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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아카데미의 망나니
작가 : 최현우
작품등록일 : 2022.1.19

파멸이 예정된 게임 속 망나니 왕자에게 빙의했다.
전직 사기꾼의 화술과 계략으로 살아남아라!

 
01. 생텀행 급행열차 -3-
작성일 : 22-01-19 23:27     조회 : 292     추천 : 0     분량 : 6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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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아…”

 

 얼굴을 닦고 객실로 돌아온 온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게임 속에 들어온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나는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창문에서 한 번 더 떨어지면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나?

 

 ‘창문에서 떨어지는 건 마지막으로 미뤄두자. 원래 세계가 아니라 저승으로 돌아갈 확률이 더 높으니.’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해볼 만한 일들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떠오른 방법은 게임을 끝까지 플레이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과연 게임을 끝까지 진행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왕자님. 정말 괜찮으신 거죠?”

 

 앞서 보인 몇 가지 추태 때문에 샬롯은 여전히 내가 걱정인 모양이었다.

 어쩌면 생전 처음 보는 로이 킬버그의 진지한 모습에 당황했을 수도.

 평생 자기 마음대로 살아온 로이가 깊게 고민하는 모습이 측근들 눈에는 신기해 보일 수도 있었다.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샬롯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

 

 “안 괜찮으면? 샬롯이 뭐 해 줄 수 있는 거라도 있어?”

 

 하지만 이 저주받은 혓바닥은 한마디 감사 인사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나의 퉁명스러운 말투에도 샬롯은 이미 익숙한지 별달리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이골이 났다고 표현하는 게 더 옳겠지.

 

 “저는 가사 말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고민을 해결해드릴 자신은 없지만요. 고민은 남에게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고요.”

 

 “해결책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남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고? 그게 뭐야? 시간 낭비잖아?”

 

 “제 말을 믿고 일단 해보세요. 어서요.”

 

 “나 원 참.”

 

 나를 걱정해 준 샬롯에게 무례하게 굴어서 죄책감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지금 로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무례한 특성 때문에 망나니처럼 굴고 있었다.

 그 덕분에 샬롯은 자신이 섬기던 로이 왕자의 몸에 다른 사람이 빙의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나저나 현재 내 최우선 고민은 이것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게임오버된다.’

 

 칼리 황녀의 얼굴에 주스를 끼얹은 일이 잘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해결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클래시 킹즈를 많이 플레이해서 이 게임의 패턴에 익숙한 나는 직감했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두고 볼 것도 없이 전쟁으로 이어진다고.

 이 게임의 목표는 하나뿐이었다.

 

 ‘국가 간의 전쟁을 막는 것’

 

 국가 간의 전쟁을 일으킬만한 일을 하거나 막지 못하면 그 순간 게임오버였다.

 물론 잘못을 수습할 기회를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전쟁이 발발한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게임오버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게임오버가 되지 않았다는 건 아직 상황을 수습할 기회가 있다는 의미인가?

 

 “황녀와 화해하고 싶은데. 뭔가 좋은 아이디어 없어?”

 

 나는 샬롯에게 차근차근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것이 지금 내가 달성해야 할 최우선과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일이 전쟁으로 이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고 전쟁을 막지 못하면 그 순간 게임오버가 된다.

 게임에 빙의한 상태에서 게임오버를 맞이하면 과연 재도전의 기회가 주어질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냥 가서 사과하면 되지 않을까요? ‘내 실수였어. 미안해.’하고요.”

 

 내 고민을 듣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샬롯은 희망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건 망나니 로이 뿐만 아니라 그 몸에 빙의한 나도 조금 열받을 만한 답변이었다.

 지금 무슨 태평한 소릴 하는 거야?

 제국 황녀의 얼굴에 주스를 붓고 모욕까지 한 마당에.

 

 “샬롯. 네가 말한 사과라는 게 말 그대로 가서 사과하고 오라는 거지? 내 머리랑 수족을 베어서 상자에 담아 보내는 게 아니라?”

 

 내 감정을 대변하듯 제멋대로 움직이는 무례한 혓바닥도 샬롯에게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말로 사과하면 그 사과를 받아주겠냐는 뜻이야! 상대는 제국의 황녀라고! 그 황녀에게 대놓고 시비를 건 상황이라고! 정신 차려!”

 

 내 착각인가?

 【무례한】 특성의 영향을 받는 내 혓바닥이 어쩐지 조금 비굴해진 기분이었다.

 아니 기분 탓이 아니었다.

 기세 좋게 황녀에게 꼬리를 말고 도망친다며 조롱할 때는 언제고, 지금 내 혓바닥은 샬롯이 마치 신성모독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굴고 있었다.

 눈에 띄게 달라진 태도의 차이를 인식한 순간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로이 킬버그의 숨겨진 특성 【비굴함】을 발견했습니다.>

 

 이 타이밍에 새로운 특성이?

