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다짜고짜 자신을 제자로 받아달라며 부복하는 랄프를 요한은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와 무혈결투를 벌였던 것이 이틀 전이었다.
요한에게 흠씬 얻어맞고 퉁퉁 부었던 랄프의 얼굴은 그새 말끔해졌다.
구레나룻이 덥수룩하게 자란 유인원과의 얼굴은 잔뜩 숙인 탓에 피가 쏠려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요한이 묻자 거구의 사내는 땅에 헤딩이라도 할 기세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검술을 가르쳐 주십쇼,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난데없는 요청에 뜨악한 것은 비단 요한과 토르나만이 아니었다.
길드 사무소를 오가던 사람들도 신기한 구경거리에 걸음을 멈췄다.
“이봐요, 랄프라고 했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무릎을 꿇고 앉은 사내를 서둘러 일으켜 세우며 요한이 물었다.
“지난 번 결투 후에 많이 생각했는데 저에겐 요한 씨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미안하지만, 전 누굴 가르칠 실력이 되지 못합니다.”
난처한 상황에 진땀을 흘리는 요한. 그리고 토르나는 그런 주인의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이후로 요한이 검술 연습에 열심이었던 것은 알았다.
하지만 한눈에도 모험가임을 알 수 있는 연상의 사내가 무릎까지 꿇어가며
가르침을 구할 정도일 리는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더군다나 무혈결투를 보지 못했기에 더더욱 이들의 대화가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렇지 않습니다, 스승님.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제발!”
다시 엎드려 절을 하려드는 랄프를 말리는 요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세상에, 이럴 줄은 전혀 예상 못했네.’
그때만 하더라도 물정 모르는 풋내기를 상대로 자신의 실력을 시험해본다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힘을 보여주고 나면 다시는 귀찮게 굴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다시 엮일 줄이야.
“사람들이 봅니다, 랄프 씨.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죠.”
제안을 듣고 그제야 주춤주춤 일어서는 랄프를 데리고 그들은 길드 사무소로 들어갔다.
사무소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자 랄프는 기다렸다는 듯 덥석 요한의 손을 붙잡았다.
“스승님!”
“그러니까, 나는 당신 스승이 될 실력도, 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단호하게 거절하는 요한의 말에도 상대는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닙니다. 검을 나눈 그날 깨달았습니다. 저는 당신의 제자가 될 운명이란 것을!”
요한의 손을 부여잡은 채 이쪽을 바라보는 랄프의 눈빛이 뜨거웠다.
진심, 아니 그 이상.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넘쳤다.
여자에게 잘 보이려 약자를 괴롭히는 겉멋 들린 풋내기로만 생각했던 요한에게는 의외로 다가오는 모습이었다.
“왜 나에게 검술을 배우겠다는 겁니까?”
“스승님은 강하니까요. 저도 스승님처럼 강해지고 싶습니다.”
진심은 알겠지만 무소처럼 돌진하는 모습이 부담스러운 요한은 잡힌 손을 억지로 잡아 빼며 말했다.
“나는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그날은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그런 말 하지 마십쇼. 제가 실력은 없어도 실력을 알아보는 눈은 있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단언하는 사내의 눈망울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였다.
“오해입니다. 생각해봐요, 나는 이제 고작해야……. 아니 그전에 랄프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올해로 스물 하나가 됩니다!”
주먹 쥔 손으로 자기 가슴을 두드리며 랄프가 호쾌하게 답했다.
그 모습에 요한은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뱉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한참 연상이다.
“이봐요. 랄프 씨, 아니 랄프 형. 저 겨우 열일곱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고요. 네 살이나 어린 동생을 스승으로 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잖아요?”
요한의 설명에 옆에서 잠자코 듣던 토르나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아니지요. 배움에 나이는 중요치 않습니다. 무예라면 특히나 더. 자기보다 강하고 하나라도 배울 것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스승인 것이지요.”
하지만 검지를 들어 좌우로 흔들며 받아치는 상대에게선 좀처럼 설득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자작령까지 쫓아와 제자로 받아달라고 할 판이었다.
그렇게 되면 요한으로선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설득하여 돌려보내기 위해 요한이 재차 입을 떼려는 순간, 길드 사무소의 출입문이 거칠게 열렸다.
요란한 입장으로 모두의 이목을 끈 것은 마른 체구의 남자였다.
천으로 만든 갑옷에 가죽 부츠를 신은 사내는 사무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힘이 빠진 듯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사내를 알아본 몇몇이 황급히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제리잖아! 이 친구야, 대낮부터 무슨 일이야?”
사정을 묻는 질문에도 제리는 얼른 대답을 못한 채 바들바들 떨기만 할 뿐이었다.
뒤늦게 창구를 빠져나온 제이크가 잔에 든 독주를 입에 흘려 넣자 그제야 제리의 말문이 열렸다.
“주……. 죽었어.”
“죽다니 누가?”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제이크가 물었다.
