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는 364일만 산다.
5월 5일은 내 하루가 사라지는 날이었다.
숨을 쉴 수도 없고.
숨을 쉬어서도 안 되는 그날.
5월 5일은 남동생 수혁이가 익사한 날이었다.
“…누나 살려줘. 살려…”
“수혁아! 내 손 잡아…빨리. 수혁아! 누나가 잡았어. 구해줄게.”
“어푸어푸…누나…살려…줘… 읍…누…나”
“누나가 살려줄게. 조금만 더 가면. 정신 차려. 손 놓으면 안 돼! 수혁아. 수혁아!”
“…누…나…….”
“조금만…조금만…더 가면…….”
5월 5일은 혼자 살아남은 죄책감에 실어증까지 걸린 나를 살인자로 낙인찍은 날이었다.
“똑바로 말해. 네가 죽였지. 넌 살인자야! 동생을 죽인 살인자. 우리 집에 어떻게 살인자가 태어났는지…….”
‘아니에요. 믿어줘요. 아빠…수혁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내 손가락이 부서지면서까지 잡고 있었는데…믿어줘요. 제발…엄마.’
5월 5일은 어김없이 엄마의 발작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목을 조르는 엄마의 팔목에 매달려봤지만.
“엄마…엄…마…윽…으”
“죽어! 제발 죽어줘! 내 인생을 망친, 너 같은 X!”
“엄…마.”
“내 딸아~엄마를 위해서 죽어줄 수 있잖아. 어차피 넌 내 뱃속에서 태어나잖아. 안 그래?”
5월 5일은 커터칼로 들고 있던 의붓여동생의 자해 쇼로 아버지의 집에서 맨발로 쫓겨나던 날이었다.
“언니가 저를 죽이려고 해요. 살려주세요. 아빠. 임수 언니가 제정신이 아니에요.”
“아니에요. 희주 혼자 자해하거라고요. 억울해요. 아빠. 믿어주세요. 제발.”
“수혁이 잡아먹은 것도 모자라서, 이젠 희주까지 죽이려고 해! 그렇고도 네가 인간이야! 당장 끌어내. 송 집사 뭐해.”
5월 5일은 엄마의 학대를 못 이겨 아버지에게 피신했지만, 도리어 길바닥에 버려진 날이었다.
“아빠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엄마가 … 감금하고 때리고…저 이러다가 죽을 것 같아요. 제발 ~아빠 집의 차고지라도 좋으니까. 아빠랑 같이만 살 수 있게 해주세요. 네~아빠.”
“…아직도 살고 싶냐? 난! 죽고 싶은데.”
“저도 아빠 딸이잖아요. 흑흑흑. 엄마한테 돌아가면…저 죽어요. 제발 아빠 집에서…… 죽은 듯이 살게요. 제발요.”
“수혁이 죽인 죗값 치른다고 생각하고. 죽은 듯이 살 필요 없이, 그냥 죽어!”
“…아빠 소원대로 죽어드리죠.”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H그룹의 지분 포기 각서나 싸인하고 가라.”
5월 5일 수혁이를 삼켜버린 원수 같은 그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남자아이를 뱉어냈다.
“내 손 잡아! 살고 싶으면, 나 잡으라고. 제발~. ”
“살려…읍…살려주세요.”
“잡았다. 절대 내 손 놓지 마! 꽉 잡아!”
5월 6일 오갈 때 없는 나는 응급실에서 퇴원하는 지국장을 따라서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퇴원수속 때문에 그러는데, 학생 말고, 다른 보호자님 있으세요.”
“…없는데요.”
“그래요. 그럼 학생과 환자분의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누…누나예요. 사촌 누나.”
“누나 병원비는 계좌로 보낼 테니까. 핸드폰 번호랑 계좌번호 주세요.”
“…살아줬으니까. 괜찮아. 안 줘도 돼. 잘 가.”
“핸드폰 주면 내가 귀찮게 할까 봐, 그래요? 아니면, 계좌번호라도 알려주세요. 바로 송금할 테니까.
“…없어.”
“네?”
“핸드폰도, 계좌번호도 없다고. 나 약속 있어. 먼저 갈게. 따라오지 마.”
“음~약속장소가 버스정류장이에요? 아니면 바람이라도 맞았어요? 갈 데가 없으면 우리 집 갈래요?”
“싫어. 네가 누굴 줄 알고 따라가? 상관하지 말고 가.”
