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나가 눈을 떠 보니 매우 낯선 곳에 누워있었다.
천천히 앉아 주변을 돌아보니 값비싼 고급 자재로 만든 테이블과 안락한 의자들이 가운데에 배치되어 있다.
벽난로에선 장작이 따뜻한 온기를 품으며 타들어갔고 벽장엔 책들로 가득했다.
분명 숲 어딘가에 있었는데 언제 여기로 온 거지?
“......그때까지만 갖다 주면 돼.”
“알았어요. 한번 찾아볼게요.”
문밖에서 대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을 보니 이쪽으로 걸어오는 듯했다.
“그리고 너무 가깝게 지내지는 마.”
“또 그러시네. 산맥 때문이라니까요.”
“그럼 너도 증상을 느꼈어야지. 범상치 않은 아이야. 거리를 두는 게 맞아.”
디아나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귀를 쫑긋 세웠다.
“뭐야. 아까부터 왜 그렇게 디아나를 싫어하는데요? 뭐가 문제입니까?”
“싫은 게 아니고...”
디아나는 마른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그 여자...불쾌해. 같이 있기 싫을 정도로.”
생각지도 못한 그의 대답에 순간 디아나는 수치심이 확 몰려왔다.
지안이 안아주었을 때 느꼈던 아늑한 기분이 떠올랐기 때문.
‘불쾌... 불쾌? 내가 사람을 봐도 단단히 잘 못 봤네.’
디아나의 허탈한 웃음이 턱 나왔을 때 헤이든이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일어났어? 괜찮아?”
핏기가 하나 없는 그녀가 갈라진 입술을 비틀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헤이든은 그녀를 저지했다.
“좀 더 누워있어.”
“... 여기가 어디야?”
“여긴... 대장이 사용하는 서재야. 갑자기 쓰러진 널 데리고 갈 곳이 없잖아. 그래서 여기로 왔어.”
“서재... 귀족인가 보지?”
“음... 귀족의 지원을 좀 받고 있다 할 수 있지.”
“쓰러질 때 증상이 어땠지?”
헤이든이 열고 들어온 문 틀에 기대고 있던 지안이 삐딱한 자세로 대화를 잘라냈다.
“환각이 보였나?”
가만히 듣고 있던 디아나는 자신의 증상을 말하고는 싶었지만 저 얼굴이 꼴 보기 싫어져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지안은 귀찮다는 듯 혀를 차고는 헤이든에게 말했다.
“... 일어났으니 그만 가봐. 그리고 헤이든. 여긴 노출되면 문제가 생겨. 가급적 낯선 사람은 데리고 오지 마라.”
허. 낯선 사람! 그렇지... 낯선 사람.
근데 너랑 나 만난 적 있거든?
‘내가 너에게 대여해준 서신들 내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몸에 힘이 나질 않아 디아나는 묵묵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헤이든. 가자.”
소공작 때도 그렇고...
저 인간한테도 그렇고...
왜 이리 난 혼자만의 착각에 빠지는지 모르겠다.
남자가 눈길만 줘도 그게 사랑인 냥 달려드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남자와의 연애 경험이 전무하여 그런 건가?
나름 무도회에서 인기가 많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이 남자 저 남자 좀 많이 만나볼 것을!
왜 그런 귀한 기회들을 멍청하게 날려버렸는지 너무 속이 상했던 디아나는 저를 잡고 있는 헤이든의 손길을 떼어냈다.
“괜찮아? 너 얼굴이 창백해.”
“...집 주인이 나가라잖아. 낯선 사람은 나가줘야지.”
그의 오만한 태도에 세상 초라해진 자신이 몹시 미워져 그녀는 혼자서 꿋꿋이 걸으려다 또다시 비틀거렸다.
어쩔 수 없이 헤이든에게 기댄 채 걸음을 옮겼는데 그가 다른 문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 문은 매우 높다란 계단이 밖으로 연결되어있었다.
천근 만근한 몸이라 디아나는 그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힘겹게 계단을 올랐더니 출입구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그녀를 괴롭혔다.
찌푸린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출입구를 나오자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배경을 보고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뭐야! 여기 아래 집이 있어?”
디아나는 방금 연무장에 우뚝 서있었던 아름드리나무에서 나온 것이다.
헤이든이 조용히 출구의 문을 꼭 닫자 문과 나무의 결이 똑같아서 출입문의 흔적조차 찾기 쉽지 않았다.
“신기하지? 나도 처음엔 엄청 놀랬어. 이거 비밀이다. 알았지?”
“허... 마법사란 정말 신기하네.”
헤이든이 말하기 어려운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마법사는... 아니고 뭐 좀 특이한 사람이야.”
마법사가 아니라고?
은백색 빛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려는데 갑자기 그녀 앞에 헤이든이 무릎을 꿇었다.
“업혀.”
“뭐?”
디아나는 당황해 뒷걸음질 쳤다.
“됐어. 나 무거워.”
“너 지금 얼굴이 어떤 줄 알아?
숲을 나갈 때까지만 업어줄게.
