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소공작님. 이제 그만 갑시다. 쫄려서 살겠어? 나 집에 갈래!”
“오늘 소 후작님의 누이가 오신다고 들었습니다만.”
“걔한테 떠넘기려고 오라 한 거니 인사만 하고 우린 튀자. 여기서 더 이상 할 일도 없잖아. 아, 나 니들 사이에서 불편하다고!”
진은 그가 보고 있던 서류에 사인을 하고 서류폴더를 툭 덮어버리고는 세상 쓸모없는 것을 보는 시선을 그에게 날렸다.
“수석 놓쳤다고 지금 나한테 시위 하냐?”
“아오. 망할 듀켈 놈들. 하필 그때 마수를 보낼 게 뭐람. 좀만 있다가 보내지. 여우같은 마르켈을 평생 2등 인생으로 살게 할 수 있었는데.”
“넌 친구한테 그게 무슨 말본새냐?”
“그 자식이 먼저 약 올렸다고. 나보고 루저라고.”
“겨우 졸업 턱걸이 한 내 앞에서 잘들 논다.”
“아니 똑똑한 소 공작께서는 왜 그리 공부를 안 하시는 겁니까? 하면 잘 할 거 같은데.”
“할 필요가 없거든. 난 너처럼 무식하게 공부한 녀석들 고용하면 되니까.”
“... 좀 재수 없었다.”
진이 피식 웃더니 몸을 일으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제 마르켈이 나한테 양주 가져와서는 그걸 한 번에 다 들이키더라. 너한테 서운하다고. 조만간 마르켈한테 얼굴 좀 내비쳐.”
“네가 잘하는데 뭐.”
“갑자기 마르켈한테 왜 그러는건데? 나도 뭘 알아야 돕지?”
“넌 듀켈 군 동태나 잘 파악해. 아르디안에 왜 저렇게 싸돌아다니는 듀켈 기사들이 많은 거야?”
“왜겠어. 그분 찾느라 그런 거지. 사복입고 다니는 기사들을 어떻게 솎아내? 그리고 같은 제국민이라 쫓아내지도 못해.”
“소후작.”
창밖을 계속 내다보던 진이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부르자 여태 장난치던 모습을 지운 프란츠가 심각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
창에서 시선을 뗀 진이 씩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영애랑 차 한잔 해야지. 나가자.”
***
한적한 오후, 특별한 외출 없이 백작저택 안에서 지내던 영식들은 테니스를 쳤다.
유스티나의 명령으로 디아나는 지금 세탁보관실에 있었다.
손수건과 기타물품을 챙겨오라 일을 시켰기 때문이다.
그때 부엌에서 앨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지나. 나 저 땅콩 먹어도 돼?”
“이거 백작님이 어제 드시고 남은 안주인데. 후작영애 때문에 버리려고 둔거예요.”
“배고파 죽겠어. 그냥 내가 먹을게.”
저는 일하고 있는데 부엌에서 잡담하고 있는 앨리스가 얄미워진 디아나의 입이 댓발 나왔다.
‘너만 배고프냐? 나도 고프다.’
요즘 먹는 게 너무 부실해 꼬르륵 거리는 배를 매만지고 있는데 피크닉 가방을 든 부집사가 디아나를 불렀다.
그들은 서둘러 테니스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집사들이 테니스 관중석 끝 테이블에 짐을 내려놓자 앨리스를 중심으로 하녀들이 세팅을 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체크무늬 타올을 깔고 그 위에 냅킨과 수저, 간단한 요기거리들을 예쁜 그릇에다 담아놓았다. 그리고 핑크빛이 도는 일자모양의 유리컵들을 조심스레 꺼내 고급스런 받침대 위에 올리고는 보물함 마냥 번쩍번쩍 광이 나는 냉수통에서 얼음을 꺼내었다.
보기만해도 비싸보이는 크리스탈 컵에다 얼음을 채우고 식힌 찻물을 담았다.
영롱하게 빛나는 얼음차 3개를 쟁반에다 올린 앨리스는 디아나에게 주고는 아가씨 쪽으로 고갯짓하며 가보라 지시했다.
‘아니, 야외에서 누가 이런 비싼 유리컵을 써?’
균형을 잡기위해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던 디아나가 간신히 유스티나 앞에 서자 그녀는 우아한 발걸음으로 테니스 코트를 향했다.
언제 시합이 끝났는지 프란츠는 선수의자에 걸려있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마르켈과 이야기 하고 있었고 진은 시종이 갖다 주는 공을 받아 혼자서 서브를 반복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한잔 드세요.”
유스티나는 부채를 펄럭거리며 손짓하자 디아나가 영식들에게 다가가려했다.
그때 누군가의 발이 툭 튀어나와 디아나의 발이 걸렸고 순간 중심을 잃은 그녀가 앞으로 꽈당 넘어지면서 와장창창 컵들이 산산히 부셔졌다!
“디아나. 이게 무슨 짓이니! 내가 그리 행동을 조심하라고 일렀는데 기어이 손님들 앞에서 실수를 저지르는구나.”
디아나는 당황해서 일어서려 했지만 깨진 유리 조각들 때문에 손을 땅에 디딜 수가 없어 아등바등 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거센 악력이 그녀의 팔을 훅 잡아끌어 일어서게 했다.
멀리서 서브를 치고 있던 진이 어느새 다가와 있던 것이다.
“다쳤습니까?”
디아나는 양 팔로 몸을 꼭 감싼 채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제 실수에 놀라 몸이 굳어져버린 탓이었다.
진은 시종을 불러서 이곳을 치우라고 명했고 그런 그에게 유스티나가 다가왔다.
“소 공작님. 괜찮으세요?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 송구합니다.”
“내게 미안해 할 일이 아니야.”
