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잠든 아주 깊은 밤, 테스는 부엌과 붙어있는 주방 선반 앞에 서있었다.
가져온 캔들 홀더를 그 위에 올려놓고는 궐련에 불을 붙이며 후하고 연기를 내뱉었다.
그가 내뱉는 담배 연기로 은은한 불빛이 조금씩 탁하게 흔들렸다.
오늘 대청소를 하였기에 다들 깊은 잠이 들었으리라.
끼이이이익
그는 선반을 열어 그제 새로 들어온 은제 식기 상자를 밀고 더 깊숙이 손을 넣어 오래된 은제식기 상자를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꺼내었다.
3달 동안 이걸 사용하지 않는 것을 눈여겨보았기에 몇 개 없어진다고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빼돌린 백작가 물품들은 그의 든든한 용돈 벌이가 되어 주었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테스는 조용히 발 받침대를 옮겨다 놓고 위쪽 선반을 열었다.
제일 구석에 있는 낡은 일자 은촛대 하나를 조심스레 꺼내며 피식 웃었다.
‘내가 이걸 드디어 가져가네. 장부에서 요걸 지웠는데도 아무도 체크 안 하더군. 꽤 값이 나갈 것 같은데?’
그가 비열하게 미소 지어 보이고는 담배를 꺼 흔적이 남지 않게 버린 후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알 수 없는 형체를 발견했다.
“으아읍!”
너무 놀란 테스가 소리 지르다 제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주방과 연결된 사용인들 휴게 공간에 누군가 서있는 게 아닌가?
귀신인가, 사람인가?
어떠한 움직임 없이 서있어서 물체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며 주시했더니 디아나가 거기 있었다.
“뭐야? 너... 그 아가씨한테 잘 보여서 신세 폈다던 그 하녀구나!”
제 도둑질을 어떻게 변명 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던 테스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는 그녀가 의아해져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눈이 초점 없이 허공을 향했고 얕은 숨만 들락날락하였다.
“설마.. 요즘 유행한다는 몽유병이야?”
테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잠시 묘한 표정을 짓더니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음흉하게 훑어보더니 뱀 같은 혀를 날름거리며 입술을 축였다.
“하. 요 계집애 몸매 좋네. 얼굴도 반반하니 말이야. 방으로 데리고 갈까? 아무도 모를 텐데...”
하지만 여기서 거사를 치러보는 것도 스릴 넘칠 것 같다는 더러운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랫배에서 신호가 왔다.
꾸르르르륵.
‘아이씨. 설사가 또...’
요 며칠 괜찮아졌다 싶더니 다시 신호가 왔다.
돌아갈까 잠시 고민하던 테스는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오겠나 싶어 꾸륵꾸륵 거리는 배를 조금 참아보기로 하고 하녀를 덥석 안았다.
그녀의 귀 가까이로 코를 비비며 그녀에게서 풍겨지는 향을 음미하였다.
하녀 주제에 그 체향이 은은하고 달콤해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간 테스는 그녀의 등에서 허리 매만지다 그 아래로 방향을 내렸다.
그 순간 갑자기 머리가 뒤로 휙 젖혀지며 입이 틀어 막혔고 하녀를 만지던 팔이 뒤로 젖혀지며 손목이 기괴한 모양으로 틀어졌다.
으어어어어어옥
테스가 괴성을 지르자 지안이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한번만 소리 더 내봐. 이번엔 꺾이는 거로 끝나지 않을 테니.”
“흐으으으으흑”
그래도 소리 내자 지안은 잡고 있던 손목에 더 강한 힘을 주며 비틀었다.
테스가 엄청난 통증은 나는데 소리는 못 내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꾸르르르르륵
갑작스런 기습에 힘주고 있던 복근의 발란스가 깨지면서 테스의 아랫배가 다시 일을 시작했다.
당황한 그가 급하게 엉덩이에 힘을 주긴 했지만 양손이 포박 되어있기에 다리를 꼬아 대며 안절부절 못하였다.
그런 테스 앞에 디아나가 천천히 다가와 마주했다.
“안녕, 테스.”
전생의 기억이 떠오른 디아나는 입술을 잘게 깨물며 주먹을 꽉 쥐더니 있는 힘껏 그의 아랫배를 강타했다.
푸우우욱
손이 꺾여 아프질 않나, 아픈데 소리는 내질 못하지 않나, 아랫배에선 폭동이 일지 않았나, 엉덩이에선....
미치고 환장할 테스의 얼굴이 구겨질 대로 구겨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헤이든이 그의 입에 재갈이 물리고 두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 드러워 죽겠네. 이러려고 먹인 건 아니었다, 테스.”
‘어? 이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 헤... 헤이든?’
테스는 저도 모르게 재갈물린 입으로 헤이든을 불렀더니 목청에 엄청난 타격을 와 켁켁 거리며 힘겹게 숨을 내뱉었다.
“입 다물라 했지. 말 안 듣네.”
지안의 섬뜩한 목소리에 거친 숨소리조차 멈추려 하자 딸꾹질까지 나왔다.
하지만 자비심도 없이 아까보다 더 큰 충격이 아랫배로 날라 왔다.
