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며칠 후 시몬느의 가족이 후작의 성에 당도했다.
그들은 견고하고도 고풍스러운 성을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다 집사의 에스코트를 받아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그 전, 성에 도착한 시몬느의 동생 엠마는 자기 가족을 향해 걸어오는 한 남자를 발견하곤 그 자리에서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흑발의 머리에 약간 휘어져 다소 거만해 보이는 콧날, 그와는 동떨어지게 선량한 눈빛을 가진 20대 후반의 훈남. 그는 그녀가 평소 꿈꿔왔던 딱 그런 이미지의 소유자였다.
시몬느 가족에게 다가온 그가 입을 열었다.
“저는 이 성의 집사 중 한 명인 알랭이라고 합니다. 손님들을 응접실로 모시라는 후작님의 말씀에 따라 여러분을 모시겠습니다. 후작님께서는 지금 주방에 잠시 계시는데, 곧 도착하실 거라 말씀 올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절도 있게 그들을 에스코트했다.
그들이 도착한 응접실에는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고, 곧이어 시몬느가 나타나 반갑게 가족을 맞았다.
“후작님께서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니 예쁘게 꾸미고 내려오라 하셔서 좀 늦었어요.”
그녀의 이런 말에 가장 충격을 받은 건 물론 엠마였다.
평소의 언니랑 많이 달라진 시몬느의 모습에 그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고, 또 한 편으론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남자에 대해 언니에게 알려야 했기에 더욱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부모님과 포옹하기를 마친 시몬느가 엠마에게 포옹하려는 그때 엠마가 시몬느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언니, 우리 저쪽으로 가서 얘기 좀 할까?”
“응. 그래.”
하면서 시몬느는 부모님께 양해를 구하고 엠마와 함께 응접실에서 나와 구석진 곳으로 갔다.
“누구야? 그러니까 흑발에 왜 있잖아? 세상에 누구도 감히 견줄 수 없는 마성을 지닌 그 남자? 우릴 에스코트했던.”
“누구? 아, 혹시 알랭 집사님을 말하는 거니?”
“응. 그래 맞아. 본인을 알랭이라고 소개했어.”
“그런데 왜? 너 혹시...”
“그 남자 이제부터 내가 찜했어.”
“뭐라고? 그건 안 될 말이야! 절대!”
“안되다니! 뭔 소리야? 내가 찜했다니까?”
“그분은 그럴 수 있는 분이 아니야.”
“뭐래? 혹시 임자가 있는 몸이야? 이미 결혼한 거냐구?”
“그게 아니고... 지금 말하긴 좀 그렇고. 암튼 일단 응접실로 돌아가자. 나중에 얘기해줄게.”
하면서 시몬느는 엠마의 손을 이끌고 응접실로 돌아갔다.
그곳엔 후작이 이미 도착해 그녀들의 부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족들께 대접할 음식에 대해 주방에서 얘기 좀 나누고 옷 갈아입고 오느라 조금 늦었는데 시몬느는 어디 다녀오는 거지? 엠마 양과?”
“잠깐 얘기 좀 나누느라고요.”
하면서 시몬느가 명랑한 분위기를 유지하려는 것에 반해 평소 당차고 활달하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엠마는 굳게 입을 다문 채 심각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후작의 눈에 포착됐다.
그런 엠마를 보더니 후작이 몹시 궁금하단 표정을 지으며 눙쳤다.
“귀여운 숙녀분께서는 그 기질이 집 밖에선 다르게 발휘되시는 모양이군요. 그런가요?”
농을 던지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엠마, 그런 그녀를 보면서 시몬느와 그녀의 부모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이를 눈치챈 후작이 태연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사람이 늘 한결 같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겠죠. 신이죠. 자 우리 함께 식당으로 갈까요?”
하면서 후작이 그들을 능숙하게 에스코트했다.
기대에 찬 표정의 시몬느 부모와는 다르게 시몬느와 엠마는 각자 생각에 빠져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후작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식당에 도착해 함께 식전 음료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둘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한 명은 사랑에 눈이 멀어 그 눈을 뜨기가 차마 두려워서. 또 한 명은 동생의 멀어버린 눈을 기어코 뜨게 만들어야 한다고 여기기에 둘은 다 지나칠 정도로 경직돼 보였다.
