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어... 저...저기.”
“아. 됐어. 나 신경 쓰지마. 얘기 안 해. 하던거 계속 해.”
여기 까진 내가 아는 그대로야. 그 다음은 나도 몰라. 무슨 누구한테 뭔 얘기 했는지 다 기억하는 사람이 어디있어?
너희들 키스 하는거 내가 보고 싶어서 본 거 아니잖아. 너희 놀라는 표정 때문에 내가 더 뻘쭘해.
“내년에 우리 같은 고등학교 가잖아. 그냥 너희 둘. 전학 가면 안돼?”
내 기억대로라면 이때쯤 내가 얘네 위해 망 봐주다 종쳐서 교실로 갔을텐데. 내가 괜한 말 꺼내는건 아닌지 모르겠어.
“너네 공부 잘 하잖아. 근처 다른 고등학교도 두 군데 있어. 굳이 거기 안 가도 될텐데? 지금이라도 담탱이한테 말해봐.”
너네의 표정은 내가 보던 그 어느 것도 아니야. 신기하지? 말도 안 섞고 방관만 하던 내가 이러니까.
“주... 주형태가 그러지 말랬어. 1지망에 무조건 청솔고 적으래.”
“주형태 그 새끼 말 듣지 마. 어차피 그리 살다 골로 갈 새끼야.”
“안 그러면 주형태가 예진이 데리고 모텔 간댔어. 그게 싫어.”
형민아. 그렇게 여친 아끼는 새끼가 오덕수에게는 냉큼 내줬냐?
“야. 그렇게 지킬려면 끝까지 지키던가. 아니. 왜 하필.”
더 말을 못하겠다. 널 보니 죄책감이 올라온다. 나도 햄버거 새끼한테 가스라이팅 당해서 되게 찌질해 졌거든? 너도 점점 찌질해져 가는 단계구나. 괴롭힘 당하면 그래. 멀쩡하던 애도 한순간에 미칠수 있어.
모든건 타이밍이야. 뭔가를 깨려면 고난이 필요하지.
“날 용서해라. 아니. 용서하지 마.”
“왜 그래? 무섭게...”
“야! 주형태! 거기 있지? 여기 얘네들 얼레리 꼴레리 한다!”
셔틀 커플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난 그들을 보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뭐해? 도망가.
“아니면 싸우던가.”
주형태가 오고 있다. 진짜 주형태다. 중학교 1학년때부터 사람 괴롭히는데 재미 들렸던 개새끼. 너가 왠일로 고등학교는 얌전하게 다니나 했어.
“오우. 서나현. 잘 했어. 우리 예진이가 서방 놔두고 바람이네?”
“잠깐. 묻자. 너 예진이 막 건드리고 그러는거 아니지?”
“내가 다음달 3일. 생일이잖아. 그때 먹을려고 모셔 두는데. 이형민 맞지? 호구 새끼가 어디 건드릴게 없어서.”
셔틀 커플에게 뛰어 들 참이다. 난 주형태의 뒤를 잡았다.
“그냥 쟤네 놔 줘라. 서로 사랑하게 내버려 두라고.”
그리고 셔틀 커플에게 도망가라 손짓한다. 내가 왜 이러냐고 나한테 묻는다면. 난 쟤네들한테 반항할 권리. 소리 지를 권리. 물어 뜯기라도 하라 하는거야.
“너 뭐하냐? 미쳤냐? 제보를 했으면 뒤로 빠져야지. 그럼 내가 우쭈쭈 해줄거 아냐?”
“하하. 얘는 진짜 정신이 빠진 새끼네. 내가 제보를 했다고? 너가 보고 쟤네 인정해 주라는 거야.”
셔틀 커플이 도망간다. 주형태와 따까리들이 쫓으려 했다. 난 그 앞을 막는다. 지금 나에겐 용이 새겨진 장갑도 없다. 퀘스천도 없어. 하지만 그것들을 바라지 않아. 내가 직접 하면 되니까.
“놔 주라고. 이 아비도 버린 새끼야. 너 어미도 너 버리고 살림 차렸다며?”
“뭐? 서나현. 진짜 미쳤네. 너 목숨 2개니?”
주형태. 이거 너 상처 되라고 건드린거 아니야. 난 더한 삶도 살았어.
“이제 기억이 나네. 너. 예진이 따먹고 이리 저리 돌리다가 더럽다고 버렸잖아. 그러다 오덕수가... 이 새끼가.”
예전에 달이 보여준 사건의 전말. 분명 주형태를 흉내 낸 광대 였어. 그런데 왜 오덕수가 예진이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싶었지.
“내가 큰걸 까먹었었네. 하하. 오늘 서나현 셔틀 되는 날이다! 마음껏 때려봐. 때려 보라고.”
섯불리 못 때리겠지? 나 때리면 햄버거 새끼가 날 뛸거니까. 너. 그 새끼한테 지잖아. 그게 무섭잖아.
“오늘 너 제삿날이다. 우리 절친 해보자.”
“그래. 빡쳐야 주형태지.”
내가 싸움은 잘 못해도 깨물어 버리는게 있어. 그게 나였어. 얻어 터지더라도 다시 그 모습을 찾을거야.
종이 울린다. 하지만 주형태가 날 놓을리 없지. 헤헤. 때려. 패. 난 주먹이라도 잡아서 콱! 깨물어 버려.
