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스토르 999년.
“유진 니스토르 고개를 들라.”
양 팔이 포박된 채로 두 눈을 감고 있던 유진의 귀가 쫑긋거리며 움직였다. 오랜 시간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두 눈이 멀어버릴 듯 한 강한 빛줄기가 온몸으로 쏟아져 내리고, 눈앞에 서있던 불투명한 형체들이 다가와 포박을 풀어주며 유진의 무릎을 꿇게 했다.
몇 번 껌뻑이자 흐릿한 시야가 선명해지고 유진은 붉은 제복의 집행자들에게 둘러 싸여 있었다.
두 눈을 검은 실크로 가린 집행자가 한걸음 앞으로 나서자 유진은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죄목이 무거운 자의 마지막 형벌은 집행자로부터 목숨이 거두어지는 것이었다. 까마득히 먼 지난 과거에 그녀가 인간들에게 넘겨져 교수형에 쳐해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후 낮과 밤도 구분할 수 없도록 모든 것이 차단되어버린 이 감옥 안에서 유진은 매일같이 외롭게 기다리고 있을 그녀의 뒤를 하루 빨리 따르고 싶었었다.
집행자가 손끝으로 유진의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니스토르 999년. 유진 니스토르의 마지막 형벌 집행을 시작한다.”
“니....스토르 999년?”
유진이 두 눈을 부릅뜨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하자 양 끝의 집행자들이 그를 제지하며 다시 무릎을 꿇리게 했다.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십시오. 지금이 몇 년입니까?”
“니스토르 999년이다. 집행자는 집행을 이어서 하라.”
집행자의 뒤로 담담한 얼굴의 아르투르가 감옥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런 아르투르를 믿을 수 없다는 듯 한 얼굴로 유진이 쏘아보며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아르투르님 다시 묻습니다. 지금이 니스토르 999년이 맞습니까?!”
“집행자는 집행을 멈추지마라.”
“아르투르님!!!”
마구 요동치는 유진의 양 팔과 어깨를 집행자들이 잡아 일어설 수 없도록 결박시키자 집행자가 다시 그의 이마를 손끝으로 짚었다.
유진이 거세게 몸을 비틀어 흔들며 반항해도 집행자와 아르투르는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유진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담담히 그런 유진을 내려다보는 아르투르에게 원망의 시선이 닿아도 그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느낄 수 없었다.
“377년 전 뱀파이어 종족과 니스토르 왕권의 명예를 실추 시킨 죄를 지은 유진 니스토르에게 마지막 형벌, 루만시티로부터 추방을 명한다.”
집행자의 손끝이 부드럽지만 날렵하게 유진의 이마에 니스토르의 문양을 그려놓자 손길이 닿았던 흔적을 따라 선명한 검은 빛이 새겨지며 감돌다 곧 사라져버렸다. 집행을 마친 자들이 하나씩 감옥을 빠져나가고 단 둘이 남게 되자 아르투르는 무릎을 굽혀 유진을 마주했다.
“다신 돌아오지 말거라. 다시 루만의 땅을 밟는 순간 너의 이마에 새겨진 그 추방의 문양이 불타올라 널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이다.”
아르투르의 손이 유진의 창백한 뺨을 어루만졌다. 유진은 그의 손에 자신의 뺨을 더욱 비비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니스토르 999년.
그렇게 유진은 500년마다 이어지는 루만시티의 왕권 전쟁을 1년 앞두고 유일한 혈육을 남긴 채 그곳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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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로부터 긴급 보고 자료를 전해 받은 태진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급격히 밀려오는 두통에 한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대는 태진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미 한 국가로서의 존엄성은 짓밟힌 지 오래였고, 필사적으로 늪만 같은 검은 수렁으로부터 국민과 국가를 지키려했던 열정적이고 젊은 수장은 무능력의 대명사가 되어버린지 오래였다.
어느새 제어할 수 없을만큼 세력을 확장시켜버려 이 작은 국가를 집어 삼키려드는 유령테러조직은 실체도 없이 인간들을 기만하며 젊은 수장의 목을 옥죄고 있었다.
태진이 책상 위로 내려놓은 보고 자료는 구미호로 이루어진
버닝테일의 경고이자 협박문이었다.
버닝테일을 소탕시키기 위해 태진이 주도했던 비밀작전은 구체화되기도 전에 그들의 귀로 흘러들어가 즉시 폐기처리되었고 그 뒤로도 이미 은밀하게 인간의 정치인들과 군대까지 파고들어 수뇌부를 장악하고 있었던 버닝테일로 인해 무산되어버린 작전만 이미 세번째였다.
어떻게든 내부적으로 해결하고자 했지만 연이은 실패로 태진은 차선의 방법을 선택 할 수 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아직 베일에 싸여 있는 버닝테일의 타겟을 원치 않기에 나서줄 동맹국도 협력국도 없었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종족 중 전투능력만으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뱀파이어 왕자가 루만으로부터 버림받아 추방될 것이라는 공식발표는 이 위기 속의 유일한 기회이자 동앗줄이 되어 태진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499년전 루만의 왕권전쟁에서 니스토르 일가가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던 일등공신이자 현 왕의 유일한 혈육인 유진 니스토르를 아군으로만 둘 수 있다면 무능력한 수장이라는 프레임을 벗을 순 없을지라도 더이상 버닝테일 그들에게 무력으로 우리 인간이 뒤쳐지진 않을 터였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루만시티에 협조문을 보낸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버닝테일 측은 공식적으로 정해진 시간마다 죄 없는 인간을 한명씩 처형시키겠노라 협박해왔다. 그들의 협박이 선포된 지 2주, 죄 없는 2명의 인간이 산 채로 가슴이 뜯긴 채로 목이 매달려졌고 그들은 다시 경고문을 보내왔다.
