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하다며 같이 가자는 이지를 힘들게 택시 태워 보낸 채원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힘없이 터벅터벅 걸었다.
자신은 똑바로 걷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걸음은 아슬아슬 위태로웠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현민의 웃는 얼굴, 화난 얼굴, 슬픈 얼굴들이 차례대로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가 당장이라도 나타나 웃어 줄 것만 같았다. 술을 마신 그녀의 머릿속은 어제 본 남자에 대한 공포심은 없어진 채 현민의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녀가 가장 떠올리기 싫어하는 현민의 얼굴은 이별을 고하던 그의 얼굴이었다.
이별하기 하루 전까지 만해도 평소와 둘 사이는 다름없었다. 그녀의 기억에는 분명 그랬다. 평소와 너무 똑같았기 때문에 채원은 현민과의 이별을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우리 사이는 ‘아무 문제없어’ 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 현민은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이별을 생각한 건 언제부터였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마음의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그렇게 일방적으로 정리하고 떠나갔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든 고통이었다.
적어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줘야 했다. 그것이 10년을 만난 사람에 대한 예의다.
그날 이후 채원은 두 번 다신 사랑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빌어먹을 술만 마시면 네가 보여. 아니! 사실은 시도 때도 없이 네가 보여. 너는 이제 내 옆에 없는데... 분명 없는데... 자꾸만 다시 내 옆에 네가 있어.'
채원의 큰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현민에게 전화하기 위해 휴대폰을 찾았다. 그녀는 술을 핑계 삼아 그에게 전화하고 싶었다.
다음 날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할 게 뻔했지만, 술만 먹으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맞다. 휴대폰 잃어버렸지.'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살짝 감았다.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어두운 공원길.
정적 속 봄의 냄새를 은은하게 풍기며 불어오는 바람 소리와 그녀의 작은 숨소리만이 들린다.
'몇 시쯤 된 거지. 시계도 안 차고 나와서.'
슬픈 마음을 애써 다독이며 감았던 눈을 뜨는 순간, 거대한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채원은 눈을 찡그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모든 것들이 하나씩 정지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가 새하얘져 가는 틈에 남자는 어느새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역시 똑같아. 용의자 복장이랑.'
채원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뭐야...?"
채원의 온몸은 두려움에 굳어 있었지만, 술기운 때문에 용기가 난 건지 자신도 모르게 남자에게 말을 툭 내뱉었다.
"........."
".....요."
하지만 술기운에 솟아오른 용기는 생각보다 아주 짧았다. 남자의 차가운 눈빛을 보자 공포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재빨리 '요'를 덧붙였다.
"........."
"........."
남자는 아무런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그녀 앞에 한쪽 손을 홱 내밀었다.
캭!
남자의 작은 손동작에 매우 놀란 채원은 눈을 꼭 감고 두 손으로 자신의 귀를 막았다. 그렇게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바람 소리만 들릴 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용기를 내서 꼭 감았던 두 눈을 뜨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남자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의 내민 손에는 잃어버린 채원의 휴대폰이 들려있었다. 그녀는 손을 덜덜 떨며 남자의 손에 있는 휴대폰을 살짝 잡았다.
"무서운가 보지?"
그 순간 남자가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남자의 말에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말하면 안 된다고 누군가 입을 본드로 붙여놓은 것만 같았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의 눈빛은 차가웠다.
"너는 날 처음 마주치는 게 아니야."
"........."
"얼마든지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무슨 배짱으로 이렇게 다녀? 그것도 술 먹고 이 시간에 혼자서 공원을?"
"........."
뜨거운 물속에 있다가 밖으로 나왔을 때처럼 채원의 온몸은 바들바들 떨렸다. 얼굴에는 두려운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공포가 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채원을 빤히 바라보다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얼굴을 가깝게 밀착시켰다. 그녀는 무척 놀랐는지 딸꾹질이 나왔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있나 보고 싶었지만, 채원은 고개를 돌릴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나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제발 한 사람만이라도...'
채원은 누군가 지나가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이 길을 혼자 걸어온 자신에게 화가 나고, 이 길을 혼자 걸어가게 만든 현민이 몹시 원망스러웠다.
남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남자를 바라보던 채원은 떨리는 동공으로 그의 시선을 쫓았다. 탁 트인 공원이 마치 깊은 산골짜기같이 보였다.
"가."
남자는 채원의 귀에 대고 차갑게 말했다.
"........."
"뒤돌아보지 말고! 멈추지도 말고! 뛰어."
"........."
"무조건 빨리 뛰어가! 절대 다른 길로 가지 말고."
남자는 채원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가. 빨리."
"........."
"안가?"
"........."
"안가냐고!"
"가, 가요."
채원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치며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극심한 공포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고 정신까지 몽롱해져가고 있었다. 술기운은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까지 들렸다. 발은 커다란 돌덩이를 묶어 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그녀는 떨리고 있는 다리를 힘겹게 떼며 한 발 한 발 걷기 시작했다.
