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실의 문 앞을 가로막은 총지배인은 넉살좋게 말했다.
“요즘은 시대에 맞혀, 우리 호텔도 재택근무를 시도할 찰나! 대표님께서 솔선수범하신다고 하시니! 대표님의 혜안에 기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느물거리는 총지배인의 입담에 진이 다 빠졌다.
“총지배인과 저의 사이를 금할 수 있게! 금줄이라도 구해서, 선을 긋고 싶네요.”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하시는 대표님의 위계질서에 한시름 놨습니다.”
“하! 총지배인님의 극단적인 낙관론에 한숨이 나옵니다. 하하하.”
당 떨어지는 대화로 시름이 깊어진 김에, 쉬어다 가라고.
그 잘난 대표님의 의자라도 앉아보자는 심정으로, 쓸데없이 넓은 책상 쪽으로 걸어가자.
화색이 돈 총지배인이 황급히 의자를 빼줬다.
“인체공학적으로 맞춘 편안함과 쿠션감으로 입소문이 난 최상급 의자입니다. 일단 앉아보시지요. 대표님.”
지루한 홈쇼핑을 보는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를 한껏 젖히고 거만하게 앉았다.
총지배인의 콩깍지를 벗겨야 하는 입장이라, 재수 없는 상사처럼 책상에 발까지 올려놓고 땍땍거렸다.
“확실히 사무 의자보다 잠자기엔 딱 좋은 의자 같네요. 이래서 다들 대표하고 싶은 거겠죠? 총지배인님은 어때요?"
“글쎄요. 그보다는 크라운 호텔을 자신이 꿈꾸는 호텔로 바꿀 수 있다는 희망에서, 대표님이 되시겠죠. 홍 임수 대표님.”
모범답안지를 읊어대는 총지배인이 얄미운 시누이보다 더 미웠다.
“그렇게 잘 아시는 총지배인님께서 크라운 호텔 대표가 되시는 꿈을 꾸시지! 모텔도 구경 못 한 저보다, 현명한 대안이 될 것 같은데요. 총지배인님.”
“말씀으로도 엎드려 절하고 싶습니다. 불행하게도 저는 충격적인 결격사유가 있어, 대표가 될 수 없습니다. 대표님.”
“얼마 충격인 결격사유길래, 대표 자리를 마다합니까?”
“과수원 아들이라서요.”
“네?”
“하하하. 농담입니다. 대표님.”
황당한 아재 개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얼어버린 나와 달리, 총지배인은 뿌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H 그룹은 핏줄의 매직으로 계승됩니다. 그러니 H그룹의 친딸인 홍 임수 대표님만이! H 그룹의 총수이자, 크라운 호텔의 대표가 될 수 있습니다.”
“아~. 네.”
시큰둥한 내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총지배인은 어마 무시한 슬로건을 걸었다.
“홍 임수 대표님이 곧, H 그룹입니다.”
“핏줄 하나로, 만사형통이네요. 이렇게 편한 세상을 사는 줄 미처 몰랐네요.”
“전전으로 동감합니다!”
“이렇게 하찮게 돌아가는 세상을 수긍할 수 있어요? 나는 왜 이리도 배앓이 꼴리는지!”
짜증스럽게 비꼬는 나를 빤히 쳐다보던 총지배인은 통쾌한 표정으로 맞장구쳤다.
“이런 홍 임수 대표님이시라서, 더욱더 욕심이 납니다. 그래서 대표님께 더 충성할 수밖에 없네요.”
“그놈의 대표님 소리는 그만 넣어두시죠. 그리고 언제 봤다고, 충성심까지 운운하시는지! 여러모로 먹고 살기 힘드시네요. 총지배인님도.”
총지배인에게 비비 꼬인 꽈배기를 던져 건만, 오히려 박장대소하는 그의 모습에 열패감만 솟구쳤다.
파안대소하던 총지배인이 진중한 얼굴로 갈무리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대표님 말씀대로, 월급 받은 만큼만 충성하겠습니다. 홍임수 대표님께.”
“잘나신 아버지가 곁에 두는 걸 보니, 어마 무시하게 능력이 탁월하시거나.”
뒷말을 삼킨 내 심보를 간파했는지. 총지배인은 천연덕스럽게 반문했다.
“아니면, 제가 회장님께 아부를 잘해서 총지배인까지 승진했을까요? 어느 쪽이라고 보세요. 대표님.”
“음~. 전자 쪽이라고 하죠. 그럼, 이왕 대표 자리에 앉았으니. 첫 업무이자 마지막 업무로, 대표님 놀이 한 번 해볼까요.”
