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그러니까, 제 말뜻은,”

　김 과장의 변명을 듣기 싫다는 듯, 등을 돌린 최재현 본부장은 농담처럼 김 과장의 입을 막았다.

　“홍 임수 대리님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서로 시말서를 교환하면 어떨까요. 교환일기처럼.”

　생각해주는 척 능구렁이 담 넘어가는 재현 본부장과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사무적인 말투로 선을 그었다.

　“위트가 충만하신 본부장님,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제 일해도 되겠습니까.”

　“어! 미안해요. 또 홍 임수 대리님께 또 실수할 뻔했네요. 유머 코드가 통하니까. 오래 볼 수 있겠네요. 이번에는 제가 먼저 갑니다.”

　재현 본부장과 나를 번갈아 보던 직원들은 입은 다물지 못한 채, 동공만 바삐 움직였다.

　쏟아지는 무언의 압박에도 대수롭지 않은 듯, 제자리에 앉았다.

　성큼성큼 걸어가던 재현 본부장은 쥐새끼처럼 자신의 뒤를 밟는 박 부장과 김 과장에게 거리감을 인식시켰다.

　“햇병아리 본부장이라도 제 사무실 정도는 찾아갈 수 있습니다.”

　박 부장과 김 과장은 재현 본부장의 눈치를 살피며 삼보로 뒤로 물러났다.

　“네! 본부장님,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박 부장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자 김 과장도 따라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박 부장님과 김 과장님의 배려심에 안심이 되네요. 앞으로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박 부장과 김 부장에게 맞절하듯이 재현 본부장도 머리가 땅에 닿게 고개를 숙였다.

　박 부장과 김 과장은 재현 본부장이 숙인 고개를 들기만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저 인간 왜, 고개를 안 들어. 목 디스크도 있는데.’

　박 부장은 고개 숙인 채, 김 과장에게 힐끗거렸다.

　머리를 숙인 채 김 과장은 불안한 눈빛으로 박 부장에게 곁눈질했다.

　‘그렇게 말입니다. 젊은 놈이, 생각이 없어. 설마 일부러 우릴 물 먹일 작정은 아니겠죠, 과장님.’

　타조가 땅에 머리를 박듯이, 복도 한복판에서 고개 숙인 세 사람을 구경하며 킥킥거렸다.

　핸드폰 진동에 그제야 고개를 든 재현 본부장은 통화하며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간다.

　“안녕하세요. 예, 덕분에 출근 잘했습니다. 부담감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네. 다음에 뵙죠.”

　본부장실의 문이 닫히자, 박 부장과 김 과장 눈빛이 사나워졌다.

　“어린놈 때문에, 또 헛짓거리하게 생겼네. 이이고, 목이야. 언제 내 목을 뻣뻣이 들 수 있으려나. 뭐, 그래도. 햇병아리한테, 그 카드는 쓸 수 없지. 가자고. 김 과장.”

　“헛짓거리만 하면 다행이게요. 꼴에 남다른 상사 꽃 패 놀이에 사무실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까, 그게 걱정입니다. 부장님.”

　***

　지국장은 콧노래를 부르며 낡은 상가 건물로 들어갔다.

　복도 끝자락에 있는 초라한 사무실로 들어간 지국장이 힘차게 인사했다.

　“할아버지! 국장이 왔습니다. 국장이 왔습니다. 멋진 국장이 왔습니다. 영실아~형님이 오셨다.”

　책상 2개가 전부인 조촐한 사무실에서 백발의 장 집사와 앳된 영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바둑알을 손에 돌리던 백발의 장 집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지국장 도련님.”

　붉은 머리로 염색한 영실은 지국장의 손을 훑어보고 툴툴거렸다.

　“아! 지국장이~ 왔습니다. 달걀 장수처럼 인사해요? 설마. 또! 미역국은 아니겠죠? 형”

　지국장은 손에 들린 포장된 미역국을 흔들어 보이며 해맑게 외쳤다.

　“딩. 동. 댕!”

　영실은 진저리치며 타박했다.

　“산모들도! 형처럼, 이렇게까지는 안 먹어요. 전생에 미역국 못 먹고 죽었나. 아~진짜. 365일 중에, 300일을 미역국을 먹는 사람은 형밖에 없어요. 안 질려요?”

　영실의 구박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지국장은 창가 옆에 있는 의자에 앉는다.

