 재성이 낯설었지만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의 표정이 터지기 직전의 시한폭탄 같아서였다.
조음이 음식을 다 차리자 호림은 식탁 앞에 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일찍 일어났네?”
호림이 재성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재성은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마마 모시러 가야 해.”
“마마 온 데?”
재성의 입에서 마마라는 말에 호림은 호들갑스럽게 토스트를 챙겨 재성의 곁으로 갔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오랜 기간 엄마를 기다린 아이처럼 행복해 보였다.
“좋아?”
“그럼 넌 마마가 온다는 데 싫어?”
“싫진 않지만 좋은 것도 아니야.”
재성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호림이 준 토스트를 입에 넣었다.
“그래서 몇 시에 오신데?”
“30분 있다가 나가야 해.”
“그럼 얼른 준비해야겠다.”
호림이 신나서 욕실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재성은 그녀가 왜 그렇게 기뻐하는 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매춘을 하던 아빠에게서 벗어난 건 마마덕분이지만 결국엔 말만 바꾸어 고급 매춘부의 삶을 살고 있는 것도 마마때문 아닌가. 절대 나아진 삶이 아닌데 그녀는 왜 그렇게 마마를 좋아하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마마의 도움으로 탈북도 하고 미국에서 하고 싶은 공부도 해서 좋았다. 하지만 그 배운 것을 사람 죽이는 데 사용하는 건 북한과 다를 바 없었다. 그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도망쳤는데 결국 그 일을 하고 있는 이 삶에 회의감이 들었다. 그래서 마냥 마마가 온다는 게 기쁘지 않았다.
뉴스를 보면서도 딴 생각을 하는 재성을 바라보던 조음은 호림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쪽에 자리 잡은 화장실 문을 두드렸으나 물소리로 듣지 못했는지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조음은 더 이상 문을 두드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익숙한 듯 호림은 나체임에도 문을 연 조음을 빤히 보며 몸에 거품질을 했다.
“왜?”
조음이 수화로 <장 보러 가야지 어디가>라고 말하자 그제야 가게에 물건이 떨어진 걸 깨달은 호림이 매우 아쉬워했다.
“알았어. 재성이한테 혼자 가라고 전해줘.”
조음은 호림의 말을 듣고 화장실 문을 닫고 나와 거실로 향했다. 속이 답답한지 얼음을 꺼내 와그작 와그작 씹고 있는 재성은 여전히 눈이 멍한 상태였다. 조음은 그런 그에게 다가가 <혼자 가>라고 말을 전했다. 재성은 고개를 끄덕이곤 화장실로 들어갔다. 조음은 그의 멍한 표정 안에 어떠한 마음이 자리 잡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묵묵히 뉴스를 보며 토스트를 먹었다.
재성은 화장실에서 금방 나와서는 방에서 모자만 챙겨 현관으로 향했다. 조음은 그가 움직이는 모든 소리에 집중하면서도 아닌 척 뉴스에 집중했다. 신발을 꺼내 신은 재성이 차 키 앞에서 잠시 멈칫하더니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밖으로 향했다. 세단을 끌고 나가는 모양이었다.
재성이 나가고 바로 먹고 있던 토스트를 내려놓은 조음은 재성의 방으로 향했다. 꺼지지 않은 컴퓨터와 놀라울 정도로 깔끔한 방안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방 안에 깔려있는 기운이 이전과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컴퓨터가 방을 스캔하는 것처럼 조음은 시선을 천천히 옮기며 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그의 가장 상단 서랍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열려 있는다는 걸 확인했다. 조음은 조심히 서랍을 열었다. 하드디스크와 USB가 가득한 서랍 안에 붉은색 일본 여권이 눈에 띄었다. 이미 사용한 가짜 여권이 가장 위에 있다는 건 그가 어디론가 떠날 계획이 있다는 거였다. 그가 그들 몰래 떠날지도 몰랐다.
