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나는 진 마르소 드 아르디안 소공작을 열렬히 사모했다.
일방적이긴 했지만.
산타하 백작가는 아르디안 공작가의 오랜 가신 가문으로 유스티나가 어렸을 때부터 교류가 잦았다.
어린 시절 그녀를 따뜻하게 돌보아주던 진의 손길을 무척 좋아했던 그녀는 아르디안 공작 부인이 되기 위해 살아왔다.
그 저주 걸린 병에 걸리기 전까지 말이다.
라리갈리마로 인해 생긴 몽유병은 그녀를 한밤중에 복도를 떠돌아다니게 만들었고 부집사 테스에게 성추행까지 당했다.
제 정신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내 피부가 조금 일찍 나았더라면... 그 망할 놈에게 당하지 않았었다면... 내가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텐데.’
디아나의 입가에 쓴 미소가 떠올랐다.
앞으로 4일 후 소공작이 마르켈 오라버니와 함께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이곳 백작 저택을 방문한다.
전생의 유스티나는 흉직한 제 모습 때문에 그토록 사랑하는 소공작을 만날 수가 없었다.
늦은 밤 그가 정원에 있다는 이야기에 창가로 뛰어간 그녀는 진이 한 여인과 포옹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아름다운 달빛 아래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이 무척 다정하고 애틋해 보였다.
[앨리스. 저 아이는 누구니?]
유스티나의 몸종, 앨리스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그 여인을 뚫어져라 관찰했다.
[별관에서 세탁 하녀로 일하고 있는 디아나입니다.]
그날 밤, 모두가 잠든 새벽녘 유스티나는 디아나를 저택 지하 감옥으로 끌고 왔다.
의자에 두 팔과 두 다리를 포박 당한 디아나.
유스티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하녀의 입을 벌려 독약을 부어버렸다.
일말의 죄책감조차 없었다.
그깟 하녀 따위 드레스에 달린 깨알 만한 보석보다도 못한 존재이다.
천한 고아 출신의 아이를 사라지게 만드는 건 매우 쉬운 일이었다.
디아나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된 진은 백작 저택을 떠났고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소공작을 만나기 전에 이 저택을 빠져나가자. 어서 치료를 해줘야지.’
유스티나는 그 이후에 백작가의 정원사의 도움으로 치료 방법을 찾아냈다.
안타깝게도 새로운 삶을 살겠다 결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르디안 공작 시해 공범자로 누명을 쓰고 죽고 말았지만...
하지만 지금이라면... 소공작이 오기 전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어우. 그 선임만 아니었어도 진작 유스티나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너무 늦었어. 서둘러야 해.’
본성 안으로 들어선 디아나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똑똑똑
문이 열리고 오랜 정이 들었던 앨리스가 얼굴을 내밀었다.
유스티나를 10살 때부터 몸종으로 섬겼던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도 그녀를 아끼고 지켜주었던 충심 깊은 여인이다.
‘대신 디아나를 직접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 폭행했던 인물이기도 하지...’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라니...
마음이 찡해진 디아나는 고개를 몇 번 흔들며 정신을 차리고는 앨리스를 똑바로 응시하였다.
“무슨 일이야?”
“유스티나 아가씨를 만나러 왔어.”
굉장히 건방진 그녀의 말투에 앨리스는 기가 막혔다.
디아나의 허름한 복장을 훑어보니 백작 저택에서의 최하급 계층인 세탁 하녀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었으리라.
“너 따위가 유스티나 아가씨를 왜?”
“내가 아가씨의 피부를 낫게 할 수 있으니까.”
“뭐?”
“그러니 어서 들어가서 아가씨께 라리갈리마를 치료할 사람이 왔다고 전해.”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말하는 이 건방진 세탁 하녀에게 본때기를 보여줘야겠다 생각한 앨리스는 당차게 디아나에게 다가가 손찌검을 날렸다.
탁
순식간에 그 손을 낚아 챈 디아나.
문제는 그렇게 행동한 디아나 본인자신이 더 놀라버렸다.
‘디아나, 얘 뭐니? 나도 모르게 몸이 반응하는데?’
얼굴도 예쁜 게 순발력도 뛰어나다.
어머, 얘 좀 쩐다.
앨리스가 놀라 잠시 주춤했다가 이내 이를 악물며 손에 힘을 주어 그녀를 밀치려 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니, 앨리스?”
유스티나가 그들에게 다가온 것이다.
내가 내 앞에 서있다.
디아나는 전생의 자신을 바라보니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이제는 내가 아닌 내가 눈앞에 서있는 게 어색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드는 생각은...
‘내가 저런 얼굴을 하고 살았나?’
검게 경화된 칙칙한 피부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쌓아온 성격이 드리워진 얼굴에는 히스테리로 가득 찬 표독스러움이 있었고 매우 지치고 힘겨워 보였다.