“좋아. 내가 누굴 줄 알려줄 테니까. 상관해도 되죠. 누나”
“뭐?”
5월 7일 임대인 지국장과 임차인 홍임수로 계약한 날이었다.
“누나, 보시다시피 마당에 화단까지 있는 38평에 2층 단독주택이라서, 누나가 살기엔 불편함이 없을 거예요. 우리 집.”
“…응.”
“이름이 홍 임수구나. 나이가 20살이고. 대학생 누나네?”
“그러는 너는 중2이야? 이 큰집에 정말, 혼자 살아?”
“응. 아빠 엄마는 뺑소니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요. 지금은 혼자 살아.”
“…미안해. 몰랐어.”
“괜찮아요. 나도 친구랑 놀러 다니라고, 부모님이 뺑소니 당한 것도 몰랐는데. 뭐~.”
“미안해. …그래서 그랬구나.”
“누나는 1층, 나는 2층 콜~. 혹시라도 날 못 믿겠으면, 지금이라도 전세 계약 파기해도 됩니다.”
“믿어. 잘 자.”
“너무 쉽게 믿는 거 아니야? 누나.”
“믿지 않으면, 더는… 갈 데가 없으니까.”
***
지친 하루의 끝자락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의 행복감을 만끽하려고 편의점으로 걸어갔다.
“가출한 우리 댕댕이. 밥은 잘 먹고 다니지? 아~ 사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보고 싶네.”
“보고 싶었어? 얼마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내 귓가에 익숙한 인기척에 화들짝 놀랐다.
“엄마야!”
지국장이 하얗고 긴 팔에 돋보이는 섹시한 힘줄을 자랑하듯 뒤로 까무러쳐 넘어가는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얇은 쌍꺼풀에 검고 큰 눈동자로 그윽하게 날 내려다보던 지국장이 내 상체를 반짝 당기며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이왕이면, 많이 보고 싶었다고 하면 좋을 텐데. 누나.”
“…….”
수영선수도 울고 갈 널따란 지국장의 가슴팍에 안겨 조금 빠르게 뛰는 지국장의 심장 소리를 듣게 되었다.
지국장의 낯선 심장 소리에 멋쩍은 나는 괜스레 마른침만 삼켰다.
대답 없는 내가 걱정스러운지, 지국장은 자상한 목소리로 다독여줬다.
“많이 힘들었어? 누나 힘들 때, 옆에 내가 있어 줄 수 있었어. 다행이다!”
지국장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의외로 단단한 가슴근육에 당황스러운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틱틱거렸다.
“징그럽게 왜 이래. 이것 놔. 가족끼리는 이러는 거 아니다.”
지국장의 팔뚝을 살짝 꼬집자, 내 허리를 감싸고 있는 섹시한 힘줄의 빗장도 풀려놨다.
능글맞은 눈썹 웨이브로 한껏 발산한 지국장은 엉큼하게 도발했다.
“가족끼리? 누나랑! 정말 좋은 생각인데. 그런 의미에서 누나, 나랑 결혼하자!”
설렘 가득 찬 얼굴로 개구쟁이처럼 입매를 끌어올린 지국장의 엉뚱한 프러포즈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 나랑 뭘 하자고?”
“누나랑 나랑, 딴 딴딴 딴딴딴 결혼하고 싶다고. 알면서 모른 척하긴~. 그게 누나의 매력이지만.”
“얼어 죽을 결혼 타령 그만하고, 배고프다. 집에 가서 밥이나 먹자.”
“얼어 죽어도, 누나랑 결혼하면 좋을 텐데.”
엉큼한 지국장의 눈빛에 놀아나기 싫어, 도망가듯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
편의점으로 뒤따라온 지국장은 점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있어야? 준비는 잘 되고 있어?”
푸념하듯 한숨을 내쉰 정우가 엄살을 떨었다.
“준비만! 준비하고 있지. 잘~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나저나, 누님이랑 같이 왔네. 안녕하세요. 누님.”
“안녕하세요. 국장 친구분님.”
목례하고 음료 냉장에서 맥주 3캔을 꺼내서, 계산대 위로 올려놓자.
지국장의 눈치를 살피던 정우가 맥주 한 캔만 계산했다.
“2,700원입니다. 누님.”
나머지 맥주도 들이밀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나머지 두 캔도 마저 계산해주세요. 댕댕이 친구분님.”
기선을 제압당한 정우는 소심하게 바코드를 찍을 찰나, 지국장이 제지했다.
