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보니 부엌에는 한 번도 온 적 없는 거 같은데?”
“그... 그게. 내가 세탁... 하녀니까....”
디아나의 얼굴이 새빨개지자 헤이든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요리는 내가 할게. 넌 그냥 맛있게 먹어.”
그 말을 끝으로 치즈와 건파슬리를 위에 뿌리고 장갑을 껴 오븐 안으로 팬을 집어넣었다.
왠지 모르게 묘해진 분위기 속에서 디아나는 테이블 세팅을 했고 헤이든은 주방 정리를 하며 부산하게 움직였다.
완성된 볼로네제를 멋드러지게 담은 헤이든은 디아나의 맞은편에 앉아 그릇을 건네며 물었다.
“디아나,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크림스프?”
“또?”
“음... 딱히 가리는 건 없는데... 고기도 스테이크보단 스튜로 해서 먹는 걸 더 좋아하고 연어나 오이스터도 좋아해. 사실 라폴르의 디저트를 제일 좋아하지만 말야.”
디아나는 제 앞에 음식을 보고 군침을 삼키며 대답하다 무심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헤이든을 발견했다.
“왜?”
그는 잠시 할 말을 고민하는지 입술을 달싹이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한테만 솔직히 말해봐.”
“뭘?”
“너 하녀 아니잖아.”
순간 그들 사이로 정적이 가라앉았다.
“그런 음식은 평민이 먹을 수 없어. 디아나.”
디아나는 순간 아차 싶어 들고 있던 포크를 놓쳐 떨어뜨렸다.
저도 모르게 떨리는 손을 진정 시키려 주먹을 꾹 움켜쥐자 헤이든이 다급히 그녀의 손등 위로 제 손을 올렸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 안 해도 돼.”
당황한 그녀가 시선을 어디에 둘 질 몰라 고개를 숙이자 걱정이 된 헤이든이 그녀와 눈을 마주치려 고개를 기웃거린다.
“내가 네 편 할게. 네가 누구든 말이야. 그러니 도망가지만 말아.”
“도망?”
“너 저택을 떠나고 싶다며. 가도 나랑 같이 가. 네가 어디를 가든 같이 갈게.”
함께해준다는 말에 울컥 가슴이 시려지는 디아나였다.
디아나가 된 이후로 마음을 의지할 곳 없었던 그녀에게 저 말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그는 알까.
“언젠간... 말할 테니... 그냥 믿어줄래? 나쁜 짓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니까...”
자신도 왜 디아나가 되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질 몰라 말끝을 흐리자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헤이든이 말을 건넸다.
“그럼 부탁하나 들어줄래?”
디아나가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하자 입가가 호선이 되어 있는 그가 입을 열었다.
“어서 먹어. 식겠다.”
헤이든이 그녀의 손에 포크를 쥐어주었다.
디아나가 쓴 미소를 지으며 파스타를 입에 넣었다.
여전히 맛있는 그의 음식.
왠지 그의 요리 실력처럼 그는 변하지 않으리란 근거 없는 신뢰가 생겨버렸다.
두 사람은 언제 조용했었냐는 듯 또다시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은은하게 비추어지는 불빛에 반사된 두 사람의 그림자가 흔들리며 고요한 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
아침이 되었어도 휴일이라 그런지 소보에 집은 무척 조용하다.
그곳에서 들려오는 건 창밖의 새들이 나무에 매달려 지저귀는 소리 뿐 적막감마저 드리웠다.
그 정적을 깨고 소보에집 2층 복도 허공에서 누군가 나타나 '탁' 발을 딛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보다 더 짙은 긴 머리카락을 가진 조그마한 여자아이 하나가 디아나의 방문을 열어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해가 이미 중천임에도 밤늦게 잠들어 버린 디아나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그런 그녀를 무심히 바라보던 소녀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진다.
그러더니 중얼중얼 주문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
“아직 자고 있단 말이야?”
“저도 자고 있을 시간입니다.”
“그렇다고 애를 이렇게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해?”
“이불은 덮어줬지 않습니까.”
자신에겐 너무 이른 아침 시간에 깨어있는 게 몹시 못마땅한 마법사가 소공작을 향해 날을 세웠다.
갑자기 바뀐 환경 탓인지, 그들의 다툼 때문인지, 밝은 빛에 얼굴을 찡그린 디아나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일어났네요.”
마법사가 해결됐다는 듯 손짓하자 진은 혀를 쯧 차고는 뒤에 있던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인지한 디아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지금 을씨년스러운 동굴 한가운데 놓여진 침대 위에 있으니 말이다.
잠자고 있던 그녀를 데리고 오기 까다로웠던 마법사가 침대 채로 텔레포트했단 걸 알리 없었던 디아나가 팔로 몸을 감쌌다.
말할 때마다 하얀색 입김이 연기처럼 피어 오를 만큼 스산하다.
게다가 소리를 낼 때마다 공기 중으로 퍼지는 울림이 디아나의 심기를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여기 어디에요?”