‘아르디안 최고 미인이라 칭송 받던 내가 저런 못된 얼굴을 하고 있다니... ’
디아나는 전생에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와 저도 모르게 유스티나를 와락 껴안을 뻔했다.
지금 저 마음이 얼마나 힘들까...
저주로 인해 병들어가는 제 모습에 얼마나 슬플까...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해 매번 사교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했던 아이인데 아무하고도 만나지 못하는 저 상황이 얼마나 외로울까...
디아나는 착찹한 마음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앨리스는 붙잡힌 손을 뿌리치며 물러나더니 유스티나 옆에 자리를 옮겨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아가씨. 하찮은 세탁 하녀인데 갑자기 와서 난동을...”
“내 피부를 치료할 수 있다 하던데?”
디아나는 입술을 잘게 깨물고 마음을 추스렸다.
그리고는 치마를 올리며 무릎을 굽히고는 전생의 나에게 예를 차렸다.
“백작영애를 뵙습니다. 디아나라고 합니다. 제가 아가씨의 치료를 돕겠습니다.”
“어떻게?”
“제가 치료 약을 알거든요.”
“치... 치료약!?”
“알려 드릴 테니 그에 맞는 보상을 해주세요.”
그렇게 말한 디아나는 씩 미소를 지었다.
“웃기는 아이네.”
당돌한 그녀의 제안에 유스티나는 실소를 내뱉었다.
‘근데 전생의 나야. 살긴 사는데... 이왕 살 거 잘살아야지. 이런 얼굴을 썩힐 순 없잖아?’
디아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전생의 저도 구해야 하지만 현생도 챙겨야 하지 않겠어?
소공작을 만나기 전 이곳을 나가면 살 궁리는 마련해 놔야지.
“제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만약 낫지 않으신다면 제 목을 베어 저 멀리 수도 한복판에 걸어 놓으셔도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20년 전 리암 제국의 황제, 고르디아스 바르온이 반역을 꾀한 현 황제 카를로스 듀켈에게 목이 베어 성문 꼭대기에 5년 동안 매달려 있었던 역사가 있기에 이런 건 무척 무례하고 난폭한 언사였다.
하지만 디아나는 자신을 알았다.
이런 어투가 오히려 지금의 유스티나를 더욱 자극하고 솔깃하게 만들 것이라는 걸.
“... 들어와.”
새침한 표정의 백작 영애가 손짓하며 방으로 들어가자 디아나는 앨리스를 지나쳐 그 뒤를 따랐다.
너무나 익숙한 방..
디아나는 딱히 이곳이 그립다거나 애틋하지 않았다.
라리갈리마로 인해 겪었던 악몽 같은 오랜 투병 생활.
마르켈 오라버니가 이곳으로 뛰어 들어와 당장 도망가라고 소리치던 순간.
이곳에서 있던 모든 일이 떠오른 디아나는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아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유스티나는 티타임을 즐기고 있던 폭신한 패브릭 소파에 앉아 팔짱을 꼈다.
디아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쭉 훑어본 그녀는 비소 섞인 얼굴로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네가 내 피부를 낫게 해준다면 내 뭔들 못해주겠니? 원하는 보상이 뭔데.”
“루바냐에 있는 아가씨의 별장을 저에게 주세요.”
“뭐?”
“그리고 이곳 세탁 하녀를 그만두고 싶습니다.
그만 둘 때 퇴직금도 넉넉히 챙겨주세요.”
당돌한 하녀의 말에 어이가 없어진 백작영애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네 년이 어떻게 그 저택을 알지?”
“백작님께서 자주 가시는 저택 아닙니까. 소문으로 익히 잘 알려진 곳인데요, 뭐.”
디아나는 아르디안 공작령 소속 산타하 백작이 아르디안 가문과 철천지원수인 듀켈 가문에게 각종 뇌물을 쏠쏠하게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백작가의 재산이 정확히 얼마 인지는 몰라도 자식들을 끔찍하게 아꼈던 백작이 유스티나에게 넉넉히 챙겨 준 자금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가 너인데 뭘 모르겠니?’
디아나를 죽인 이후로 백작저를 찾지 않는 진에게 어필하고 싶어 제가 가진 재산들을 쏟아 부어주며 공작가를 후원했었다.
그러니 ‘아직은’ 유스티나에게 넉넉한 자금이 남아 있으리라.
류바냐 해변에 있는 저택 정도라면 꽤 나긋나긋한 생활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 외모면 잘 생긴 남작 하나 꼬셔 오순도순 행복하게 잘 살겠지.’
늘씬하고 매끈한 이 몸으로 미남자와 함께 해변에 누워있는 제 모습을 상상한 디아나의 얼굴에 므흣한 표정이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