휘둥그레진 눈으로 총지배인은 반가운 기색으로 반문했다.
“네? 무슨 업무를 말씀하시는지. 벌써, 우리 호텔에 대해서 파악하고 계셨습니까?”
“번거롭게 재택근무까지 할 필요 없이. 사표 낼게요. 그럼, 됐죠. 총지배인님.”
총지배인은 해맑은 미소로 내 사표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아직, 정식 발령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사표 쓸 수가 없습니다. 대표님.”
“그래요. 아직 대표가 아닌데, 굳이 제가. 여기에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한낱 외부인인데.”
“절차 문제라서, 사표를 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비 대표님. 그리고, 결재할 서류입니다. 이왕 앉으신 거, 검토해 보시고, 결재해주세요.”
개차반 상사에게 시달렸던 그 기억을 끄집어냈다. 일명 결재서류 던지기!
‘최대한 무례하고, 거만하게!’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총지배인의 얼굴에 차마 결재서류를 던질 수 없어, 쓰레기통에 던졌다.
총지배인은 쓰레기통에서 꺼낸 결재서류를 행거칩으로 닦아냈다.
“얼굴이 아닌 쓰레기통에 투척해주신 대표님의 넓은 아량에 감동했습니다. 이래서, 꼭 크라운 호텔의 대표님이 되셔야 합니다.”
총지배인의 연륜에 당할 재간이 없어,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고. 생떼를 부렸다.
“결재를 빌미로, 대표 자리에 앉히려고 하시는 모양인데. 절대로! 안 해요. 싫어요. 못해요.”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고. 할 수 없죠. 다만! 머리채 잡힌 직원은 해고되고, 영업손실 소송에 빚더미에 앉아 한강 다리에 올라가겠죠.”
총지배인의 원맨쇼에 대꾸할 힘조차 없는 나는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하듯 결재서류에 서명했다.
“비약이 너무 심하잖아요. 이왕이면, 저 때문에 대한민국 경제가 붕괴한다고 하시죠! 은퇴하시면 소설 작가로 전업하세요.”
총지배인은 세상을 다 가진 얼굴로 결재서류를 쳐다보며 말했다.
“업무도 끝나셨으니, 이만 퇴근하셔도 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조만간 대표님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찾지 마세요. 제발~,”
대표실 문을 활짝 열어주며, 활짝 웃는 총지배인을 보자 조금은 무서웠다.
아무래도 총지배인의 손에 이끌려, H그룹의 회장이 될 것 같은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이 사람 정체가 뭐야?’
***
시장을 골목길을 지나, 오르막길로 올라간 지국장이 허름한 3층 주택으로 들어갔다.
옥탑으로 올라가 지국장은 초인종 대신해 발길질해댔다.
요란한 발길질에 옥탑방 문이 벌컥 열렸다.
“어떤 놈이야! 오밤중에 교양 머리를 삶아 먹는 놈이, 누구야!”
편의점 조끼를 입고 나온 정우가 짜증이 난 얼굴로 프라이팬을 휘둘렀다.
지국장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교양이 머리가 철철 넘치는 나다! 참, 빨리도 나온다.”
제집처럼 기어들어 오는 내가 얄미웠는지. 정우가 숏다리를 자랑하듯, 옥탑방 문을 막았다.
“누구신지? ‘나다’라는 사람은 없는데. 잘못 찾아오셨네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정우는 뜨겁다는 표정으로 매정하게 옥탑방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갔다.
문전박대에 짜증이 올라온 나는 비장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죄송합니다. 정우가 이사 갔다니! 투 플러스 한우를 사 왔는데. 한우~한우의 마블링은 예술이다. 어쩔 수 없지. 나 혼자라도, 한우 먹방쇼라도 해야겠다.”
가식적인 미소를 곱게 치장하고 나온 정우가 옥탑방 문을 열고 너스레를 떨었다.
“너무 잘생김이 묻어나서, 국장인 줄 몰랐다! 미안. 미리 언질 좀 주지. 그럼, 맛있는 쌈장과 밑반찬을 만들어 놓았을 텐데. 들어오세요.”
다소곳하게 꼬리 내린 정우를 더 놀리고 싶은 마음에 빈정거렸다.
“한우 때문에! 설마 모른 사람을 아는 척, 하시는 거는 아니죠. ‘나다’라는 사람은 모르신다면서요?”
‘마음 같아서는 쥐어 패주고 싶지만. 네 손에 들려있는 한우를 봐서, 참는 거다. 그만, 버터새끼야.’