“모두……. 얀파스도 게르그도 전부 다.”
익숙한 이름들이 제리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길드의 모험가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어쩌다 죽었다는 거야. 무슨 일이 있었는데?”
제이크가 재차 질문을 던지자 제리의 손이 그의 멱살을 거칠게 부여잡았다.
그리고 반쯤 혼이 나간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마견……. 마견에게 당했어.”
그 말을 끝으로 정신을 잃은 제리의 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졌다.
주변에 몰려든 모험가들 사이로 냉랭한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다른 모험가는 침통한 얼굴로 한숨을 내뱉는다.
성호를 그으며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생경한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도 있었다.
“마견이라니, 그게 뭐지?”
요한의 혼잣말에 옆에 있던 랄프가 속삭였다.
“소문으로 떠도는 마물입니다. 요즘 들어 산에서 사람들이 실종되는 일들이 잦았어요. 그것이 마견이 벌인 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게 사실인가요?”
사람들에게 들려 사무소 2층으로 옮겨지는 제리를 보며 요한이 물었다.
“소문에 불과했죠. 지금까지는 말입니다.”
답을 해주는 랄프 역시 방금 일을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외려 그 모습이 요한은 낯설게 여겨졌다.
“마물의 습격이 이렇게나 동요할 일인가요? 모험가들이라면 그 정도 위험은 익숙할 텐데.”
“그건 스승님이 몰라서 하는 소립니다. 3년 전, 마력재난이 있은 후로는 마물의 수가 현저히 줄었다고요. 뮐레즈 근처의 산은 작년까지만 해도 그중에서 특히 안전한 곳으로 꼽혔고.”
랄프의 설명에 요한은 토르나 쪽을 보았다. 그녀는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런 부분은 요한이 미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발타르였던 시절, 마계의 문이 열린 이후로 왕국 어디에도 마물의 습격에서 안전한 곳은 없었다.
그리고 용사인 그는 가장 강력한 마물들이 득시글거리는 곳만 전전했었다.
때문에 마물의 등장 정도로 이렇게나 동요하는 모험가들의 모습이 낯설었던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압니다. 그래봤자 마물 하나라는 거죠?”
모험가 무리가 쓰러진 사내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랄프는
어깨로 요한을 툭 치며 눈짓을 보냈다.
“마견이란 놈. 소문을 모두 믿는다면 보통 괴물이 아니라고요. 덩치는 집채만 하고. 암흑처럼 검은 털에 지옥불 같은 눈을 갖고 있죠. 베테랑 모험가로 구성한 5인 파티가 마견과 마주쳤다 이번처럼 겨우 한 명만 살아남았다는 소문이에요. 그나마도 소식을 전한 며칠 후에 죽었고.”
“모험가 다섯이서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턱을 괴고서 요한은 마견이란 존재의 힘을 짐작해 보았다.
제대로 구성한 파티가 전멸할 정도의 마물이라면 중급 이상이란 말이다.
구성원의 능력에 따라선 상급 마물을 상회할지도 모른다.
몇 년간 마물의 위협에서 자유로웠다는 사정까지 감안하면 모험가들의 동요도 이해할 법 했다.
뜻밖의 정보들에 요한은 생각이 복잡해졌다. 마력재난 이후 급감했다는 마물들.
그런 평화를 깨고 등장한 마견이라는 존재. 그리고 낯선 소년의 몸과 발타르로서의 기억까지.
그러나 요한의 고민은 길게 이어지진 못했다.
“그렇게 위험한 놈이 진짜 돌아다닌다면 저 역시 더욱 강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승님!”
다시 처음의 얘기로 돌아간 랄프가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전 삶에서조차 해본 적 없었던 검술강습을 해야만 할 모양이다.
***
흑여우 길드 사무소의 뒷마당, 우물과 작은 창고가 전부인 공터에서 요한은 연상의 제자를 마주하고 섰다.
“또 목검입니까?”
랄프는 연습용 목검을 쥐자 일전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긴장 풀어요. 이번엔 어디까지나 대련이니까 지난번처럼 심하게 하진 않을 겁니다.”
요한 역시 목검을 시험 삼아 휘두르며 말했다.
결투가 아닌 만큼 가능한 직접 타격은 피할 생각이다.
프레디의 ‘이른바’ 추나 요법을 통해 비틀림을 조정한 신체를 제대로 움직여볼 기회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도 시험상대로 써먹는 셈인가?’
가르침을 얻겠다는 열의로 가득한 제자를 보며 요한은 일말의 미안함을 느꼈다.
‘아니야, 이번에도 저쪽에서 먼저 청해온 거잖아.’
빠르게 합리화를 하며 요한은 상대에게 목검을 겨누며 외쳤다.
“실전이라 생각하고 전력으로 덤벼요!”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조금 긴장한 듯 눈을 껌뻑이며 랄프가 확인을 청했다.
“그래야 랄프 씨 실력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의 의향을 확인한 랄프의 표정일 일순 변했다.