　“내 솔푸드야! 왜 네가 구박하는데. 그나저나 축하한다. 자식~.”

　영실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살며시 웃는다.

　“남들 다~하는 건데. 새삼스럽게. 형도~참.”

　“그래도 검정고시 합격하게 어디야! 이젠, 대학만 남았나? 이 기세로, 대학가자.”

　청천벽력 같은 지국장의 말에 기겁한 영실은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검정고시 학원에 처넣을 때부터 알아봤어. 사람이 만족이 없어!”

　투정 부리는 영실이 귀여운 지국장은 애정이 담긴 잔소리했다.

　“만족한 삶도 좋지, 만! 청춘의 낭만으로, 도약 좀, 해보자. 분발하시죠.”

　“형처럼, 내 머리가 천재 좋게. 내 주제에 대학은 무슨! 검정고시도 겨우 합격했다고요. 만족한 삶을 삽시다! 네~국장 형. 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가!”

　“동생아.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해라~물론, 등록금은 공짜다. 이 얼마나 좋은 형이더냐!”

　“싫어! 싫다고! 안 들린다. 안 들려!”

　귀를 막고 볼멘소리하는 영실에게 꿀밤을 날렸다.

　“앗! 아프다고. 형!…님.”

　 “다시는 그렇게 살기 싫다며! 송영실 씨. 멋진 인생 사셔야죠. 분발하세요.”

　한숨을 늘어지게 내뱉은 영실은 바둑판에 바둑돌을 던지며 소심하게 반항했다.

　“에이~나도 몰라. 배 째! 배 째라고.”

　손자의 재롱을 보듯 장 집사는 포근한 미소로 약 올렸다.

　“이왕이면 바둑판을 던지지! 핑계로, 새 바둑판을 선물 받게.”

　“벼룩의 간을 뺏어 먹어요. 할아버지. 나보다 돈도 많으면서.”

　바둑판 밑에 넣어둔 서류를 지국장에 건넨 장 집사의 얼굴은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졌다.

　“준비는 했습니다만, 꼭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도련님.”

　서류를 훑어보던 지국장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고 가르쳐주셨잖아요. 이제 와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장 집사님.”

　평상시에는 할아버지라고 부르지만. 단호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때면 장 집사라고 불렀다.

　장 집사도 완강한 내 태도에 체념하듯 넌지시 당부했다.

　“물론 그랬죠. 도련님. 문제는 그곳이 호랑이 굴인지, 여우 굴인지. 도통 몰라서, 주제넘게 도련님이 걱정됩니다.”

　나라고 장 집사의 걱정을 왜 모르겠는가!

　그렇다고 지국장은 애처럼, 장 집사에 뒤에 숨어 있을 수만 없었다.

　고맙게도 장 집사는 이내 입을 닫았다.

　“…….”

　“그러니까. 더욱더 확인해봐야죠. 장 집사님.”

　부모님이 뺑소니 사고로 세상을 떠나시던 날, 내 뜻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했고.

　아무리 준비한들, 변수는 늘 존재했다. 이거 재고, 저거 따지다 보면 시도조차 할 수 없을까 봐. 그냥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적어도 장 집사에게만큼은 겁먹은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무 조건 없이 나를 보살펴준 장 집사에 대한 고마움과 믿음에 대한 최소한에 보답이라는 생각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영실이가 핸드폰을 보여주며 잔망스럽게 말했다.

　“퀵 요청이 왔습니다. 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겠습니다. 그럼 내일 뵈요. 할아버지. 형.‘

　”잘가. 차 조심. 사람 조심. 알지.“

　친형처럼 잔소리하는 지국장이 내심 좋으면서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개 조심은 왜 안 해? 형, 이럴 때 보면, 노인네 같다.”

　잠자코 들고만 있던 장 집사가 농담을 살벌하게 던졌다.

　“코흘리개 찌질님! 듣는 노인네가 좀, 거시기하는데, 거시기하게 해줄까?”

　장 집사의 근엄한 목소리에 당황스러운 영실은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놨다.

　“아…아니. 제 말뜻은…그러니까, 형~도와줘. 장 집사님. 할아버지를 두고 아~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형님. 내 마음은 알지.”

　구원의 눈길로 울먹이는 영실을 놀리듯 장 집사와 지국장은 박장대소했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영실은 씩씩거렸다.

　"진짜! 못 됐다. 어른들이. 동생을 돌리고. 좋다고 웃어! 형~. 할아버지도, 너무해요."