.
눈앞에 아른거리는 한우 세트에 사로잡힌 정우의 가시적인 미소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가지가지 한다. 많이 먹어라.”
“또 어떻게 알았어? 가지랑 한우의 궁합이~그렇게 좋단다! 아쉽게도, 가지는 없고. 저기 화분들 보이지. 상추랑 고추, 대파는 있어. 유기농이야.”
자랑스럽게 옥상 텃밭을 자랑하던 정우가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꺼내왔다.
옥상 평상에 자리 잡은 정우가 설레는 표정으로 한우를 불판 위에 정성스럽게 올려놓았다.
불판 위에 올려진 한우 한 점을 내가 젓가락으로 집어 올리자, 정우의 집게 스매싱이 날아왔다.
“아직 아니지. 야~진짜, 영롱한 빛깔의 한우를 이딴 식으로 대접하면 안 돼. 육즙이 터질락 말락 할 때 앙!”
고기 한 점에 유난 떠는 정우가 못마땅한 나는 구시렁거렸다.
“육회도 먹는 마당에. 앞면 찍, 뒷면 찍. 정 있는 민족답게, 삼세판 찍~익혀 먹으면 되지. 돼지도 아니고. 한우야! 한우.”
비장하게 집게를 내려놓은 정우가 열변을 토해냈다.
“그래~ 한우라서! 그 비싼 한우를 어떻게 하면, 씹고. 뜯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가. 한우의 맛에 본질을 논하잖아! 맛의 향연에 대해서. 이 무식한 혀야!”
“달밤에 자라 콧구멍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됐고, 반찬가게 창업 준비는 하긴 하냐?”
“늘 말했지. 창업 준비만 하고 있다고. 가장 중요한 돈이 없어서.”
한우에 눈을 못 떼는 정우를 약 올린 생각으로, 불판 위에 올려놓은 고기들을 내 입속으로 몰아넣었다.
“앗! 뜨거워. 너무 뜨겁다. 씁~”
허망하게 놓친 한우에 격분한 정우가 집게를 던졌다.
“맛도 모른 놈이! 네가 한우 맛을 알아! 감히, 내 한우를! 입안에서 육즙이 팍팍 터지고, 사르르 놓은 내 한우! 한우야!”
졸지에 멱살 잡힌 나는 남은 한우 세트를 정우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다 먹어라. 이 돼지야. 됐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한우 세트를 받은 정우가 나긋하게 말했다.
“네 입속에서 육즙이 팡팡 터지지! 혀끝에 천국을 맛봤을 거야. 이게 다년간 고깃집 알바로 다져진! 불맛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지. 다 나의 덕이니라.”
미슐랭 요리사처럼 으쓱대는 정우가 아니꼬운 나는 구시렁거렸다.
“참~어이가 없다. 내가. 밥만 사주면, 형이고 친구지.”
“당연하지! 밥 먹으러, 학교까지 다녔는데. 왜 새삼스럽게 왜 이래.”
당당한 정우가 살짝 멋있어 보여, 낯간지럽지만 한우에 살포시 파채를 얹어졌다.
“개근상 받고 고등학교까지 졸업했으면. 대단한 거지. 난, 검정고시 출신이라. 친구 있는 네가 부럽다.”
얹혀놓은 파채를 신경질적으로 걷어내 정우가 핀잔줬다.
“소금! 한우의 본연의 맛을 느끼고 싶다고! 몇 번을 말해. 네가 한우의 맛을 알아?…나도 친구 없거든. 한우 사다주는 집주인은 있어도.”
“나도, 한우를 맛깔나게 구워주는 임차인은 있지.”
오글거리는 멘트로 우정을 확인한 우리는 뒤늦게 올라오는 민망함에 옥탑의 야경을 구경했다.
배가 불렀는지, 아껴먹으려고 한우를 남겼는지 모르겠지만. 흡족한 얼굴로 젓가락질을 멈춘 정우가 대놓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한우까지 들고 온 걸 보니, 심상치 않는데?”
“정우야. 나, 사고 쳤다. 누나한테.”
내 입에서 누나라는 소리에 정우가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또 캔맥주 갖고, 실랑이 벌였어? 설마 누님이 맥주 두 캔 마셨다고, 집 나왔냐? 쪼잔한 놈아.”
“…….”
“네가 그렇게 호들갑 떠니까. 동생 취급이나 받지. 이 버터 새끼야.”
고개 숙인 나는 떨리는 음성으로 고해성사를 했다.
“… 누나의 목덜미에 키스 마크를…새겼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