“그럼, 사양 않고 공격하겠습니다.”
그렇게 수일 만에 다시 두 사람은 검을 마주했다.
‘호오, 고작 며칠 사이에 많이 달라졌는데?’
랄프의 검을 받아낸 요한은 내심 감탄했다.
겨우 몇 수를 주고받은 정도로도 그가 얼마나 고민하고 수련했는지 알 수 있었다.
힘과 체중을 잔뜩 실은 검을 이번엔 옆으로 흘려보내며 요한은 생각했다.
‘강해지고 싶다는 게 얄팍한 충동은 아닌 모양이군. 하지만…….’
이어지는 랄프의 공격을 몇 번을 더 받아낸 요한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사람 검술에 재능이 전혀 없어.’
검사로서 극의에 도달했던 발타르의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검술이란 검을 들고 휘두른다는 단순한 동작의 구성이다.
때문에 문외한의 시선으론 수련만 열심히 정진하면 누구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해지기 위해선 후천적 노력만큼이나 선천적 요인도 중요하다.
“흐라앗!”
횡으로 베어드는 검을 요한은 가볍게 뒤로 거리를 벌려 피한다.
랄프의 팔은 남보다 길어 그만큼 더 물러서야 했다.
하지만 미리부터 어떻게 공격할지 알 수 있기 때문에 어려움은 없었다.
- 적의 움직임을 읽기 전에 자신의 움직임을 알아야 한다.
검술 스승이었던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검을 익히기 위한 기본은 자신의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깨닫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몸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정확하게 조종하는 것은 타고난 재능이 필요했다.
그런 센스 덕분에 요한은 자신의 몸이 미세하게 뒤틀려 있음을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수정함으로서 보다 강해질 수 있었다.
‘털썩!’
연달아 들어오는 공격을 요한이 아슬아슬하게 피하자 자기 힘을 못이긴 랄프의 몸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이전의 대결에서도 느꼈지만 이 사내에겐 그런 쪽의 센스가 전혀 없었다.
“그만, 이걸로 충분해요.”
요한은 검을 내려들고 바닥에 쓰러진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가 문제인지 파악하신 겁니까? 역시 스승님! 대단하십니다!”
스승님 소리를 연발하는 랄프의 모습이 요한의 맘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래요. 미흡하나마 도움이 될 얘기는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어느 새 송골송골 땀이 맺힌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며 랄프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말해주세요.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여전히 희망에 찬 눈으로 이쪽을 보는 랄프의 시선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짓을 둘러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쯤에서 제대로 못 밖아 두지 않는다면 오히려 랄프에겐 더욱 큰 악영향을 끼칠 것임을 요한은 알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할게요.”
사뭇 진지한 요한의 분위기에 랄프는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랄프 씨는 검사로서 소질이 부족합니다. 아니, 평균 이하라고 보는 게 좋을 거예요.”
딱 잘라 결론을 내린 요한의 말에도 랄프는 크게 동요하진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곁에서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토르나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놀라지 않는 것을 보니, 이미 알고 계셨군요?”
요한의 물음에 거구의 사내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사부님이군요. 겨우 두 차례 겨뤄보고서 파악하시다니.”
“이전에도 누군가에게 검술을 배웠죠? 아마도, 왕국군 소속의 사람에게.”
“거기까지 눈치 채셨군요. 맞습니다. 초급군사학교에 검술로 입학해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결국 자격미달로 중간에 낙오하고 말았지만요. 그때 교관도 방금 스승님과 같은 얘기를 하더군요. 검술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얘기하는 것으로 맥이 풀리는지 랄프는 마당 한쪽에 아무렇게나 놓인 나무상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모험가 길드에 등록을 했던 거군요.”
“왕국검술을 기초나마 익혔으니 실전 경험을 쌓아서 다시 군에 지원하려 했었죠.”
왕국군은 정예를 양성하기 위한 군사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초급과정에서 기본적인 군사훈련과 소양을 위한 과정을 수료하면 정식 군인으로 채용된다.
하지만 입소자의 절반 이상은 초급과정을 마치지 못하고 탈락하기 마련이다.
그런 이들 중에선 랄프처럼 모험가로 전직하는 경우도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럼, 저는 스승님처럼 강해질 수 없다는 겁니까?”
낙담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랄프가 물었다.
“지금 저의 수준까지라면 성취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이보다 몇 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겠죠. 그리 추천하고 싶은 길은 아닙니다. 차라리 다른 기술을 익혀보는 건 어때요?”
모험가는 물론이고 군인으로서도 굳이 검술에만 집착할 이유는 없었다.
창병이나 궁병을 노려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랄프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검사가 아니면 의미가 없어요.”
대답을 들은 요한은 새삼 그의 의지가 보기보다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그렇게 검에 집착하는 겁니까?”
그의 물음에 한동안 말없이 바닥만 쳐다보던 랄프는 뜻밖의 대답을 내어 놓았다.
“용사 발타르님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