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예는 재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해맑게 옆에서 얘기했다.
하지만 재연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재연의 머릿속엔 온통
바보 멍청한 새끼
뿐이었다.
재연답지않게 그리도 빠르게 원래직업을 거의 들켜버렸고 말도 안되는 요구를 승낙해버렸다.
돈을 받지않으면 자신이 누군가를 이어줄 이유가 없었는데 말이다.
한편 나예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인기많은 남자의 비법을 전수받는다는건 꽤나 자신의 사랑에 있어 도움이 될것같았다.
재연은 거의 한마디도 하지않고 나예를 바래다 줬다.
“도착했어요 나예씨”
“아 고마워요 우리 언제 다시 만나죠?”
다시 본다는것은 곧 자신과 혜우의 일에 대해 얘기하자는 것이었다.
재연은 나예모르게 이를 갈았다.
겉으로는 해사하게 웃으며
“글쎄 내일 회사에서요?”
나예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래요 잘가요 재연씨”
나예가 손을 흔들어보이곤 뒤돌았다.
재연도 웃으며 손을 흔들고 나예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곧 차를 출발시켰다.
얼굴에 은은하게 피어있던 미소는 이미 사라진 채로.
가슴속에선 열불이 터졌다.
몇백년만에 나타난 이상한 감정이 피어오르는 사람이었다.
재연은 차를 세우고 쾅하고 핸들을 내리쳤다.
다행히 부서지진 않았지만 경보음이 들려왔다.
재연이 신경질적으로 차에서 나와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냉장고를 열어 팩을 꺼냈다.
단숨에 한팩을 끝내고 두팩째 집어들었다.
새로운 팩도 단숨에 들이켰다.
입가를 손으로 문질러 닦는 재연의 눈동자가 조금 붉어졌다.
세팩째를 집어든 재연이 손이 멈칫했다.
그제서야 이성을 조금 되찾은것 같았다.
급히 거울을 확인하곤
“씹...”
욕을 곱씹었다.
내일 회사에 나간다면 분명 귀찮은일이 평소보다 몇십개는 더 발생할것이다.
재연은 나예에게 문자를 보냈다.
‘몸이 좀 안좋아서 내일 회사는 못갈것 같아요 미안해요’
바로 답장이 왔다.
‘많이 아파요?큰일이네’
‘많이 아프진 않아요’
‘그럼 푹 쉬고 제가 재연씨 집으로 갈까요?’
(이모티콘)
재연이 살짝쿵 인상을 찡그렸다.
뭔가 다른 의도는 없어보였다.
텍스트밑에서 해맑게 날뛰고 있는 저 토끼를 보자면.
재연은 자신의 귀찮음때문에
‘그래주면 나야 고맙죠’
수락했다.
‘고맙긴요 아픈 재연씨 붙잡는 내가 더 고마워 해야할 일을요’
재연은 대충 괜찮다는 이모티콘을 하나 보내고 대화를 끝냈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정말 아픈가”
열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이마에 손을 짚곤 침대에 누웠다.
잠에 들기 위해 노력하다가 새벽3시쯤 겨우 잠에 들었다.
다음날 거의 점심을 먹을때쯤 재연이 눈을 떴다.
점심시간까지 업무를 몰아서 보고 재연의 집에 오려고 전화를 거는 나예때문이었다.
재연이 휘적휘적 걸어서
“여보세요”
전화를 받았다.
“저 지금 회사끝났는데 가도될까요?”
지나치게 상기된 목소리였다.
에너지가 가득 차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재연까지도 활기차게 만드는 목소리.
결국 재연이 피식 웃음지었다.
“그래요”
핸드폰 너머에서 기뻐하는 소리가 들렷다.
“주소보내주시면 갈게요!”
“네”
전화를 끊고 재연이 주소를 보냈다.
고작 월급쟁이가 지나치게 좋은 집에서 산다싶었지만 투잡을 뛴다고 말하면 될터.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나예의 발소리가 들렸다.
