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여기가 이제부터 네가 지낼 방이야.”
나는 방의 문을 활짝 열며 그에게 새로운 방을 안내해주었다.
이레스는 방안으로 들어와 주위를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옥 같은 그전 방과는 달리 침대와 작은 협탁도 놓여있었고 창문이 있어 따스한 햇빛이 공간을 밝게 비추어주었다.
‘역시 새로운 방을 내주기를 잘했어.’
그전에 지냈던 방은 창문이 없어 햇살이 들어오지 않는 데다가 이레스를 감금한 공간이기도 하니까.
거기다가 로민이 이레스를 학대한 공간이기도 하고...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지!’
그 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좋은 방을 둘러보며 나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짓고는 침대에 앉았다.
‘역시 푹신해!’
나는 침대의 푹신함을 느끼며 그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이리와.”
그리고 앉으라는 뜻으로 내 옆을 두드렸고 이레스는 잠시 주춤하다가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레스는 침대에 앉지 않은 채 계속 아래만을 보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서있는 이레스를 보다가 그의 손목을 살짝 잡아끌었고 내 힘에 이레스는 엉거주춤 내 옆에 앉았다.
“어때? 푹신하지?”
나의 물음에 이레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가 만족해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은 나는 손을 펼쳐 침대를 다시 팡팡 두드렸고 침대는 얕게 진동을 울리며 움직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이레스의 옆얼굴을 바라보니 그의 귀 끝이 빨개져 있는 것이 보였다.
“혹시 어디아파?”
나는 혹시 그에게 열이라도 있는 건 아닌가하고는 손을 들어 그의 이마에 손등을 대었다.
“미열이 있는 것 같기도...”
“......”
“혹시 감기인가....”
그리고 손을 내리고는 그의 안색을 보는데 이레스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그래? 하지만 열이 좀 있는 것 같은데?”
“더워서.”
나는 그의 짧고 간결한 대답에 눈을 끔뻑거렸다.
“덥다고?”
“응.”
지금은 겨울이 끝나가고 봄이 오려는 계절이다.
그래서 아직은 더울 정도까지는 아니고 바람이 불어 약간 서늘하기도 한 날씨이다.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인가?’
그 생각을 하며 나는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창문을 여니 시원한 바람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창문 열어놨으니까 덥지는 않을 거야!”
“응.”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그의 옆에 앉았고 그와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앞으로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그리고 혹시 만약에라도 아프거나 누가 널 때리면 말하고!”
“응.”
“그리고...”
그에게 또 해줄 말이 있나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나는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는 손바닥을 치며 그에게 물었다.
“아! 너 말이야. 혹시 검술 배우고 싶은 생각 있어?”
“검?”
“응! 보통 네 또래 남자아이들은 검을 배우더라고. 그래서 너도 배우고 싶어 하나 해서. 그리고 검 배우면 나중에 위험에 처했을 때 자기 몸 하나 지킬 수 있잖아?”
나는 소설에서 그가 오러를 잘 다를 수 있을 정도로의 검의 천재라고 묘사되어있는 것을 기억하고는 눈을 빛내며 그를 보았다.
그리고 내 예상에 맞게 이레스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답을 했다.
“그럼 언제든지 훈련해. 다른 사람 눈치 보거나 하지 말고.”
“.......”
“거기서 누가 널 트집 잡으려고 한다면 내 이름을 꼭 말하고! 알았지?”
“응.”
그의 두 손을 꼬옥 잡으며 나는 단단히 일러두었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은혜 절대로 잊지 말라는 생각.
그리고 절대 나를 배신하지 말라는 생각.
나는 이만 나가봐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였고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제 난 내 방으로 갈게. 푹 쉬어!”
“......”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는 뒤를 돌아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막 문고리를 잡으려고 하던 그때, 이레스가 내 손목을 다급하게 쥐었다.
나는 살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고 이레스는 나를 직시하며 물었다.
“내가... 부르지 않아도 올 거야?”
“어?”
그의 뜬금포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살짝 안도의 기색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이어질 이레스의 말에 나는 놀라 눈을 여러 번 끔뻑이며 자신이 잘 들은 것이 맞는지 의문을 가졌다.
