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신하면서도 포근한 찬바람이 불어와 기분 좋게 나를 잠에서 깨웠다. 그곳은 내가 만들어낸 세상의 어느 공간이었다. 내 옆에는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누워 조용히 자고 있었다. 그를 볼수록 나의 머리는 아파져 왔다.
방에서 나오자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 거실이 보였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마시며 정신을 다시 부여잡아 천천히 집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나무 프레임의 진열장에는 10대, 20대에 찍은 사진들이 놓여 있었고 유리에 비친 나의 모습은 대학 시절의 모습이 아닌 30대 중반의 얼굴이었다. 짧게 잘랐던 머리는 다시 길어져 있었고 몸이 더 말라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나의 손에도 세월의 흔적이 보였고 4번째 손가락에는 실버반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일어났어?”
내 옆에 누워있던 남자가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나에게 다가왔고 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고 기분이 이상했다.
“반응 재미있네?”
아주 작게 말하며 나를 보는 남자는 누군가 뒤에서 조종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를 밀쳐 내며 거리를 두었다.
“지민아?”
“너 누구야”
“누구긴, 나 현우잖아”
현우, 하얀 방에 있을 때 들었던 이름이었다. 처음 보지만 익숙한 저 남자는 나와 무슨 관계인지 예상을 할 수 없었다.
“지금 나와 무슨 관계야?”“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야, 당연히 사랑하는 관계지”
내가 원하는 삶대로 설계가 정확하게 되어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려 평범하고 안정되게 살아간 후 죽는 것이 내 꿈이자 지향하는 미래였다.
“맞아, 우리는 사랑하고 좋아하는 관계야”
나는 밀쳐 냈던 그의 허리를 다시 감싸 안았다. 따뜻한 기온이 차갑게 식어있던 나의 마음을 녹여주는 느낌이었다. 큰 키의 현우를 올려다보는데 그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있어 보였다. 눈에는 슬픈 기억이라도 떠올린 듯 웃고 있는 얼굴과 대조되어 보였다. 나를 번쩍 들어 다시 방으로 들어갔고 우리는 광활한 태양의 빛처럼 긴 시간을 그와 함께했다. 그렇게 이곳의 세계에 나는 스며갔고 이전 기억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우리 15살에 만났던 거 기억나 지민아?”
“네가 우리 집으로 온 날?”
이제는 기억해내지 않아도 사진첩을 보는 것 같이 그와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머리를 거쳐내지 않고 바로 입으로 나왔다.
“엄마 따라갔다가, 널 만나게 되었지!”
“그 코 흘리던 남자애가 내 옆에 있는 사람인 게 정말 신기하다.”
장난치듯 그에게 말했고 그는 나의 배를 간지럽혔다. 그렇게 우리는 행복한 하루하루를 살아갔으며 몇 달 후에 내 몸에는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바로 현우와 나 사이에 아기가 생겼다.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그와 새로운 생명이 생긴 것에 대해 놀라워하는 나였다. 1개월, 2개월, 5개월, 10개월이 지나, 아기는 나의 몸에서 나왔고 딸의 이름을 ‘소현’이라 지었다. 젖먹이부터 첫걸음마, 엄마 아빠라고 말하는 것 등 빠짐없이 그녀에 대해 기억하고 소중하게 키워갔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사회 초년생, 직장인이 돼서까지 현우와 나는 소현을 애지중지하며 좋은 기억으로 삶을 살아갔다.
그녀가 결혼할 남자를 데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를 가졌다. 처음으로 손주를 않아보는 순간 내가 소현을 낳았을 때 들었던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예쁜 점만을 닮아 귀여운 아이였다. 그 아이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나와 현우는 점점 늙어갔다. 삶을 다한 신체들이 점점 많아졌고 나는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소중했던 내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그것에 대한 우울감이 커져 발코니의 흔들의자에 홀로 않아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여보, 시장 갔다 올 건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오랜만에 당신이 만든 미역국 먹고 싶어”
“알았어, 잠깐 여기서 햇빛 좀 쐬고 있어”
그도 아픈 곳이 많을 텐데 나의 기분을 맞춰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가 집에 나가고 나는 아무도 없는 그곳에 쓸쓸히 혼자 어둠을 느끼며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온통 검은 것으로 보이는 나의 시야는 강렬한 빛을 보면 희미한 연기처럼 무언가 보였다. 빛을 받으며 나는 노래를 들으려 주머니에 있는 작은 MP3를 꺼내려 손을 넣었다. 주머니 안에는 이어폰으로 감싸져 있는 그것과 작은 열쇠 하나가 있었다.
“이게 무슨 열쇠지?”
혼잣말하며 주머니에 있는 것을 전부 꺼냈다. 손 감촉으로 하나하나 느껴보았다. 플라스틱 줄로 감싸진 것은 MP3, 녹슬고 작은 물체 하나는 오래된 열쇠였다.
나는 그것을 들어 손끝으로 더 느껴보았고 중앙에는 메모리, 기억이라는 영어가 각인 되어있었다. 그 순간 나는 수십 년 이전에 사방이 하얀 방에서 자발적인 선택으로 이곳에 온 기억이 생각났다. 필름이 돌아가는 것처럼 지금까지의 삶이 눈이 보이지 않는 나의 시야에 스쳐 갔다. 그리고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나오고 싶을 때, 출구를 찾아 나오길’
나의 세상, 이곳에서의 나가는 곳은 어디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미 나의 몸은 노인이며 움직일 힘도 없었고 심지어 눈도 보이지 않아 많이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흔들의자에서 일어났고 벽을 만지며 나아갔다.
앞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 조심스럽게 갔지만 모서리에 찍히고 무언가를 떨어트려 물건이 깨지고 온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부엌에 쪼그려 앉아 숨을 고르고 있을 때, 기억나는 한 가지가 떠올랐다.
신혼 시절부터 있었던 현우의 오래된 나무 옷장이 있었다. 그가 사회생활을 하며 힘들 때마다 그곳에 들어가 숨죽여 울었던 현우 작은 공간이자 제일 아끼던 물건이었다. 나는 작은 방에 있는 옷장을 향해 기어갔다. 유리를 밟아 발에서 피가 났지만 서둘러 있는 힘을 다해 나아갔다. 손을 더듬거리며 옷장을 열어 뒤지기 시작했지만 열쇠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현우가 울었던 그곳으로 깊숙이 들어갔고 활짝 열어져 있던 문은 내가 들어감과 동시에 쾅 하고 닫혔다. 깜깜했던 나의 눈은 더 깊은 어둠으로 가득했고 이곳에서 나갈 수 없었다. 손을 계속 더듬으며 무언가 찾았고 앉아있던 나의 발밑에서 차가운 촉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내가 열심히 찾고 있는 열쇠 구멍이었다.
오른손에 쥐어진 작은 열쇠를 이리저리 꽂아 보았고 어느 순간 열쇠가 맞아 들어갔다. 숨죽인 상태로 오른쪽으로 돌리자마자 옷장 바닥이 밑으로 꺼졌고 나는 그것을 따라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