 게임에서 숨겨진 요소를 발견하는 일은 보통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특성 이름부터가 【비굴함】인 데다가 바람직한 일로 얻은 특성도 아니었기에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상태창에 ???로 표기되던 특성이 몇 개 있었지.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

 《로이 킬버그》

 특성 : 【무례한】 【비굴함】

 ???(잠김)

 ???(잠김)

 ======================

 

 제기랄! 늘어났잖아!

 함정 특성이 하나 더!

 【비굴함】 특성을 가졌다는 것은, 【무례한】과 마찬가지로 로이 킬버그라는 캐릭터의 성격이 비굴하다는 의미였다.

 나는 특성의 자세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비굴함】이라는 글자에 시선을 집중했다.

 

 ===============================

 【비굴함】

 자존심이 밥 먹여 주나요?

 불의는 못 본 체하라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강자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불필요한 다툼을 피할 수도 있지만 이로 인해 비겁자나 겁쟁이라는 오명이 항상 뒤따를 것입니다.

 ===============================

 

 ‘불필요한 다툼을 피할 수 있다’라는 문구 때문에 【비굴함】을 좋은 특성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비굴함】은 말 그대로 비굴함이었다.

 사회에서도 비굴한 사람은 사귀기 꺼려지듯이 타인의 호감을 얻기 힘든 대표적인 비호감 특성이었다.

 특히 정반대 성향인 【의로움】 특성을 가진 인물과는 서로가 숨만 쉬어도 호감도가 깎이는 특성이었다.

 【무례한】과 【비굴함】의 두 가지 특성을 동시에 가진 캐릭터라니?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양아치라는 의미였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이건 다 샬롯 때문이야! 샬롯이 가서 사과하고 와!”

 

 양아치임을 증명하듯 두 가지 특성에 의해 한껏 격양된 말투로 내 혓바닥은 샬롯에게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저 때문이라뇨? 저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하는 말이야! 그 여자애가 로마니아의 황녀라고 미리 알려 줬어야지!”

 

 뻔뻔한 적반하장이었다.

 자신이 대국의 황녀에게 저지른 잘못을 만만한 하녀 탓으로 돌리려는 전형적인 양아치의 행태.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일단 사과부터 하세요. 사과를 받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그때 가서 하자고요.”

 

 내가 애처럼 억지를 부리는 와중에도 샬롯은 끝없는 이해심으로 나를 독려 했다.

 샬롯의 뻔한 조언에 나는 불만스럽게 쩝 하는 소릴 냈지만 딱히 뾰족한 해결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좋지?

 이런 상황에 황녀가 순순히 사과를 받아줄 것 같지도 않았다.

 애초에 로이는 왜 느닷없이 황녀의 얼굴에 주스를 부은 걸까?

 이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지도 모르니 나는 일단 그것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조금 전에 열차가 좀 많이 흔들렸나?”

 

 “네?”

 

 “아니 좀 전에 내가 실수로 황녀에게 주스를 쏟았잖아? 하지만 컵에 담긴 걸 쏟을 만큼 열차가 크게 흔들렸을 것 같진 않아서 말이야.”

 

 “그걸 실수라고 표현하기는 좀…. 대놓고 얼굴에 뿌리셨잖아요?”

 

 “말도 안 돼! 내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런 짓을 했겠어?”

 

 샬롯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머릿속의 많은 고민과 갈등을 대변하듯 그녀의 눈썹이 불안하게 꿈틀거렸다.

 샬롯의 눈은 자신이 모시던 왕자가 마침내 정신이 나가 버렸는지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왕자님. 큰일을 겪으셔서 놀라신 마음은 알겠는데요. 그래도 현실도피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요.”

 

 “현실도피 아냐! 그럼 샬롯은 내가 무슨 목적으로 황녀한테 시비를 걸었다는 건데?”

 

 “엘프 여성분을 꾀기 위해서라고, 분명 자기 입으로 말씀하셨잖아요?”

 

 “엘프? 거기에 엘프가 있었어?”

 

 “네. 황녀님과 엘프분이 서로 다투시는 중에, 엘프분의 편을 들어 주면 호감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셨죠.”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뭐, 실제로 하신 말은 좀 더 직설적이었지만요.”

 

 나는 내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뭐야? 그럼 이 모든 일이 엘프 여자애 한번 꾀어보겠다고 벌인 일이라는 말이야?

 로이 킬버그라는 캐릭터는 망나니라는 말로도 표현하기 부족한 인물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샬롯을 마주 보았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

 

 “누구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나지 누구겠어? 로이 킬버그! 이 미친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자기 이름을 원수의 이름처럼 부르짖으며 매도하는 모습을 제삼자가 보면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런 정신 나간 행동마저도 샬롯에겐 일상에 불과한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발광을 멈추기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제기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래서야 칼리 황녀와 화해하기 위해 변명할 말조차 떠올리기 힘들었다.