*
15살 무렵 러시아로 유학을 온 재성은 기숙사 컴퓨터 앞에 앉아 프로그램 연구에만 열중하는 모범생이었다. 함께 유학을 간 전자전투병 교육생 3명은 러시아에서 즐길 문화는 즐기자며 밤에 일탈도 하곤 했지만, 재성은 단 한 번도 그들과 함께 한 적이 없었다. 그날도 재성은 그들이 외부로 식사를 나간 사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더욱더 눈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생각 상자에 갇힌 것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도망치고 싶다. 그러면 고향에 남은 가족은 어찌되는 거지?>
러시아에서 겪은 문화충격이 그를 자극한 거는 아니었다. 자본주의던 사회주의던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중요할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의 고민거리는 그게 아니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3살 무렵 배운 한국어는 충분히 구사가 가능했고, 아버지가 외국에서 들어온 손님을 통해 받은 영어가 적힌 책을 통해 다른 나라 언어를 익혔을 정도여서 온 가족의 기대가 그에게 쏠렸다. 그가 전자전투병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 것도 그의 아버지가 택시기사를 하며 만난 이들에게 쉼 없이 그의 영재성을 어필한 덕에 정부에 끌려가다시피 조국을 위해 교육을 받았다. 그가 좋은 성적을 받아 승급이 빨라질수록 대우는 달라졌다. 부모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응원과 격려는 하늘을 찔렀고 그는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허락받지 못했다. 그에게 허락된 생각은 오직 조국의 발전을 위해 그가 해야 할 지금의 일에 대한 것뿐이었다. 그가 생각을 할 자유를 얻은 건 북한을 떠나 러시아에 도착해서였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과 마주했다. 나 자신을 마주한다는 게 새로 배우고 익히는 것보다 어렵고 두려운 일인지 그는 처음 알았다. 함께 러시아로 온 동지들도 그와 같은 고민을 했다면 나누기라도 했겠지만, 그들의 고민은 재성과는 다른 거였다.
- 나누면 좀 나았으려나...
- 뭘 나눈단 말입니까?
재성의 룸메이트이지 전자전투병 교육을 함께 받고 있는 김이룡이었다. 그는 다른 동지들과 식사를 마치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 별거아입니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 연구 때문에 그래?
- 뭐가 있겠습니까?
- 동무는 너무 글공부만 하는 게 문제야.
이룡은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들어오자마자 그가 가장 아끼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 어데가십니까?
- 동무도 같아 갈꺼요?
- 어데 가시려고 그라십니까?
- 코스모스호텔 나이트.
- 가도 되는 겁니까?
- 가도 되지!
옷을 이미 갈아입은 플랫메이트이자 전투병 교육생동지인 강진혁과 강찬혁이 문 앞에 서서 그들을 바라봤다.
- 어서 재성동무도 준비하오.
재성이 뭐라 말하기 전에 이룡이 손사래를 쳤다.
- 우리 범생이 재성동무는 절대 안 가지.
- 가겠음다.
재성의 한마디에 그 자리에 있던 남자 3명이 모두 놀라 그를 봤다. 재성은 그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앞서서 그들이 말한 목적지로 향했다. 택시를 잡아 호텔 앞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동지들은 새로운 문화체험에 신이 나 있는 동안 재성은 멍하니 창밖만 바라봤다.
- 아, 맞다. 우리 재성동무는 나이가 안 되지 않소?
호텔에 도착해서야 재성이 자신들보다 어린 10대의 아이라는 게 생각난 그들은 재성을 빤히 봤다.
- 일없습니다.
- 혼자 돌아가도 되갔어?
- 이룡동무 너무 냉정하오!
- 10대 전용 나이트도 있다니 거기로 가시는 건 어떻슴까?
- 일없습니다. 세분이 즐기시기고 오시라요. 저는 갑자기 흥미를 잃었습니다.
- 조심히 들어가고, 나중에 봐, 재성동무. 꼭 문 열고 자야 해. 문 잠궈두면 못 들어가니까.
재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룡은 신이 나서 진혁과 찬혁을 데리고 나이트가 있는 곳으로 달음박질쳤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재성이 호텔을 빠져나가려 발걸음을 옮기자 짙은 화장을 한 여인이 그를 가로막았다. 그녀의 화장은 그녀의 진짜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짙고 야했다. 옷은 벗은 것에 가까울 정도로 걸치지 않지만, 그녀의 귀와 목을 장식한 심플한 액세서리와 높은 힐이 그녀의 맨살을 빛내주었다. 그녀는 손키스를 재성에게 보내며 손가락을 까닥여 인사했다.
- hi.
재성이 아시아인이라 그런지 러시아어가 아닌 영어로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러시아어로 <실례합니다.> 라고 정중히 거절하고 그녀에게서 비껴서자, 그녀는 다시 그를 막아섰다.
- 러시아말 잘하네.
- 당신의 접근을 거절할 정도의 실력은 됩니다.