“이레스.”
“어....?”
“내 이름.”
“......”
“계속 너라고 부르길래...”
‘잠깐만... 서브 남주님? 진짜 이름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밝혀도 되는 거였어요?’
아니지... 이름이 저거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래도 저렇게 밝혀도?
내 동공은 사정없이 흔들렸고 그는 내 검은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며 무언가를 바라는 듯한 눈빛으로 보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이레스에게 홀린 듯.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이레스.”
“응.”
그의 이름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자 이레스는 웃었고 나는 그의 미소를 보며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인사를 건네며 문을 열었다.
“그럼 나 이만 가볼게!”
“응. 레이아.”
나는 방문을 빠르게 닫고는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내가 빠르게 걷자 엘은 뒤따라오면서 의아한 기색을 했다.
“아가씨? 왜그러세요?”
“어?”
나는 걸음을 우뚝 멈추고는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내 얼굴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볼이 빨개요! 어디 아프세요?”
“아니야! 그런 거!”
“네?”
“아픈 거 아니라고. 더워서 그래.”
“네? 하지만 지금 그렇게 덥지는...”
“너 요즘 내 말에 꼬투리 잡는 거 아나 몰라?”
“아... 죄송합니다. 아가씨.”
엘은 고개를 숙이며 손을 다소곳하게 모았고 난 고개를 돌리며 손부채질을 했다.
‘갑자기 왜 그렇게 웃어가지고는.’
아까 방에서 내게 환하게 웃어준 이레스의 모습을 떠올랐다.
처음 나를 경계하고 무심한 듯한 표정이 드러나지 않았던 그가 환하게 웃으니 나도 모르게 사고가 정지되었다.
‘내가 잘생김에 면역이 이렇게 약했을 줄이야...’
하긴 현대에서는 이렇게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근데 원래 저렇게 웃어도 되는 건가?’
사람이 웃든 안 웃든 그건 사람 마음이다.
하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한 이유는 원작에서 이레스는 루디아에게만 웃어주던 사람이었다.
그 미소를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를 생각하면서 세 가지의 별명을 떠올렸다.
[냉혈한 공작]
[피도 눈물도 없는 공작]
[검과 같은 공작]
그런 사람이 나만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원작이 비틀어져도 너무 비틀어진 건 아니겠지?’
그 생각을 하며 고심하던 때,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뭐, 그만큼 날 신뢰한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이레스에게는 운명의 상대가 있으니까.
또, 여긴 소설 속에 불과하니까.
나는 아까와 달리 한결 편해진 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다가 우뚝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아가씨?”
엘은 갑자기 내가 걸음을 멈추자 의문을 표했고 난 누군가를 떠올리고는 입을 비뚜름하게 올렸다.
‘그래. 하마터면 잊을 뻔했네. 그 자식을.’
그 생각을 하며 나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엘에게 물었다.
“엘. 지금 로민 뭐 하고 있어?”
“도련님이요? 아마 지금쯤 연무장에 계실걸요?”
“그래? 로민이 지금 방에 없다는거네?”
“네!”
엘의 말에 나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나의 소중한 것을 건드렸으니까 이번엔 내가 건들 차례야.’
그리고 나는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앞 똑바로 못 보고 다녀?”
“죄송합니다... 도련님!”
저택의 한 복도, 옷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고 옷을 담아둔 바구니는 엎어져 있었다.
사건은 이랬다.
한 고용인이 옷이 담긴 바구니를 든 상태로 복도의 모퉁이를 돌았고 그때 앞의 사람을 보지 못한 채 누군가와 부딪치고 말았다.
거기다가 그 상대방이 로민이라는 사실에 그녀는 헐레벌떡 놀라 엎드린 채로 잘못했다고 빌기 시작했고 로민은 자신의 옷을 털면서 성을 내고 있었다.
“죄송하다면 단 줄 알아?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
“죄송합니다...”
연신 사죄를 하고 있는 고용인을 보며 로민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가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리며 손을 싹싹 빌고 있는 고용인의 모습에 비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래야지.’
자신을 보면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 하고 그들이 내 앞에서 기는 모습을 보면은 정말 가소롭기도 하고 우월감이 느껴졌다.