푸우우우웅
왜 아랫배를 때렸는데 그의 둔부에서 소리가 나는 것일까...
디아나와 헤이든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 대장. 거.. 거기 그만 건드립시다. 아오.. 냄새가..”
“괜찮나.”
지안의 건조한 목소리가 디아나에게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만 더 소리 내봐. 이번엔 진짜 목이 나가떨어질 테니. 걸어.”
지안이 그의 뒤통수를 딱 때리며 잡아 끌었고 테스는 실낱 같은 정신 줄을 붙들고 한걸음, 한걸음 힘겹게 나아갔다.
‘차라리 귀신이 나았겠다.... 젠장!’
꾸르르륵르르륵
미친 듯이 신호해 대는 배와 찝찝한 엉덩이 때문에 테스는 자신이 어디로 얼마나 끌려가는지 가늠할 여유없이 온 신경이 아랫배로 쏠려있었다.
한참을 가다 붙들린 팔에 의해 멈추어 섰다.
쿰쿰한 냄새가 그의 코로 들어오자 자신의 엉덩이에서 나는 냄새라 확신한 그가 수치심에 눈물까지 났다.
쓱쓱쓱 어떤 지푸라기를 쓰는 소리가 나고,
끼이이익 나무판자가 열린다.
갑자기 포박되어 있던 테스의 손이 잡아 끌려가자
‘뭐지? 뭐지! 아무 소리 안 했잖아! 손을 자르려는 거야?’
겁을 먹은 테스가 소리를 지르려는데 문득 어떤 익숙한 촉감이 그의 손이 닿았다.
‘설마....!’
위이이잉 덜컥
테스가 재갈물린 입으로 “앙왜에에엑!” 소리를 지르자 아랫배의 묵직한 공격에 그의 몸이 붕 날아가 벽에 부딪혀 쿵 떨어졌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그의 아랫배는 또다시 고된 업무를 시작하였다.
“마법금고는 처음 봤어. 방금 마정석에 손을 올린거야?”
“응. 테스의 손에만 반응하는 거 같아. 마구간 아래에 잘도 숨겼네.”
디아나가 대답하며 금고의 문을 열어 보니 다수의 책들과 서신 다수를 꺼내었다.
그 서신들을 뒤적거리다가 무척 낯익은 하나를 발견했다.
전생에 사용인이 알려주어 이곳으로 달려와 보니 허무하게 비어있던 금고의 존재에 얼마나 섬뜩했던지...
우연히 떨어져 있는 이 서신을 마침 백작 저택을 들렸던 랄츠만 남작에게 주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버지에게 전해 달라 부탁했던 것인데 그게 오해를 일으켜 소공작에게 전달된 걸까?
디아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서신을 뜯어보았다.
[안개가 걷히면 물을 찾는 이리들이 먹이를 찾아 나선다.]
다시 봐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 디아나가 금고 속 자료들을 소중하게 안은 채 헤이든에게 그 서신을 건넸다.
“이게 뭘까? 헤이든.”
헤이든이 무심히 받아다 보더니 급하게 뒤돌아 지안을 불렀다.
“대장!”
디아나도 시선을 돌려 그 ‘대장’이란 사람을 바라보았다.
약속시간에 맞춰 온 헤이든과 함께 동행한 사람.
기사출신이라 도움이 될 것 이라는 헤이든의 말에 함께 오긴 했는데 전생에서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테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칠흑같은 검은색 머리에 은빛 눈동자.
도자기 같은 매끈한 피부에 다부진 입술.
슬림하지만 건장한 체격으로 옷발이 장난 아닌 저 세련된 자태.
온화한 인상 덕에 가까이에만 있어도 주변이 따뜻해지는 미남자였다.
이야... 무슨 남자가 저렇게 예쁘게 생겼니.
디아나의 므흣한 생각이 흐르는 동안 대장은 무심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제가 발로 차버린 테스의 아랫배에다 천천히 손을 얹었다.
환생한 이후로 디아나는 지금 제 머리 위에 돌아가고 있는 빨간 숫자 2말고 또다시 특이한 것을 보게 되었다.
복부에 올린 대장의 손에서 은백색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던 것이다.
그러고 나니 부들부들 떨고 있던 테스의 몸이 축 쳐지는 것을 보자 디아나는 그게 뭔지 몹시 궁금해졌다.
물어보려 입을 열었지만 헤이든의 말이 더 빨랐다.
“이 와중에 그런 놈을 뭘 챙기고 있어요.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급히 다가가 대장에게 서신을 건넸고 그 내용을 본 대장도 놀란 듯 디아나를 쳐다보았다.
“저 금고가 여기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곱상한 얼굴에 비해 굵은 목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간지럽혔다.
무슨 목소리도 잘생겼나.
“그냥... 저번에 테스가 여기서 꿍얼 거리는 걸 본 적이 있어요. 뭘까 싶어서 와 본 거죠.”
지안은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그녀가 안고 있는 서류들과 서신들을 힐끗 보았다.
“그것들 좀 봐도 되겠나?”
허. 이 잘 생긴 총각 좀 보게. 날 강도가 따로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