뭔가 먹을거리를 사온 모양이었다.
재연이 피식 웃곤 문을 열 준비를 했다.
나예가 초인종을 누르고
“어서와요”
웃으며 반겼다.
나예가 웃으며
“몸은 좀 괜찮아요?”
손에 들린 케이크를 내밀었다.
재연이 고마워하며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이제 괜찮아요”
현관문앞에서 살짝 길을 내줬다.
나예가 조심스럽게 들어와 두리번거렸다.
“우와 집 엄청 좋네요 혼자 살아요?”
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우리 서로 나이도 모르지않아요?”
재연은 다 알고있지만
“그러네요”
나예가
“저는 26살이예요”
재연이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몇살이라고 해야하지?
지금 난 몇살처럼 보이지?
“29이예요”
“동안이시네요”
그 대답에 재연은 그 오래전 자신이 죽었던 날을 떠올리려고 했다.
기억이 나지않았다.
“고마워요 편히 앉으세요”
재연이 나예가 사들고온 케이크를 접시에 담고 차를 내왔다.
나예가 소파에 앉아 차를 들었다.
“무슨차예요?”
“아마 장미,사과블렌딩 일꺼예요”
나예는 고개를 끄덕이며
“향이 좋네요”
그리곤 정적이 이어졌다.
그 정적을 깬건 재연이었다.
재연이 노트북을 꺼내며
“계획부터 세워볼까요?”
나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 그럴까요”
나예가 재연의 옆으로 붙어앉았다.
노트북 전원이 켜지는 동안 나예가
“제가 여중,여고를 나와서 청소년기에 남자랑 말을 섞을 기회가 많이 없었거든요 남자친구도 몇없었구요”
의외였다.
재연이 고개를 갸우뚱하곤 무의식적으로 혼잣말처럼 속마음을 말했다.
“의외네요 인기 많아서 남자친구 많았을것 같은데”
나예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 아니예요”
재연은 그제서야 자신이 소리내어 말한것을 눈치챘다.
“그 강혜우랑은 어떻게 친해진거예요?”
“친하진 않아요 그냥 인사하고 말몇번 섞어본거죠”
나예의 말이 잠시 멈췄다.
“혜우씨는 누구한테나 친절해요 전 그게 좋았어요 그 누구안에 저도 포함되어 있는거잖아요”
재연은 혜우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제가 엄청 말걸었어요 친해지고 싶어서”
나예가 포크로 당근케이크를 푹 찔렀다.
“그래서 이정도 아닐까요 제가 말안걸었으면 이정도도 못왔을꺼예요”
재연은 느껴버렸다.
나예의 피곤함을.
열번찍으면 넘어가줘야지 성취감이 드는데 50번을 찍어도 미동도 없으니 슬슬 지쳐가기 시작한것이었다.
이게 마지막 수단이 될수도 있겠구나.
재연이 부팅된 노트북으로 한글 프로그램을 켰다.
“제가 좀 고수여서”
그리고 눈보다 빠르게 이전 고객중 나예같은 케이스를 찾았다.
“준비를 좀 해놨어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약간 수정을 거쳤다.
•접근한다!
•전화번호를 알아낸다
•친밀해진다
•여행간다
•열애설난다
•-1고백한다/받는다
재연이 세운 계획을 보고 나예가 당황했다.
“약간 초등학생같은 면이 없지않아있네요”
그렇게 말하고 나예가 재연 눈치를 살폈다.
재연은 익숙한듯 생긋 웃어보였다.
“그래서 걱정돼요?”
나예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재연이 손을 뻗어 건너편에 있는 나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요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
미소지으며 말이다.
그 미소는 순식간에 사람 마음을 놓이게 했다.
그래서 나예는 자신도 모르게 덩달아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요”
그 미소는 재연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녀의 사랑은 그를 아프게 했다.
와장창 깨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