남자가 갑자기 달려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그녀의 모든 신경은 남자가 있는 곳에 가 있었다.
두려움이 현민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고 있었다. 늦은 밤길, 그녀의 옆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오늘도 그가 함께였다면 이렇게 두려움에 떠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혹시 그리운 거야? 이런 와중에도? 원망이 아니라 분노 증오가 아니라 그냥 네가 그리운 거야, 나?'
두려움으로 인한 눈물인지 원망과 그리움에 대한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순간,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사 삭!'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란 채원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며 소리쳤다.
"왜, 왜요!"
"........."
채원의 목소리가 적막 속에서 크게 울리며 메아리쳤다. 그 후 정적이 흘렀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말없이 그 자리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옹."
고양이 한 마리가 그녀의 왼쪽 발을 '야옹'하며 핥고 있었다.
'이런...씨...!'
채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양이를 바라보다 다시 남자를 바라봤다.
어두운 데다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남자의 눈빛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 전 봤던 눈빛보다 더욱 차가워져 있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
그때였다. 갑자기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마음속에서 힘겹게 잡고 있던 무언가를 스르르 놓아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자 두려움조차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걸핏하면 나오는 눈물이 역시나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채원은 흘러내려 온 눈물을 닦으며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왜 나 보내주는 거예요?"
"........."
"납치 같은 거 뭐 그런 거 안 해요?"
"........."
"맞아요! 나 그쪽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왜 안 피하고,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다녔다고 생각해요? 왜요? 납치해요. 그냥! 납치해서 죽이든지 살리든지 하라고요! 차라리 그렇게 해줘요! 나도 이 괴로움 끝내고 싶으니까!"
채원은 참고 있던 무언가가 폭발한 듯 남자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치며 눈물을 왈칵 쏟았다. 남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머리를 헝클며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너 이렇게 운다고 그 남자가 돌아올 것 같아?"
남자가 채원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너 이렇게 힘들어해도 너한테 안 와."
"........."
"절대로."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며 채원이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누구 좋으라고 이러는 거야? 무서워서 바들바들 떨면서. 이 시간에 술 취해서 혼자 공원을 걸어 다니고! 울고!"
"........."
"너 이러면 그 남자가 다시 너한테 올 것 같아? 너 힘들어하는 거 보면 마음 아파서 다시 돌아오기라도 할 것 같으냐고!"
"........"
남자는 채원에게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녀는 남자에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
'아, 머리야. 아.. 진짜 죽겠네. 술을 미쳤다고 그렇게 마셔서.'
채원은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녀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부엌으로 나갔다. 술 먹은 후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갈증으로 입이 바짝바짝 탔다. 그녀는 냉장고를 열어 생수 한 병을 꺼내 컵에 따르지도 않고, 그대로 벌컥벌컥 마셨다.
'어떻게 된 거지. 어제 이지를 보내고 걸어간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순간, 주마등처럼 남자와의 기억이 떠올랐다. 생수병을 들고 있는 채원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납...치? 납치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미친! 내가 무슨 소리를 짓거린 거야. 그놈의 술만 마시면! '
채원은 자신이 술 마시고 내뱉었던 말 때문에 정신이 아찔했다.
'나 살아 있는 거겠지? 아니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니 그래도!'
채원은 생수병을 내려놓고 달려가 거울 앞에 섰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여기저기 만져봤다.
'살아 있으니까 내 모습이 보이는 거겠지? 죽으면 거울 속에서 자기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하던데. 그래,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나는 살아있어.'
-부르르르 부르르르
그때, 전화 진동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울리고 있는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맞다, 휴대폰.. 그 사람이 어떻게 이걸 가지고 있었던 거지? 공원에서 잃어버렸을 때 그 사람이 주운 건가. 도대체 그 사람이랑은 어떻게 된 거야. 왜 기억이 끝까지 다 안 나는 거냐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전화를 받자, 이지가 귀가 울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나 귀 안 먹었어!"
채원이 손가락 끝으로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말했다. 이지의 목소리 때문에 아픈 머리가 더욱 지끈거렸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너 별일 없는 거지? 괜찮은 거지? 호수공원에서 사건 터졌잖아! 그래서 내가 얼마나 걱정을 한 줄 알아? 그 시간에 네가 거기 있었을 것 같아서 불안해 죽겠는데 너는 전화도 안 받고! 그래도 문자 한 거 보면 별일 없는 거겠지 하면서도 불안하고! 문자야 범인이 보낼 수도 있는 거니까!"
이지는 채원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흥분한 목소리로 빠르게 내뱉었다.
"김이지, 무슨 소리야. 천천히 좀 말해봐."
"너 어제 헤어지고 집에 어떻게 갔어? 또 공원 가로질러 걸어갔지?"
"......응."
"새벽이었지?"
"...아마도."
"오늘 새벽 그 공원에서 일어났다고. 살.인.사.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