“제 하녀의 실수인데요.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네요.”
“그럼 영애에게 부탁 하나만 하지.”
“부탁이요?”
유스티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진을 바라보았다.
“너무 혼내지 마.”
“...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해. 하녀 본인은 얼마나 놀랬겠나. 필요하다면 깨진 유리컵은 내가 보상하지. 어떻게 생각하나, 소백작?”
진은 근처에 있던 마르켈에게 고개를 돌리니 그는 당연히 괜찮다면서 손사래를 쳤다.
대놓고 하녀를 감싸는 진의 태도에 이를 잘게 깨물며 영애가 말했다.
“그럼 소공작님께서는 제게 무엇을 해주시겠습니까?”
“...”
진은 아무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게 부탁을 하셨으니 소공작님께서도 제 소원 하나 들어주시지요.”
유스티나의 당돌한 요구에 진은 소리를 내며 얕게 웃었다.
그리고는 특유의 느릿한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간다.
가까워진 거리에서 진이 검지와 엄지로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려 시선을 마주했고 로맨틱한 모습에 주변 하녀들의 신음을 내뱉으며 저들끼리 아우성이었다.
마치 소설 속 선남선녀가 둘이 키스라도 하려는 듯 다가서는 그의 모습에 설레었으리라.
“영애 주제에 내게 요구를 해?”
얼굴을 마주하는 설레임도 잠시 그의 스산한 말투에 등골이 오싹해진 유스티나가 뒷걸음질 치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
서리가 잔뜩 낀 그의 차가운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유스티나의 목을 조를 것처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내가 정말 부탁이었겠나? 그 정도도 분간 못하는 얼간이는 아닐 줄 알았는데. 실망이 커. 유스티나.”
다정했던 손길과는 너무 다른 그의 말에 영애는 입만 벙긋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없던 일로 해.”
“...”
“대답.”
“... 네.”
그의 확인 사살에 유스티나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고 진은 디아나의 팔을 잡아끌며 테니스코트을 빠져나왔다.
디아나는 한참을 끌려가다가 그가 잡은 팔을 세게 뿌리치며 소리 질렀다.
“이.....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 구해드렸습니다만?”
디아나는 기가 차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 짜 힘겹게 소리 질렀다.
“아니, 거기서 소 공작님이 그러시면 저 앞으로 여기서 어떻게 일 하라구요! 미쳤어요?!”
“하... 구해줬더니 화를 내시는 군요.”
“어쩔 거예요? 아! 난 몰라!! 가뜩이나 미움 받고 있는데 이젠 시궁창으로 떨어지게 생겼네.”
디아나가 양손으로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자신의 머리를 휘저으며 절규했다.
“공작가로 오십시오.”
“또 그 소리!”
“그리로 오시면 지금 월급의 3배를 드리겠습니다.”
“하... 가난한 공작가라고 들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녀의 어퍼컷 질문에 순간 잠시 할 말을 잃은 그가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뼈 때리는 대답 잘한다고 대장이 그러던데 사실이군요.”
그가 씩 웃으며 다시 걸음을 재촉하였고 디아나는 혼자 있다가는 유스티나의 악령이 그녀를 잡으러 올 것 같아 얼른 그의 뒤를 쫓아갔다.
“디아나 양 월급을 줄 정도는 있습니다. 마정석이라도 팔아서 줄 테니 건너오십시오.”
“그 마정석 돈 하나도 안 된다고 하셨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대는 말을 안 할 때가 더 예쁘군.”
디아나는 소공작이 제가 떠날 수밖에 없도록 만들겠다란 말이 현실이 되어가는 것을 새삼 느끼며 당장 짐을 싸 나가자고 하고 싶었다.
‘백작.... 백작을 만나야해....’
아무리 시도해도 코빼기 하나 보이지 않아 만날 수 없던 백작에게서 반드시 루바냐 저택을 얻어내리라 주먹을 불끈 쥐는 오늘 밤... 부디 감옥에 끌려가지 않길 만을 기도한 디아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소공작의 뒤를 힘겹게 쫓아갔다.
***
그 사건 이후로 디아나의 예상대로 그녀는 백작가의 공식적인 왕따가 되었다.
모든 하녀들이 그녀를 투명인간 취급했고 주방에 내려가서도 백작영애를 배신하고 소 공작에게 꼬리친 불여시로 낙인찍혀 버렸다.
이유 없는 미움받이에 서러울 대로 서러워진 그녀의 유일한 방패는 의외로 아리아였다.
아리아는 웬만한 잡다한 업무를 본인이 다했고 디아나에게는 엘레나의 시중을 들라하며 방안에 있게 했다.
엘레나도 딱히 디아나에게 모질게 굴지 않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생활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유스티나의 초대로 피크닉을 가기위해 한껏 차려입은 엘레나가 1층 로비에서 진과 마주쳤다.
“프란츠 오라버니께서는 안보이시네요.”
“가기 싫어서 문 잠그고 칩거 중인 걸 마르켈이 잡으러 갔어.”
그 말을 하면서 엘레나 주변을 기웃거리는 진의 모습을 보자 그녀가 콧방귀를 뀌었다.
“안 데리고 왔으니 그만 찾아요.”
“지금 어디에 있나?”
“오라버니. 제 정신이에요?”
그녀의 건방질 말투에 진이 엘레나를 내려다보면서 실소를 머금었다.
“내가 동네북이지. 이젠 너까지 날 막 대하는 거냐?”
“여인에게 도통 관심 없으시고 기사들하고만 어울리시기에 혹시 다른 취향이 있으신 건가 걱정을 했던 제가 무색해지긴 합니다만.”
“뭐라는 거야?”
“그래도 하녀라뇨! 공작님은 알고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