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뜬 이곳은 내가 쓰러진 병실이었다. 나의 오른쪽에는 형사무리가 왼쪽에는 간호사가 링거에 약물을 주입하고 있었다. 순간 아까의 기억이 떠올라 링거 바늘을 손에서 뜯어냈다.
“지민씨 괜찮아요?”
형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핏방울이 고여 있는 나의 손을 닦아주었다. 옆에 있던 간호사는 놀란 얼굴로 병실에서 나갔고 그곳에는 나와 형사무리뿐이었다.
“오늘 며칠이죠?”
“네? 아직 하루가 지나지 않았어요, 쓰러지고 4시간 정도 지난 것 같네요.”
그곳에서 지낸 나의 70여 년의 삶은 이곳에서 4시간 정도 흘렀다. 나의 시공간에서와 지금의 이 공간은 현실일지, 이것 또한 인격의 한 공간일지 혼란스러웠다.
“혜원이 상태는 어때요?......”
“달라진 것 없이 비슷한 상황입니다만, 지민 씨야말로 괜찮으실까요? 아까 쓰러지실 때 머리를 세게 부딪쳐서 제가 더 놀랐어요.”
“덕분에 기억이 아주 잘 돌아온 것 같아요. 혜원이와 저 이렇게 만든 사람 그녀의 아버지 박 정남과 그의 내연녀, 아까 사진에서 본 그 여자 맞아요.”
“자세하게 본 것들을 말해주세요”
하얀 방의 TV에서 봤던 것들을 형사에게 빠짐없이 다 말해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심증일 뿐 정확한 물증이 없었다.
“이제야, 앞과 뒤의 내용이 이어질 수 있겠군요. 일단 먼저 증거품들을 더 찾아봐야 할 것 같네요.”
“형사님, 제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발 빠르게 먼저 찾아주세요.”
그는 나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뚜껑이 열려있는 비타민 음료 한잔을 나에게 건넸다. 갈증이 났던 차라 그것을 받자마자 한꺼번에 다 마셨다. 감사하다는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보이지 않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품고 있었다. 이때 고요했던 병실에 형사의 벨소리가 울렸고 발신자가 보이지 않게 숨기고는 전화하러 나간다는 몸짓을 하며 의심스럽게 문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간 후, 나의 몸은 또다시 피곤이 밀려왔다. 정신이 온전치 않아서일까, 누군가에게 구타당해서일까 알 수 없는 어지러움과 지침에 꼼짝할 수 없었다. 이것 또한 블랙홀과 화이트홀로 연결된 우주의 통로처럼 나의 세계로 불러내는 신호일까, 그렇게 또다시 나는 현실에서 눈을 감았다.
에폭시 바닥의 초등학교 시절에 봤을 작은 실험실의 의자에 앉아 그곳에서 깨어났다. 복부에 여러 번 찔렸던 칼의 흔적은 나의 배에 흉터로 남았고 사라지지 않았다.
고통은 사라졌지만, 그 순간 고통의 기억은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잔잔한 파도가 해변으로 흡수되는 것처럼 나의 뇌에 스며들어 갔다. 왼쪽 머리에 편두통이 온 듯 수백 개의 바늘이 동시에 찌른 것 같이 아파져 왔고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것을 반복하며 나는 그 자리에 멍하게 앉아있었다. 몸에는 아까의 흔적대로 피가 묻어있었다. 순간 현우가 마지막에 나의 손에 무언가 남겼던 것이 기억나 주먹이 쥐어진 손을 펴보았다.
그의 피로 그려진 작은 해마 2마리가 있었고 그중 한 마리에는 엑스 표시가 되어 있었다. 아직 그것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이곳의 다른 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그 자리에서 흔적을 지웠다.
아무도 없는 이 공간은 평화롭기도, 공포가 느껴지기도 했다. 작은 공간의 실험실의 왼쪽에는 철창으로 만들어진 캐비닛이 있었고 그 안에 무엇이 들었을지는 상상할 수 없었다.
뒤쪽으로는 오래돼 보이는 문 하나와 그 옆에는 기다란 유리 진열장 하나가 있었다. 그 안에는 처음 보는 생물들이 보존 처리되어 죽어있거나 투명한 수조 안에 갇혀 살아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눈이 띠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내 손에 그려졌었던 해마였다. 블루 계열의 그라데이션의 오묘한 색을 내는 그것이었다. 작은 원기둥 유리병에 담겨 있는 것을 꺼내기 위해 진열장을 열려고 했으나 굳게 잠겨 있어 꺼낼 수 없었다. 그때 옆에 있는 문에서 저번의 마지막 기억에서 나타난 단발머리의 여자가 나왔다.
“빨리 왔네?”
내가 이곳으로 오는지 미리 아는 것처럼 말을 하는 그녀였다. 하얀 가운의 왼쪽 주머니에는 파란색의 실로 ‘정명해’라는 이름이 박혀있었고 수술실에서 쓰는 도구들이 몇 개 넣어져 있었다. 또 다른 주머니에는 여러 개의 약물 더미와 주사기가 가득 들어가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꺼내 쓰레기통에 버렸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무엇인가요”
“난 너를 부르지 않았어, 다만 지금 네가 찾아야 할 무언가를 내가 가지고 있을 뿐이지”
피가 묻은 손을 세정제로 벅벅 씻으며 해마가 있는 진열장으로 턱을 내밀었다.
“해마가 저에겐 무슨 의미일까요?”
“원래, 2마리였는데 누군가 가져갔어. 그걸 네가 찾아내야 하는 것이고”
그녀는 주머니를 뒤지며 나에게 열쇠 꾸러미를 주었다.
“거기에 맞는 열쇠 찾아서 가져가, 원래 주인은 너니깐”
“저기요, 아까 그곳에서 저를 데려간 이유는 뭐고, 도와주는 이유가 뭐예요?”
“어차피 현우가 있던 곳은 언젠가 무너져야 하는 공간이었고 예전에 계약되었던 약속이었지. 우리가 있는 이곳도 형원이가 모르는 공간이야.”
“형원이라는 사람이 혹시, 사방이 하얀 방에 있던 그 사람인가요?”
“맞아, 그놈이 우리 17인의 2인자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그럼, 1인자는 누구인지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지난 6년간은 현우 덕에 네가 이 몸의 주인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유미가 이곳의 무서운 왕이 되어버렸어.”
“유미?”
“이제 곧 만나게 될 거야, 난 네가 다시 이곳의 주인이 되었으면 좋겠어.”
가운을 입은 여자는 내 손에 들린 열쇠 꾸러미에서 제일 작은 열쇠를 찾아 진열장을 열어주었고 나에게 해마가 든 병을 쥐여주었다.
“이제 시간이 없어, 넌 이 해마를 잘 지켜야 하고 또다시 빼앗긴다면 나도 현우처럼 이곳에서 사라질 거야”
그녀는 나의 어깨를 잡고 말하더니 다시 문 너머로 나갔고 나는 손에 그것을 쥔 채 잠에서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