이 둘을 위해 후작이 고역을 치르고 있었다. 둘 사이를 왕복하며 눈치껏 때에 맞춰 음식을 권하고, 분위기를 돋우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였다.
다행히 그녀들의 부모는 눈치채지 못했거나 혹은 모른 척하면서 후작의 환대에 마냥 기분 좋은 표정으로 일관했고, 그렇게 저녁 식사가 계속 이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차와 디저트까지 곁들여 담소를 나눈 후 드디어 모든 일정이 끝이 났다.
시몬느를 제외한 그녀의 가족이 작별인사를 마치고 마차에 올라 그들의 집으로 떠나려는 그 순간, 갑자기 엠마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저, 후작님! 저는 언니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이 성에 며칠 더 머무를 수 있을까요?”
좀처럼 방문 내내 평소와 달리 입을 열지 않던 엠마가 입을 여니 후작은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론 반가워했다. 그리고 이렇게 답했다.
“물론입니다. 숙녀분께서 머무르시길 원하신다면 당연히 머무르실 수 있죠. 부모님께 허락을 구하신 후에요.”
그러자 엠마는 평소의 모습대로 활달하게 마차로 뛰어가 아버지께 뭐라 말을 하곤 다시 돌아왔다.
시몬느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엠마가 돌아와 후작에게 외쳤다.
“아버지께서 허락해주셨답니다. 후작님께 결례가 되는 행동을 절대 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걸으시면서요. 후후.”
그런 엠마를 보면서 시몬느는 근심이 더 깊어졌다.
워낙 하고자 하면 끝까지 하고야 마는 그녀의 성정을 잘 알다 보니 이제부터 벌어질 일들에 대해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후작은 그런 시몬느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시몬느가 엠마에게 묵을 침실을 안내하고 내려왔을 때 그녀에게 말했다.
“무슨 일로 그리 근심 어린 표정을 짓는진 잘 모르겠지만 난 엠마 양이 참으로 맘에 들어. 나 역시 누군가가 날 그렇게 확신에 차 사랑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의 그런 말에 시몬느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아니, 무슨 일인지 벌써 다 알아채신 건가요? 어떻게 아셨죠?”
“내가 부엌에서 음식 이야길 끝내고 잠깐 내 방으로 가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도착한 부모님 마차가 보이더군. 거기서 내리는 귀여운 엠마 양도. 그리고 그녀가 알랭 집사를 보자마자 보였던 표정도 말이지. 하하.”
그의 관찰력에 시몬느는 다시 한번 놀라며 그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어떡하죠? 알랭 집사님은 절대 안 되는 분이라고 말해도 전혀 마음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요. 게다가”
후작이 의외라는 듯 놀란 표정으로 외치며 말을 가로챘다.
“왜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알랭이 남자라도 좋아한다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고... 알랭 집사님은 정령사라면서요? 제가 책에서 읽었는데 정령사들은 결혼을 할 수 없다고 되어 있던데요.”
후작이 이제 알겠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나긋이 말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책에 적힌 내용이지. 세상에 예외 없는 법은 없는 법이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어찌하면 나다워지는 것인가 일 텐데 왜 자신을 그런 도그마의 희생양으로 만들어야 하지? 이미 알겠지만, 우리 모임은 절대 그런 율법 같은 건 용납하지 않아.
알랭 역시 우리 모임에 직접 참여하고 있진 않지만, 뜻을 함께 하는 내 최측근이라 우리와 생각이 같다고 볼 수 있고.”
시몬느는 얼굴이 점차 환해지면서 들뜬 표정이 되었다.
“아! 그렇다면 당장 내 동생 엠마에게 이 사실을 알려... 아니네요. 내가 안 된다고 했던 게 오해였다고 말하면 되겠네요. 그런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그게 좀...”
하며 시몬느가 생각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걸 바라보던 후작이 나지막이 덧붙였다.
“인생에서 행복을 찾느냐 못 찾느냐는 본인의 의지에 달린 문제니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두는 게 최선일 듯싶다는 게 내 생각이긴 한데...”
그의 말에 다시 잠시 생각에 젖던 시몬느가 말을 이었다.
“후작님 말씀이 맞아요. 행복은 본인의 의지로 쟁취해야죠.”
하면서 후작에게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시몬느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져 후작에게 굿나잇 인사를 건넨 뒤 자신의 처소로 올라갔다.
너무도 당연하게 그 전에 엠마의 방에 들러 그녀의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도닥이는 게 먼저였고.