로민은 자신의 아래에 있는 고용인을 보며 웃다가 갑자기 한 사람을 떠올리고는 표정을 굳혔다.
‘근데 아까 그놈. 기분 나쁘게 생겼단 말이지?’
아침에 레이아가 며칠 전에 사 온 노예를 보러 자주 간다는 말을 듣고는 흥미가 생겨 보러 갔었는데 괜히 기분만 안 좋아졌다.
전혀 순종적이지 않고 살기를 품은 두 눈.
자신에게 그렇게 맞았는데도 신음 한번 내지도 않는 그놈.
얼굴만 번질나게 잘생겨가지고는... 재수없게.
‘뭐... 그래봤자. 내 발아래에 있는 노예 주제에.’
그는 씨익 웃으며 바닥에 엎드려 있는 고용인의 등을 신발로 눌러버렸다.
“그만해!!”
그때 경악과 놀람이 가득한 소리가 들려왔다.
로민은 소리 나는 곳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나한테 한 소리냐?”
그 앞에는 머리를 한쪽으로 내린 루디아가 그를 보며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만해... 로민. 아파하잖아.”
“하...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로민은 더욱 세게 발아래에 힘을 실었고 그 무게에 고용인은 밖으로 새어 나올 신음을 참으며 버텼다.
신음을 입 밖으로 내면은 로민이 더더욱 자신을 짓밟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루디아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고 치마를 부여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려왔다.
자신을 보고 떨고 있는 루디아를 지켜보던 로민은 걸음을 옮겨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채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부여잡았다.
“아아악...”
루디아는 잡힌 머리에 아파하며 흔들리는 눈으로 로민을 보았고 그는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그러게 왜 끼어드냐? 어? 내가 누군데. 넌 부모도 없는 고. 아. 이면서.”
“흐...흑...흑.”
로민은 고. 아. 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고 루디아는 그 말에 울음을 터트렸다.
로민은 그런 루디아의 모습을 보다가 거슬리는 듯 그녀를 밀쳐버렸다.
바닥에 밀쳐져 바닥에 닿은 부분이 아플 텐데도 루디아는 그 사실보다는 자신의 부모가 곁에 없다는 사실에 서글프게 울었다.
자신을 사랑해준 부모님이 그립고 보고 싶어서.
루디아가 서럽게 울고 있는 사이, 로민은 다시 걸음을 옮겨 바닥에 엎드린 고용인에게로 다가갔다.
고용인은 자신과 가까워지고 있는 로민의 걸음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닥쳐올 미래에 손을 떨고 있었다.
“괜히 기분만 잡치게.”
로민은 심기가 불편한 듯 인상을 찌푸렸고 발아래에 있는 고용인을 자신의 분풀이로 삼으려고 하던 그때, 누군가가 큰 발걸음 소리를 내며 자신에게로 걸어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로민은 바로 소리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그 인물이 레이아라는 것을 알고는 웃었다.
‘왜 안 오나 했다.'
힘도 없는 주제에.
그 생각을 하며 그래, 한번 와봐라. 라고 생각하던 때 레이아와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졌고 레이아는 로민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로민은 비웃음 가득한 표정을 짓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마 생떼를 부리거나 하겠지.’
레이아는 내가 생각해도 정말 멍청하다.
생각이 어린 건지... 악만 쓸 줄 알지.
그러니까 과거에 비교당하며 살았지.
그 생각을 하며 레이아를 조롱하고 있던 때 그 순간 그는 여유 넘치던 표정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악!”
로민은 오른쪽 발등을 부여잡으며 소리치며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레이아를 쳐다봤다.
‘지금 날 밟았어?’
레이아는 단 한 번도 내 발을 밟은 적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날 때리거나 한 적도 없었다.
근데 그런 레이아가 지금 자신을 처음으로 밟은 것이다.
그것도 일부러. 감히 아르첸스의 뒤를 이을 나를 말이다.
거기다 내 눈에 비친 레이아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쟤가 드디어 미친 건가?’
로민이 며칠만의 본 레이아에 대한 판단은 이렇다.
짧은 기간 동안 레이아가 미친 것이 분명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