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유치원의 교사로 일 한지 6년 차가 되었다. 내 아이도 아닌데 친절을 베풀며 교육을 시키는 것에 대해 항상 스트레스가 쌓여왔다. 나에게도 친 아들, 준이와 입양한 28개월 된 딸이 있다. 사회적으로 조금 더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입양을 하게 되었고 절차를 밟기 위해 가식적으로 행동했다.
아침 8시 30분에 출근해 6시 30분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가면 피곤함이 몰려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항상 야근으로 늦게 왔고 먼저 들어 온 내가 밀린 집안일과 준이 그리고 입양 딸까지 돌봐야 했다.
올해 12살이 된 아들은 사춘기가 왔는지 내가 말을 해도 듣지 않았고 입 밖으로 욕설이 나와야 말을 들었다. 그렇게 집안일과 아들과 싸우다 보면 9시가 되었고 이제야 작은 방에 있는 아기 침대로 갔다.
누구 하나 봐주는 이가 없어 똥과 오줌이 밖으로 나와 그곳은 역한 냄새로 가득했고 나는 짜증을 내며 아이를 거꾸로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짓는 그 애의 표정을 보니 더 화가 났다.
열려있던 문을 굳게 잠갔고 씻기는 척 애를 욕조에 던졌다. 그리고 때밀이 수건으로 더러운 똥물이 묻어있는 살결을 벅벅 긁었다. 아프다며 악을 지르는 아이의 입을 막으며 30분 가량 그렇게 하루 동안 쌓인 분노를 풀었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나자, 아무렇지 않은 듯 아이를 수건에 감싸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아이와 남편이었고, 매일 밤 그들 몰래 아이에게 푸는 학대는 계속 되었다.
오늘 밤에도 스트레스를 풀려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이상하게도 움직임과 반응이 없었다. 딸아이는 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지만 숨을 쉬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보고도 그냥 그대로 두었고 그렇게 몇 날 며칠이 지났다.
남편은 아이가 죽은 지 이튿날이 되서야 알게 되었고 사색이 된 표정으로 나에게 왔다. 그리고 내 뺨을 연속해서 때렸다. 때밀이로 매일 30분 이상 벗겨내어 아이의 온몸은 화상을 입은 것처럼 수포와 피 멍으로 가득했고 음식을 자주 주지 못해 영양실조로 배만 볼록 나왔다.
물론 내가 입양하자고 졸라 키우게 된 일이지만 남편도 제대로 된 아빠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범이라고 하자 화를 내며 경찰에 신고하는 그 새끼였다.
나는 그대로 밖으로 나와 도망갔고 누군가의 엄마로 살기에는 내 삶이 고단했다. 편의점에서 담배 한 갑을 사 들고 수도권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큰 호수에 앉아 죽을 준비를 했다. 20개비를 다 피면 녹조 낀 호수로 들어가 삶을 마감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경찰에게 붙잡히면 사회적으로 쌓아 놨던 가식적인 성실함, 착함, 친절함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것이고 평범했던 가정과 멀어져야 한다.
또 몇 십년 동안의 감방 생활로 생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것도 싫어 그냥 쉽게 죽으려 한다. 독한 연기를 다 빨아들이고 차가운 물속으로 들어갔다.
점점 목을 넘어 입과 코에 물이 들어왔고 나는 그곳에서 죽었다. 죽었을 것이라 생각 했던 나의 몸은 알 수 없는 어딘가에 있었고 이곳이 지옥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있는 방으로 안경을 쓴 박사 한 명이 들어왔고 2년만 더 살다 죽으라는 계약이었다. 하지만 1주일에 한번 자신의 실험에 참여 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고 나는 그 죽음의 계약을 하게 되었다.
주마다 받는 그것은 내가 아이에게 했던 것처럼 거대한 철 수세미가 부착된 기계가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몸에 문댔고 온 몸에는 상처와 진물로 가득했다.
상처가 아물 때 즘 다시 상처가 나 그 것에 대한 고통을 잊을 수 없었다. 그렇게 2년을 살아왔고 오늘은 나의 마지막 날, 3시간 후면 수술대에 올라야 하는데 어떤 실험인지 모른다.
이제는 나의 잘못된 무책임에 대해 사죄하며 죽을 일만 기다렸다.
박사는 그냥 눈을 감고 다시 뜨면 지옥에 도착 할 것이라 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