-멈추지 않으면 일주일에서 하루로 변경하겠다.
손목시계의 초침은 쉼 없이 태진의 시간을 압박했다. 답답한 넥타이와 셔츠의 단추까지 풀어낸 그가 눈 앞의 총리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움푹 패인 두눈이 기력없이 자신을 향해 응시만 하고 있었다.
부총리의 사촌과 대변인의 부인이 현재 실종상태로 연락이 두절된 지 반나절이 되었다. 정치계는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정부의 발표를 전달해준 언론사의 대표이며 대변인은 태진 자신의 믿음직한 선배였다.
살인전과가 있는 폭력사범이 그들에게 살해당한지 나흘이란 시간이 지난 뒤였고 아직 그들이 말한 시간의 텀에 도달하지 않았지만 이미 우리의 뜻을 대비해 새로 바뀐 경고대로 먼저 움직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중이었다.
감추려해도 감춰지지 않는 동요가 총리의 두 눈속을 헤집고 있었다. 얼마전 태어났다는 그의 손녀딸과 아직 몸을 추스리려면 시간이 필요할 그의 딸이 눈에 밟혀 혈육에 대한 걱정이 배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들의 와해겠죠. 동요하고 의심하고 불신하며 스스로 무너져내리길 바랄겁니다. 범죄자에서 우리들의 측근들로 타겟을 바꾼 이유는 이 사태를 오래 끌지않기 위해 자신들에게 불리해질 장기전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겁니다."
"그들은 이미 군대도 압살한 자들입니다. 장기전은 오히려 우리에게..."
"우리에게 유리하게 바뀔겁니다."
국민들의 이성은 공포에 잠식되어 더 이상 스스로 사고를 할 수 없도록 갉아 먹혀 있었고 그건 태진도 다를 바 없었으나 아직 그에겐 시커멓게 타버리다 남은 믿음이 한 줌 있었다.
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 앞으로 다가갔다. 언제 들이닥칠 지 모를 그들로인해 유리창은 대통령의 안전이라는 명목아래 모두 특수제작된 철제 덮개로 뒤덮혀 있었다.
지금쯤이면 붉게 타들어가는 노을의 끝자락을 땅거미가 물고 늘어질 시각일터.
천천히 두 눈을 감으며 분노로 뜨거워진 가슴만큼이나 붉은 노을을 머릿 속에 그려내던 태진이 두 눈을 부릅뜬 채 책상 맡에 놓인 깃대로 창문의 철제 덮개를 뜯어내기 시작한다.
“전 그들에게 굴복할 수도 언제까지 이 안에 숨어 있지도 않을 겁니다."
내부로 침투한 혹은 변절한 자들은 색출해 낼것이고 니스토르 작전은 이미 실행되었다.
어둠속으로 빨려들어가기 직전 가장 붉게 자신을 태우고 있는 태양을 두 눈 가득 품은 태진이 조금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총리를 향해 돌아섰다.
"우리 인간들은 그 괴물들에게 아직 지지 않았습니다. 지금껏 이 한반도를 지키고 뿌리내려 살아온 건 우리들이니 그들에게 빼앗길 수 없어요. 지금쯤 손님이 도착했을 겁니다. 한국은 지금 이 순간 그들과의 전쟁을 공식적으로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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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전용기에서 내린 유진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채로 루만을 떠나 온 것이 실감나질 않았지만 비행기라 불리는 것으로부터 한국의 수도에 발을 내딛는 순간 코 끝으로 인간들의 체취와 비린 피냄새가 물씬 풍겨옴에 현실에 대한 자각이 조금씩 진행되고 있었다.
한국의 지도자라는 자로부터 전해받은 초대장의 내용을 다시 상기하며 유진은 온통 겁에 질려 자신의 방문을 반기지 않는 인간들을 힐끔이다 말고 시선을 허공에 고정한 채 수행비서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왕성의 감옥에 갇히기 전과는 너무도 다르게 세상이 혼란스럽고 흉측하게 변해있었다. 멋스럽고 우아하게 차려입던 사람들의 옷차림은 눈을 어디다 두어야할지 모를 정도로 망측한 차림새로 바뀌어버렸고, 순박하며 소박하던 사람들의 시선은 겁에 질렸을지언정 도도하고 맹랑하게 바뀌어 있었다.
"왕자님 이쪽입니다."
수행비서를 따라 차에 탄 유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도로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서 줄지어 서있었다. 모두가 유진이 타고 있는 차량을 따라 움직이다 서기를 반복하는 것으로보아 그에게 보내는 메시지인 듯 했다.
-돌아가시오.
-우리들은 유진 니스토르의 입국을 반대합니다.
-제발 우리를 죽이지 말아주세요. 제발 돌아가 주세요.
유진은 시트에 몸을 기대며 두 눈을 감았다.
모두가 피켓의 메시지와는 반대로 가슴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겁에 질려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지만 그들의 가슴으로부터 간절한 외침이 전해졌다.
모두가 살려달라며 애원하고 있었다. 어미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리고 있던 어린 아이 모습이 두 눈을 감아도 잔상으로 남는다. 그 아이를 지켜주고 싶지만. 사랑하는 여자조차 지키지 못한 자신이 과연 저들을 구해낼 수 있을까?
가슴 속을 후벼대는 질문에 유진은 아직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