 내가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더 많았다면 이보다는 더 능숙한 해결책을 떠올릴 수 있었을 텐데.

 느닷없이 다른 세계에 내던져진 상황이라서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그래. 일단은 정보를 얻자.’

 

 나는 황급히 호주머니를 뒤졌다.

 로이 킬버그는 생텀에 입학하기 위해 여행 중인 왕자.

 그렇다면 분명 생텀의 학생수첩을 미리 받았을 것이다.

 학생수첩 속의 정보가 있다면 앞으로 닥쳐올 일에도 더 수월하게 대응할 수 있겠지.

 

 ‘어라? 없는데?’

 

 하지만 몸 어디를 뒤져 봐도 수첩처럼 보이는 건 없었다.

 게임상에서 학생수첩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었기에 나도 수첩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랐다.

 

 설마, 이름만 수첩이고 실제 형태는 다른 건가?

 

 내가 당황하자 샬롯이 물었다.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제기랄! 어디서 잃어버렸나? 학생수첩이 안 보이는데?”

 

 “학생수첩이요? 그건 제가 갖고 있죠.”

 

 “뭐? 그걸 왜 샬롯이 갖고 있어?”

 

 “왜냐뇨? 왕자님께서 맡기셨으니까요.”

 

 학생수첩은 생텀의 학생임을 증명하는, 일종의 신분증으로도 사용되는 물건이었다.

 그런 중요한 물건을 하녀의 손에 맡기다니?

 로이라는 캐릭터의 평소 행실을 알 것 같았다.

 하긴 【무례함】과 【비굴함】 특성을 동시에 달고 있는 놈이니 오죽할까?

 

 “수첩 줘. 빨리. 지금 당장!”

 

 “예? 그걸로 뭘 하시려고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찢어서 종이접기하시면 안 돼요! 폐하와 튜토리아의 평판이 나빠질 거라고요.”

 

 이 여자는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샬롯의 머릿속에는 내가 수첩을 읽는다는 전제가 자체가 없는 모양이었다.

 

 ‘로이 이 자식은 대체 평소에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나는 샬롯에게서 학생수첩을 돌려받았다.

 그것은 수첩이라기엔 너무 크고 거대했다.

 처음엔 샬롯이 성경책을 건네주는 줄 알았다.

 가슴에 품고 다니면 화살이라도 막을 만한 두께와 크기.

 거추장스러운 걸 싫어하는 로이가 수첩을 샬롯에게 맡겼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끽해야 교가나 학교에서 지켜야 할 뻔한 교칙이나 적혀 있을 학생수첩이 왜 이렇게 두꺼워?’

 

 내 예상은 절반만 맞았다.

 생텀의 학생수첩은 그 방대한 분량의 대부분을 교칙을 설명하는데 할애했다.

 그러나 ‘선생님께 인사하기’나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기’ 같은 뻔한 교칙들이 아니었다.

 원고와 피고가 존재하고 대명사를 갑을병정으로 통일한 흡사 헌법 전서를 방불케 하는 교칙 안내서였다.

 교칙들 대부분은 학생회의 의결로 제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유명무실한 현대 고등학교의 학생회와 달리 생텀의 학생회는 꽤 권위 있고 진지한 조직인 것 같았다.

 학생수첩을 뒤져가며 정보를 얻던 나는 수첩의 첫 페이지에서 내게 도움이 될 만한 문구를 찾았다.

 

 ===============================

 《재능이 있는 자는 누구든 평등하게 교육받아야 한다.》

 - 생텀 초대 학장 샌토니우스 3세 -

 ===============================

 

 누구든 평등하게.

 그 단어를 접하는 순간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머릿속에 복잡하게 떠올랐던 생각들이 퍼즐을 맞추듯 정리되며 마침내 해결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샬롯. 엘프라고 했던가? 내가 꼬시려고 했던 애가.”

 

 나는 샬롯에게 물었다.

 

 “네.”

 

 “귀가 좀 특이할 정도로 기다란 여자애를 잘못 본 건 아니고?”

 

 샬롯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샬롯에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다 얻었다.

 남은 일은 내가 갖춘 능력을 발휘해서 상황을 반전시키는 일뿐.

 

 ‘일을 만회할 기회를 얼마나 오래 주는지 모르니까 지금 당장 가서 해결을 봐야….’

 

 그 순간 객실이 암전되었다.

 기차가 터널을 지나는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속에서 터널 내벽에 반사된 기차 소리만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열차가 터널을 빠져나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덜컹! 덜컹!

 

 이윽고 눈앞이 다시 밝아졌다.

 황녀와의 관계 개선 계획을 떠올리던 나는 당황했다.

 그곳은 더 이상 생텀으로 향하는 기차 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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