- 난 데보치키(가장 낮은 수준의 매춘부) 아니야. 푸타나(최상급 엘리트 매춘부) 지.
재성의 말에 그는 멈춰서서 그녀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꽤나 예쁜 미소로 그를 바라봤다.
- 그 두가지가 다른 게 뭐죠? 제가 보기에 몸 파는 건 똑같은 거 같은데요?
- 걔네는 빚을 갚기 위해 일하지만, 난 돈을 벌기 위해 일하니까 완전히 다르지. 걔들은 즐기지 못하지만, 난 즐기거든. 그러니 너도 즐겁게 해줄 수 있어. 즐겁게 일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 당연히 너도 행복해지겠지.
그녀느 그윽한 미소로 그를 바라보며 그의 두 어깨에 자신의 두 팔로 그를 거의 감싸안았다. 하지만 재성은 그녀의 유혹보다 그녀가 한 말에 더 신경이 쓰였다.
<즐긴다....>
그는 한 번도 공부를 즐겨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먹는 밥도 걷는 걸음도 이곳에 이동했던 그 순간까지도, 설레여하는 동지들과 다르게 그는 단 한 순간도 즐긴 적이 없었다. 그녀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을 텐데도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 즐길 수 있나요?
- 그럼. 나랑 함께 하면.
- 행복해지나요?
- 그럼. 나와 함께 하면.
그녀는 그를 뚫어지게 봤다. 그녀는 그를 완전히 집어삼킬 듯 바라봤고, 재성은 그의 어깨에 있던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호텔방을 잡았다. 호텔 방 안으로 들어가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는 순간 그녀는 그를 밀쳐냈다.
- 200달러야.
재성은 그녀의 돈 이야기에 잠시 정신이 들었다. 돈의 금액 때문이 아니라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나> 라는 생각이 순간 떠올라서였다.
- 미안해요.
재성이 다급히 나가려 하자 그녀는 문을 거칠게 닫으며 그를 막았다.
- 이걸 벗겠다니까. 200달러면.
그녀는 이미 가슴 위까지 벗겨져 있는 옷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반응이 없는 재성을 바라보며 그녀는 옷을 가슴 아래로 내렸다. 속옷을 입고 있었지만 가슴이 훤히 보여 오히려 남자의 성욕을 자극하는 그런 옷이었다.
- 히터 좀 틀까?
재성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상체를 움직이며 아까보다 요염한 말투로 물었다.
- 어때?
- 내 생각이 중요한가요?
- 무슨 대답이 그래? 난 널 위해 벗었는데.
- 돈 때문이겠죠.
- 고상한 척 하지마. 너 때문이든 돈 때문이든 여기에 나랑 들어온 순간 넌 그런 인간이 아니니까.
고상한 척을 한 적은 없었지만 은연 중에 그녀를 경멸한 마음이 있어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두 손으로 가슴을 어루만지며 위아래로 흔들며 재성에게 답을 구했다. 재성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그녀가 듣고 싶은 답을 했다.
- 예쁜 가슴이네요.
듣고 싶은 말을 듣고 나서야 그녀는 더 예쁜 미소로 깔깔 웃었다. 그리곤 그를 방안 침대로 데리고 가 앉혔다.
- 처음이야?
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지만, 그 자신이 자신의 행동과 생각, 순간적 판단에 집중한 시간도 처음이라는 대답이기도 했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 자신을 소개해줘요.
- 특이한 손님이네. 하지만 재밌으니까 알았어.
그녀는 왼쪽 가슴을 주물렀다.
- 내 이름은 안나(АННА).
다시 오른쪽 가슴을 주무르며 아까와는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 내 이름은 라이사(РАИСА)
그리고는 안나가 말할 때는 왼쪽 가슴을 움직이며 안나의 목소리로, 라이사가 말할 때는 오른쪽 가슴을 움직이며 라이사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재성은 자신의 가슴에도 이름과 성별, 목소리와 성격까지 담아낸 그녀의 모습에 순간 눈물이 돌아 고개를 숙였다. 자신은 대체 그의 신체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그런 자신이 그녀보다 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 어머! 저 남자 봐 우리에게 감동했나 봐. 하긴 우리가 꽤 순종적이고 친절하지. 눈물 흘리는 것 같은데? 그래? 그럼 눈물을 멈추게 하는 방법이 있지.
여자는 가슴을 가지고 놀던 것을 멈추고 속옷도 완전히 탈의해 재성에게 다가가 그를 밀어 침대에 눕혔다. 재성의 위에 올라탄 그녀는 그의 손을 끌어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가 그의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주무르도록 했다.