다음날 눈을 뜬 엠마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알랭을 찾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여기저기를 살피던 엠마의 눈에 드디어 알랭이 들어왔다.
그는 마굿간에서 말을 보살피는 중이었다.
엠마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이 말은 여자인가요, 아니면 남자인가요?”
엠마의 등장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그가 무심히 대답했다.
“남자입니다.”
“아, 남자. 그런데 이름은 뭐죠?”
“프쉬케랍니다.”
“어? 전 프쉬케하면 에로스랑 사랑했던 그 여자...”
“물론 그 여자 이름도 프쉬케지만, 제 말 이름 프쉬케는 정신과 영혼을 의미합니다.”
“아, 정신과 영혼. 좋네요. 그럼 나이는요?”
“5살입니다.”
잠시 알랭을 몰래 훔쳐보던 엠마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딴 데를 쳐다보다 뭔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참, 제 언니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젯밤 언니에게 들었어요.”
“전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도 알랭님 아니었음 우리 언니는 아주 큰 일 날 뻔했다고 하던데...”
“제 일이니까요.”
“그래도 감사한 마음이 있으면 그걸 표현하는 게 맞죠. 그래서 전 정말 감사하단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네.”
“그런데 늘 그런 식이신가요?”
갑작스럽게 도전적인 질문을 받게 된 알랭이 당황하며 대꾸했다.
“그런 식이라니요?”
아무렇지도 않게 알랭의 두 눈에 적대감 없는 레이저를 쏘아대며 엠마가 계속 했다.
“아까 말, 그러니까 프쉬케 얘기할 때 빼곤 너무 단답형으로 의례적이시라 제가 말을 이어가기가 좀 그렇잖아요?”
“그저 제 일이 그런 것이라 제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한 것뿐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러니까요. 이렇게 길게 말씀하시니까 좀 좋아요! 대화란 상대가 뭔가 말을 이을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게 맞는 거랍니다.”
아무 말 없는 알랭의 뒷꼭지만 바라보다 다시 엠마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오늘 뭐 특별한 일 있으세요?”
알랭이 고개 돌려 그녀에게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다만, 왜 그러시죠?”
“전 이 집에 초대받은 손님이잖아요? 아까 말씀하신 알랭님이 하셔야 할 일 중에 혹시 손님을 위한 일도 있나요? 그러시다면 손님으로서 청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사실 손님을 위해 특별히 뭘 해야 하는 건 없습니다. 하지만 후작님을 위한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만.”
“와~ 말씀이 정말 많이 길어지셨네요. 으음... 하날 배우면 열을 알아들으시는 모양새에요. 아주 좋아요.
참, 그건 그렇고, 제가 드렸던 말씀, 그러니까 손님으로 청하고 싶은 게 있다는 얘긴 분명 후작님을 위한 일이기도 할 거예요.”
“뭐죠?”
“이미 아시겠지만, 후작님께선 우리 언니에게 지대한 관심을 넘어 엄청난 사랑을 느끼고 계시죠. 그런 언니는 절 엄청나게 사랑하고요.
자, 그럼 여기서 우리 공식 하나 생각해볼까요? 란 명제를 들으시면 뭐 떠오르시는 거 없으세요?”
뭔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가 말을 이었다.
“글쎄요. 제가 공식에는 영”
많이 답답하다는 듯 엠마가 그에게 이렇게 쏘아붙였다.
“아니, 이건 뭐 복잡한 산수 뭐 그런 게 아니에요. 가장 간단한 공식이에요.
보세요. 후작님은 제 언니를 사랑한다. 제 언니는 절 사랑한다. 그렇담 어떻게 되죠? 후작님은 절 사랑한다! 이런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겠어요?”
이제 알겠다는 듯 그가 응답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한 결론입니다만, 그래서 제가 뭘 해드려야 하는 거죠?”
“후작님께서 사랑하는 절 위해 알랭님께서 제게 시간을 좀 내주세요. 절 숲으로 안내해 숲을 구경시켜주세요.”
“숲이요? 뭐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일단 그럼 후작님께 다른 일이 없나 알아본 후 답변드리겠습니다.”
엠마는 일단 좋은 시작이라 여겨 마음이 들떴다.
그래서 시몬느를 찾아 얼른 성 안채로 뛰었다.
그런 엠마를 바라보며 알랭은 알다가도 모르겠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