“아악! 야!”
비명 소리가 복도를 걷던 선생들 귀에 들린다. 우리는 그대로 교무실로 간다. 너 왜 그랬어? 말해.
“전 할 말 없습니다. 다 서나현 이 새끼가 한 거예요.”
“얘가 예진이 강간하려 했어요. 다음달 생일에요.”
교무실 안에 시선이 쏠리지? 너무 직설적이라 다들 놀랬나봐? 요즘은 중딩들도 사납게 놀아요. 우리가 학교 종이 땡땡땡 부르며 떡볶이 사 먹는줄 아시네?
아. 코피. 아이구. 오른쪽 눈이 안보여. 가물가물해. 이럳 실명은 아니지? 상관없어. 퀘스천이 고쳐 줄텐데.
“선생님. 저 벌점. 정학. 다 좋은데요. 송예진. 이형민. 둘이. 1지망 적어낸 고등학교. 그거 취소해 주세요. 다른 공부 잘하는 고등 많아요.”
“잠깐. 서나현. 선생님이 혼자 막 판단 못하거든? 일단 그 둘을 와보라 해야 겠다. 모든 이야기는 서로 이야기를 들어 봐야. 딱 결과가 나오는 거야.”
그러시던가? 휴지나 줘요. 다른 콧구멍에도 피가 흘러.
“야. 너 이제 편한 날 끝났다. 철승이 형 얼굴봐서 놔뒀더니. 이제...”
“뭔 혀가 이리 길어? 나 셔틀 한다잖아. 둘은 풀어줘.”
주형태는 입을 다문다. 마침 셔틀 커플이 들어 온다. 교무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그들이 나를 본다.
“너희들...”
맞은거 맞아? 사실이야? 정말이야? 왜 말 안했어? 앞으로 어땠으면 싶어? 많이 힘들었지? 이제 어른들이 알아서 할게.
난 셔틀 커플을 보며 웃는다. 잘했어. 너희는 그렇게라도 나가. 그렇게 너희만의 세상으로 가.
“지망 고등학교. 너희들은 2지망으로 바꾼다. 그런데. 송예진 넌 세화 여고. 이형민 넌 이현고. 둘이 떨어지게 됐네.”
선생의 말을 듣자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신이 다 주진 않구나 싶었다. 그래도 좋다. 그거라도 어디냐?
정신이 아늑해 진다. 다시 난 기절해 버렸다.
“학생. 일어나. 빨리. 길에서 자면 얼어 죽어.”
“아... 예?”
밤이다. 난 길에서 자고 있었다. 하늘에 그믐달이 구름에 가려졌다. 몸을 일으켜야 한다. 하지만 움직여지지 않는다.
직감했다. 이제 내 죽음이 다가 온다. 달이 허락한 모든 시간이 지났으니까. 이제 난 저 지평선 끝으로 걷겠지?
다시 태어나면 좀 더 강하고 힘센 사람으로 태어날까 싶어.
“학생. 왜 그래? 어. 119. 119.”
아저씨. 늦었어요. 우리 할머니한테 먼저 간다고 전해 줄래요?
눈이 감겼다. 이제 내 눈앞으로 지평선이 보인다. 다시 난 가던 길을 가야겠지? 이번엔 저 앞으로 가는 이들이 보여. 그들 중 주형태도 보인다.
“형태야! 나도 여기 있어!”
어둠속 공간이 울릴 만큼 크게 소리쳐 본다. 하지만 걷는 이들은 뒤를 돌아 보지 않았다. 나도 저 길을 따라 걸어야지.
“서나현씨. 당신의 선택은 이게 아니잖아요.”
“와. 퀘스천. 배웅 온거야?”
퀘스천. 널 여기서 본다. 그 요란한 옷. 심각한 상황에도 풀쩍풀쩍 뛰는 그 춤사위. 방울 소리가 들릴때마다 널 생각할게.
“당신의 선택은 새로운 세상 아닙니까?”
“응. 그런데 내가 더 살 시간이 있어?”
“있습니다. 남의 시간을 가져 오는 것이죠.”
“뭔 소리야? 또 적당히 나쁜 놈들 시간을 가져 오게?”
얘가 이렇게 말하니까 살고 싶어 지네. 한번 들어나 볼까?
“저 미천한 존재 퀘스천. 달님께 묻고자 합니다. 들어주소서. 서나현씨에게 새로이 시간을 허락해 주실수 없겠는지요?”
달은 다시 보름달로 바뀌어 있다. 아무런 말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퀘스천은 말을 이어 나간다. 달은 듣기만 했다.
내가 퀘스천에게 다가간 순간. 퀘스천이 고개를 돌렸다.
“서나현씨에게 34일. 13시간 44분의 시간이 허락 되었습니다.”
다시 눈을 떴다. 길거리였다. 119에 전화를 하시던 아저씨가 날 보더니 놀랜다. 학생 괜찮아? 여기 왜 있어? 어른은? 집에 누가 있어?
“아니요. 괜찮아요. 멀쩡해요. 지금 시간이...”
스마트폰을 켠다. 메시지가 와 있다. 병원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학생. 어떻해? 내가 태워줘?”
더 말은 들리지 않는다. 구름을 벗어 난 그믐달이 아주 밉게 보인다. 마음속으로 욕을 퍼부어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