- 안나랑 라이사가 너를 달래주고 싶데. 안나가 더 먼저 하고 싶나 봐.
재성이 무어라 반응이 나오기도 전에 여자는 그의 입안으로 그녀의 두텁고 물컹한 가슴을 밀어 넣으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재성이 그녀를 밀어 침대 위에 눕혔다. 여자는 재성의 이런 행동이 오히려 좋은지 까르르 웃었다. 재성은 그런 그녀의 생각과 다르게 그녀의 배 위에 올라타 그녀를 빤히 봤다. 그리고 무언가 결정을 내린 듯 아까와는 다른 날카로운 표정으로 변해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를 벗어났다. 그는 옷 안 주머니에 있던 전재산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 고마워. 200보다 많을 거야.
그의 그런 행동에 오히려 당황한 그녀는 그를 막아섰다.
- 궁금해서 그런 데 뭐야 너의 그 행동?
- 네 덕에 찾을 수 없던 답을 찾았어. 그에 대한 보답이야. 고마워.
재성이 문을 열려 하자 여자는 문을 다시 거칠게 밀어 닫았다.
- 그 답이 뭔데? 난 이 일을 해도 엘리트라 궁금한 건 절대 못 참거든. 말을 해줘야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 거야.
그녀의 확고한 표정에 재성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자신의 신체에 이름을 붙일 정도의 자존감을 가진 여자라면 기분이 상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자 재성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 탈북하려고.
그의 말에 당연히 놀랄거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너무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탁자에 놓아둔 돈을 챙겨 그의 품에 돌려줬다.
- 탈북하려면 이 돈도 필요할 거야.
재성은 그녀의 행동이 이상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전화기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반데르사(бандерша), 당신 오랜친구(старушка)가 찾는 사람 여기 있는 거 같아요.
여자의 말에 재성은 너무 놀라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그녀는 전화를 하며 그에게 윙크를 했다.
<대체 이 여자... 뭐야..?>
*
재성은 세단을 끌고 공항으로 향했다. 여전히 머릿속은 복잡했다. 마마를 만나고도 12년이 지났다. 처음엔 그에게 투자된 시간과 돈이 너무나 감사했지만, 결사단 업무를 하며 그 투자된 시간이 그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차라리 몰랐던 5년의 시간이 행복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그는 미국에서 만났던 여인을 떠올렸다. 한 번도 잊은 적 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흐릿해져 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찾아보면 힘들 거 같아 찾아보지 애써 찾아보지 않았던 그녀의 이름을 검색했다. 나루미 시게코(成海 成子). 그녀의 얼굴보다 그녀의 작품 사진이 더 많이 올라온 인터넷을 보며 그는 그녀가 더 그리워졌다. 그녀를 보기 위해서라도 조직을 떠나야 했다. 그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공항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재성의 차를 노크했다.
“여기에 세우시면 안 됩니다. 입국자 기다리시는 거면 단기주차구역을 이용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바로,”
재성이 바로 차를 빼겠다고 말하려고 하는 사이 직원 뒤에서 “잠시만요.”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휠체어에 탄 부르카를 입은 무슬림여성이 승무원의 도움을 받으며 재성에게 오고 있었다. 재성은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Vous êtes plus tôt que je ne l'avais prévu.(불어: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Le vol est arrivé plus tôt que le calendrier.(불어: 비행기가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어.)”
“모셔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송한데 앞 좌석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재성이 무슬림여인을 번쩍 안아 차에 태우고, 공항직원과 승무원에게 인사를 나눈 후 재빨리 차를 끌고 공항에서 빠져나갔다. 차가 공항을 빠져나와 서울로 한 참을 달리는 중에도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렇게 정적이 흐르는 차 안에서 처음 입을 연 것은 무슬림 여인이었다.
“생각이 많은 것 같구나.”
그녀는 유창한 한국말로 그를 걱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그런지 그 말도 차갑게만 느껴졌다. 마마라고 부르며 살았지만 진짜 엄마로 느껴본 적이 그는 없었다.
“어제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해서 불안해서 그럽니다.”
“잘 처리했을 텐데 너답지 않구나.”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니 정리가 되면 괜찮아질 겁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재성은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마마 곁을 떠날 것인지, 이대로 남을 것인지. 지금 이 길 위에 머물러 흐르는 대로 놔두는 건 지금까지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