이럴 줄 알았으면 검술 훈련 열심히 해서 팔 근육 좀 키워둘 걸.
그랬으면 두 팔로 널 안고 갔을 텐데.”
“뭐래. 됐어.”
“나 부끄럽게 만들 거야?”
헤이든이 앉은 채로 뒤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지금 서있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힘에 부쳤다.
또다시 남자에게 휘둘리고 싶진 않았지만 너무 도도하게 굴었던 전생이 후회 된 그녀는 새침한 얼굴을 한 채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으쌰.”
헤이든이 그녀를 업고 느긋하게 걸으면서 말했다.
“대장은 원래 경계심이 많은 사람이야. 그래야 하는 사람이고. 서운했다면 대신 사과할게.”
“넌 왜 나를 경계 안 해? 내가 나쁜 사람이면 어쩌려고.”
“자세히는 몰라도 적어도 네가 마음 따뜻한 사람인 건 안다.”
그의 근거 없는 믿음에 조금 위로가 되었다.
“넌 내가 챙겨줄게. 마음 다치지 마. 알았어?”
헤이든이 살짝 고개를 돌리며 묻자 디아나는 이내 쑥스러워져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생에서 이렇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구나란 생각에 조금은 마음이 풀린 그녀는 그의 등에 기댄 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헤이든은 아침 일찍 볼일이 있다며 나가버렸고 디아나는 방안에서 내내 게으름을 피우다가 늦은 오후에나 산책을 나왔다.
목적지 없이 마냥 걷다가 발걸음이 멈춘 곳은 책방 앞이었다.
오늘은 영업을 안 하나보다 무심히 바라보는데 그녀 곁으로 누군가 조용히 발걸음을 멈춘다.
지안 발루트. 그 자였다.
디아나는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추질 못한 채 다시 책방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도 디아나와 같은 방향으로 서서 말을 걸었다.
“황제가 시켰나?”
뜬금없는 소리에 디아나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아니면 듀켈인가?”
디아나는 그가 무슨 소리인가 싶어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러기엔 네가 준 서류들이 너무 결정적이라. 역시 샤르냐인가?”
리암제국의 3대 공신력있는 가문은 북부의 듀켈 가문, 남동쪽의 아르디안 가문, 그리고 서부를 책임지고 있는 샤르냐 가문이다.
이 샤르냐가문은 마법사의 수장으로 무한의 숲으로부터 넘어오는 마수들을 경계하고 외세의 침략을 막아주는 조건으로 그들 고유의 영역을 제국으로부터 보장받았다.
“지금의 샤르냐라면 황제의 똘마니로 알고 있는데 그럼 황제가 보낸 거나 다름없군. 안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디아나는 그를 보지 않고 창가에 시선을 둔 채 말하였다.
“어제 네가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몰라서 그래?”
“모르는데요?”
디아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대체 언제까지 나에게 이렇게 무례할 건가요? 못 들어주겠네, 정말.”
“뭐?”
“난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당신이 그 백색 빛을 쏘아 대며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내 알바는 아니지만 나는 더 이상 당신과 어울릴 생각 없으니 이 이상 말 걸지 말아요.”
[불쾌해. 같이 있기 싫을 정도로]
갑자기 떠오른 그 말에 울컥한 그녀는 몸을 돌려 그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지안이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휙 낚아 챘다.
“백색 빛?”
무례한 그의 태도를 더 이상 못 참겠는 디아나가 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를 때리려 하자 그 손 조자 잡혔다.
지안은 그녀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거칠게 벽으로 밀어 넣었다.
잡은 두 손을 벽에 못 박듯 고정 시킨 채 대면하였고 그 손을 빼내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기사로서 단련된 그의 아귀 힘에선 벗어나기 어려웠으리라.
“다시 말해봐. 너 빛이 보인다 했나?”
“너 내가 만만해?”
다아나가 비꼬듯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로 쏘아보았다.
“그래. 만만하겠지. 천한 보육원 출신에 부모도 없이 자라나 저택에서 일하는 일개 하녀가 뭐 대수겠어. 그치?
내가 구해다 준 서류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가져가고 뒤에선 내가 재수없다 험담하더니. 하, 이젠 이렇게 희롱도 해?”
“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다. 백색 빛이 보인다고?”
“보이면 어쩔 건데? 뭐 대단한 마법 부린다고 거만하게 구는데! 너도 일개 평민이잖아? 내가 언제까지 이런 무례를 참아야 하는 거냐고? 어!?”
디아나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당장 손 놔. 성추행범으로 감방에 쳐 넣어버리기 전에.”
디아나의 눈이 새빨개지며 또다시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지자 당황한 그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그에게서 빠져나온 그녀는 몰려드는 수치심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전생의 테스가 생각나서 였으리라.
무작정 앞을 향해 걷던 디아나는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꼭 감싸며 불쾌감이 가시길 기다렸다.
그런데 그녀 앞에 누군가 우뚝 멈추는 게 아닌가.
디아나가 고개를 들자 낯선 사내 한 명이 순식간에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옥죄었다.
“네가 나를 배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