　눈물을 닦으면서도, 끝까지 영실을 놀려댔다.

　“너도 무서워하는 어른도 있긴 있구나. 하하하. 하긴, 나도 장 집사님의 주먹을 아주 무서워하지! 내가 알잖아. 장 집사님한테 맞아봐서.”

　내 능청에 옛 추억에 잠겼는지, 장 집사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소싯적에, 주먹 좀 날렸죠. 강남의 신사로 호랑이 하면, 모른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때가 좋았지요. 사장님도 만났고…….”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오금이 저린다. 아찔해! 하하하. 이참에 너도 맞아볼래?”

　“간만에 타격 연습 좀 해볼까요. 도련님.”

　손자를 놀리는 할아버지처럼 장 집사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똥마련 강아지처럼 영실은 내뺐다.

　“내일 뵙겠습니다. 할아버지. 형.”

　 영실이 나가자 장 집사는 넌지시 물었다.

　“도련님, 그 사람을 믿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부터 그 회사에 출근한다고 했죠.”

　“네. 도련님.”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장 집사를 안심시키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믿는 게 아니라. 믿게 만들어야죠. 우리가! 그 회사도, 우리 사람을 믿을 겁니다. 또 그래야. 그 회사도 살고, 그 사람도 살 수 있으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

　“네 도련님.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근심 걱정은 다 버려두시고. 퇴근하세요. 내일까지 밑에 있을 겁니다.”

　제자리에서 일어나 캐비닛을 옆으로 밀고, 숨겨진 출구로 들어갔다.

　“네. 도련님. 사무실 문단속하고 가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지국장이 사라진 출구를 캐비닛을 다시 옮겨놓은 장 집사는 사무실에서 빠져나갔다.

　***

　출근하는 엘리베이터 안에 공기가 무거웠다.

　‘다들 왜 이래. 무슨 일 있나?’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친하지 않더라도, 눈인사는 오갈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침울한 표정으로 다들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의 탁한 한숨 소리에 질식할 것 같았다.

　내 자리에 앉기도 전에, 박 부장의 호출과 함께 미친 두더지 지혜 사원의 앞 담화로 업무가 시작되는데. 이상하게도 아무도 날 찾지 않았다.

　오늘따라 너무 조용했다.

　시베리아 찬 바람에 잠식된 사무실에서 벌벌 떨고 있는 박 부장을 보니.

　한동안 잠들어 있던 정리해고 망령이 떠들기 시작한 모양이다.

　‘젠장, 1순위가 난데.’

　커피믹스로 심란한 마음을 달래 겸, 직원 휴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머그잔에 커피믹스 2개를 때려 넣고, 커피 스푼으로 휘휘 젓고 음미하고 있었다.

　‘이놈의 세상은 나만 빼고 다 행복해. 내 인생은 커피믹스처럼 언제 달달 해질까? 커피믹스보다 못한 내 인생. 헛살았다.’

　잠깐의 나의 휴식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어느새 미친 두더지가 찾아와 내 앞에 알짱거렸다.

　“임수 대리님, 오늘도 좋은 아침입니다.”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분명히 목요일인데 이상하게도 월요병이 도지는 아침이네요. 지혜 씨.”

　“우리 대리님은 어쩜 농담도, 구시대적이다. 커피믹스도 무슨 맛으로…앗! 죄송해요. 원두만 먹어서. 무슨 맛으로 먹는지. 이해하시죠. 홍 대리님.”

　우아하게 원두커피를 홀짝이는 미친 두더지의 종이컵에 커피믹스를 뜯어, 잽싸게 털어 넣어줬다.

　“맛을 모를 땐, 마셔보는 것도 괜찮지. 지혜 씨, 맛있게 먹고 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커피믹스야. 먼저 갈게.”

　직원 휴게실에서 미친 두더지의 발작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이제 서야, 머리가 맑아지네. 상쾌한 아침이야.”

　자리에 앉아 모니터에 창을 띄우자마자, 기가 막히게 박 부장이 날 불렀다.

　“네, 부장님 부르셨습니까.”

　“궁금해서, 내가 소개팅 주선한 사람으로서.”

　조심스럽게 묻는 박 부장을 미심쩍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무슨 폭탄을 던지려고 저러나? 빨리 본론을 꺼내. 점심까지 넘겨야 할 서류가 많다. 문어 부장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