“맥주는 하루에 한 캔씩만 마시자. 누나.”
다섯 살이나 어린 주제에, 오빠 행세하는 지국장이 꼴 보기 싫어 콧방귀를 뀌었다.
“내 돈 주고, 내가 마시겠다는데, 가출했던 댕댕이가 무슨 상관이야. 서로 존중하잖아.”
지국장의 양손에 들린 맥주 캔을 보란듯이 빼앗아 바코드를 찍었다.
그러자 내 코앞까지 얼굴을 반짝 가져다 댄 지국장은 싱긋 웃으며 도발했다.
“맥주 두 캔 더 마시면. 나랑! 오늘부터 1일이다. 사랑스러운 누나.”
토하는 시늉을 하는 정우와 오글거림에 몸서리치는 나를 보고도, 지국장은 천연덕스럽게 쐐기를 박았다.
“오늘부터 1일 하기 싫으면. 사랑스러운 누나의 고운 손에 들린, 그 맥주 내려놓으시지.”
야릇한 눈빛으로 압박하는 낯선 지국장의 날렵한 턱선에 순간 설렜다.
‘정말 미쳤나 봐! 정신 차리자. 홍 임수! 나보다 다섯 살이 어린애라고.’
차마 못 볼 꼴 봤다는 듯, 정우가 내 맥주를 신경질적으로 빼앗아버렸다.
“맥주 두 캔에 저 버터 새끼랑 코가 꿰일 수 있으니까. 절대로 마시지 말고,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요. 누님, 분리수거는 제가 합니다. 어휴~니글거려. 김치 먹고 싶다.”
콧김을 내뽑는 정우의 다급한 절규에 정신을 차린 나는 미소년처럼 싱그럽게 웃는 지국장에게 실눈으로 철벽을 쳤다.
“애들 앞에서 냉수도 못 마신다고, 됐다. 댕댕이한테 내가 뭘 기대 하겠어! 먼저 나간다.”
지국장이 계산대로 올려놓은 각종 주전부리와 햇반, 미역국 등을 바코트를 찍던 정우가 넌지시 물었다.
“야. 진심이야?”
배시시 웃던 지국장은 평화롭게 맥주를 마시는 임수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응. 누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목적이라고 하면! 너무 부담스러운가? 누나한테.”
기고만장 잘난 맛에 사는 친구가 사랑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꼴이라니! 새삼 놀란 정우의 실눈이 국물용 멸치의 눈처럼 커졌다.
“우~와! 버터 새끼의 사랑은 위대하시네. 누구는 외로운 밤을 편의점 알바로, 달래고 있는데. 이 버터 새끼는 니글거리게 사랑 타령하니. 이 더러운 세상!”
정우의 격한 축하에 지국장은 계산대 앞에 진열된 초콜릿 박스를 들고 편의점 밖으로 도망갔다.
“고맙다. 친구야! 이건 축하의 의미로 네가 쏘는 거다. 초콜릿 잘 먹을게. 친구야.”
눈 뜨고 코 베인 정우는 진한 우정이 담긴 욕지거리를 날려줬다.
“이 기름에 튀길 놈아 XX야! 졸라 돈도 많은 XXX 주제에. 천년만년. 벽에 똥칠할 때까지, 잘 먹고 잘살아. 집어도 제일 비싼걸~. 그것도, 박스로, 가져가고 지랄이야. 헤어지기만 해 봐! 아주 아작난다. XXX 새끼. 저 버터 새끼야. 오늘 하루 일당이야. 알아.”
***
편의점 파라솔 의자에 앉아 미묘하게 설레는 파동을 잠재우려고, 캔맥주를 홀짝였다.
다가오는 지국장의 발걸음 소리에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야릇한 눈빛으로 날 바라볼까, 조바심에 궁금하지도 파라솔의 살대를 세고 있었다.
“배고프다며. 먹고 가자. 누나.”
어색한 내 발연기에 피식거린 지국장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미역국에다가 햇반을 말았다.
“누나의 솔푸드, 미역국에 말아서 기운 나게. 맛있게 먹어용~”
겸연쩍은 나는 차마 지국장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어, 턱을 괴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응. 잘 먹을게.”
미역국 놓고 제사 지내는 내가 못마땅한지, 지국장이 내 손에 숟가락을 쥐여줬다.
“말로만 먹지 말고. 입으로 드세요. 누나.”
“알았다고. 알았으니까. 내 손 좀, 그만 놔 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