“늦잠을 즐기시나 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진은 디아나에게 ‘네 머리 좀 어떻게 해봐.’라는 듯 그녀를 쳐다보며 자신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대며 톡톡 건드렸다.
아직 잠도 덜 깨 몽롱했던 그녀가 손을 올려 자신의 머리카락을 더듬자 헝클어진 머리가 폭탄 맞은 것 마냥 부풀어 올라와 있었다.
황급히 그녀가 손가락으로 대충 쓸어 넘기고 입가에 묻은 침을 대충 닦아내다가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내가 왜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진을 노려보며 읊조렸다.
“여.기.어.디.에.요.”
“용의 동굴입니다.”
용의 동굴?
드라코 의식하는 그 용의 동굴?
그 동굴 안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가 떡 하니 놓여있다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 디아나가 이불을 끌어다가 자신의 몸을 가리었다.
“근데 왜 내가 여기에 있어요?”
“제가 당신을 납치해오라고 했거든요.”
납..납치?
여기 인간들은 예의를 스프에 말아 먹었나, 똥통에 빠트렸나.
어떤 놈은 보자마자 벽에다 사람을 쳐 박고. 어떤 자식은 덥석 껴안아 성추행하더니, 이젠 납치야?
“지금 뭐하시는.”
“따라 하세요.”
디아나가 당황해하든 말든 마법사가 말을 잘라 이야기했다.
“네?”
“드라코라디안.”
“뭐요?”
“따라하세요.”
“제가 왜요?”
디아나는 잘 자고 있던 자신을 납치한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명령조인 저 꼬마가 무척 건방져보였다.
“한번이면 됩니다. 중요한 일이라 그래요.”
왜 중요한지는 설명하지 않는 진에게 디아나는 다시 울컥했지만 여기서 괜히 화내면 자신만 이상해지리라 생각 들어 그냥 하라는 대로 따라했다.
“드라... 뭐요?”
“드.라.코.라.디.안.”
마법사가 또박또박 말하자 그대로 따라 말했다.
“드라코라디안.”
마법사와 소공작의 고개가 동시에 출입구 쪽을 향했다.
.......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가 변함이 없자 마법사가 입구를 확인했고 소공작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제 됐죠? 나 돌려 보내줘요.”
“... 백작 저택으로는 언제 돌아가십니까?”
“남이사.”
“돌아가면 유스티나는 괜찮겠습니까?”
그제야 디아나는 그곳에 돌아가면 백작 영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휴가를 나오고 그녀를 떠올리지 못할 만큼 스펙타클한 시간을 보냈기에 사신이 다가오고 있었음을 까먹은 디아나였다.
“아.... 맞다.”
“삶에 대해 계획이라곤 없군요.”
“그러거나 말거나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요?”
“아르디안 공작저택으로 오십시오.”
“또 그 소리에요?”
“제가 유스티나로부터 당신을 보호해드리겠습니다.”
“소공작님이 왜 저를 보호해줘요?”
“당신이 마음에 드니까?”
뜬금없는 고백에 디아나는 실소가 터졌다.
생각해보니... 이 사람 내가 전생에서 그토록 사랑 했던 사람 아닌가?
몸이 바뀌어서 그런가, 상황이 변해서 그런가.
전생에선 그렇게 멋지고 아름다워 보이던 그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얄밉고 못마땅하다.
“저 아세요?”
“차차 알아 가면 되죠. 그러니 공작저로 오시라는 겁니다.”
“싫은데요.”
“그럼 뭐... 제가 백마탄 왕자가 되어야겠지요.”
이건 또 무슨 멍멍이 소리인가 싶어 디아나는 말문이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영애가 당신을 힘들게 할 겁니다.”
“왜요?‘
“당신이 공작저택으로 간다하면 그걸 가만히 구경할 아이가 아니거든요.”
“저 거기 안 간다니까요.”
“가게 되실 겁니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내가 그리 만들 거니까.”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의 태도였지만 어딘지 모를게 묘한 매력이 있었다.
이런 진의 매력 때문에 전생에 그리 깊게 빠져든 걸지도...
저
당당함 안에서 무의식적인 안정감을 찾게 된다랄까?
“유스티나는 그리 신뢰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 말은 은근 그를 칭찬하고 있던 디아나의 심장에 비수로 쿡 박히었다.
“나쁜 아이는 아니지만... 집착이 좀 심한 편이라.”
나쁜 아이는 아니다라...
전생의 자신을 그렇게라도 생각해주니 다행이다 생각하는 자신이 퍽 못나보인다.
“백작영애가 당신에게 집착한다 생각하시나요?”
“멋진 이성에게 끌리는 건 여인으로서 당연한 본능입니다.”
“하. 굉장한 자신감이네요.”
“자신감이 아닌 사실이니까요.”
하. 안정감 따위 취소. 그냥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미련함이다.
이제 그런 건 훌훌 털어 내리라 다짐하는 디아나였다.
그러다 문득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소공작이 왜 디아나를 그리 바라보았는지, 왜 제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지, 문득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