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중심을 지나가고 있었다. 가족들 모두 상처를 지우고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상현의 죽음이 가슴속에 남아 다들 힘든 시기였다. 한낮의 기온이 35도가 넘어선 8월 초, 온 국민의 휴가철이 지나고 입추의 절기가 달력에 표시될 즈음에 상현의 49재가 있었다. 해외에 나가있어 참석하지 못한 진오를 제외하고는 남은 가족들 모두 교외의 한 절을 찾아 49재에 참여했다. 연호는 출발 전부터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평소 다니지도 않는 절에 집안 어른들이 멋대로 결정해 모신 위패 속의 아버지가 그렇게도 안쓰럽게 보일 수가 없었다. 물론 좋은 뜻으로 그랬겠지만, 연호는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법당을 나와 숙희와 둘이 있게 된 연호는 전부터 궁금했던 아버지의 유품에 대해 물었다.
“엄마. 아버지 유품은 다 정리했어?”
“네 아버지가 아끼시던 몇몇 물건들 빼고 정리를 한다고는 했는데, 잘 모르겠다. 옷가지나 이런 것들은 다 버리거나 태워야 좋은 곳으로 가신다고 해서.....”
“으이그, 누가 그래? 그런 거 다 미신이야. 추억이 있으면 남길 수도 있고, 또 못 쓰는 건 버릴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 것까지 다 지키려고 그래.”
연호의 불만은 종일 이어졌다. 보다 못한 숙희가 돌아서려는 그를 붙잡고 말했다.
“연호야. 오늘 같은 날은 그냥 조용히, 경건한 마음으로 있다가 가자. 맘에 안 들어도 어쨌든 아버지를 만나러 온 거잖니?”
연호는 말이 없었다. 날은 잔뜩 흐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으, 끈적끈적해. 너무 후덥지근하다.”
“그래도 다 끝나서 다행이다. 시작하기 전부터 비가 왔으면 다들 불편했을 거야.”
바람이 불었다. 머리가 흩날릴 정도로 세게 불었지만, 습기 가득한 바람은 오히려 불쾌감을 높여 주고 있었다.
“엄마, 엄마. 그런데 혹시 선화네 아주머니가 장례식에 오셨었나?”
“그럼. 첫날 왔었지. 너도 인사했잖아. 근데 왜?”
“그랬어? 아, 아니. 그냥.”
연호는 경황이 없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럼 선화도 같이 왔었어?”
숙희는 의아한 눈초리로 연호를 보며 말했다.
“네가 선화를 기억하기나 해? 어릴 적에 보고 만난 적이 없잖아?”
“기억하지 중학교 때까지 알고 지냈는데.”
“그런가? 오래돼서 가물가물하다.”
“장례식 때 오랜만에 온 사람들이 많았잖아. 갑자기 걔도 왔었는지 그냥 궁금해서......”
연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선화는 결혼해서 미국에 자리 잡고 산다더라. 아이 둘 낳고 잘 살고 있대.”
숙희는 먼 산과 연호를 번갈아 쳐다보며 아쉬운 듯 한숨지었다.
‘그랬구나!’
연호는 설명할 수 없는 민망함에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숙희는 한숨을 쉬며 넋두리를 했다.
“아까워 죽겠어.”
“뭐가?”
“뭐긴? 내가 걔를 어릴 때부터 좋아했잖아. 착하고 싹싹하고 암튼 그랬어. 걔 엄마랑 서로 며느리 삼는다, 사위 삼는다,
그러면서 장난치고 그랬던 일들이 생각나서 그런 다 왜?”
“왜 말 안 했어? 진작 얘기하지.”
숙희는 의외라는 듯, 연호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말하면? 어떻게 할 건데? 걔랑 만나서 연애라도 할 거야? 괜히 또 요 핑계 조 핑계 대면서 엄마 곤란하게 만들었겠지, 뭐.”
연호는 싱겁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근데 왜 이렇게 찝찝하지?’
마음 한구석에 뭔지 모를 아쉬움이 남아 영 불편했다. 어린 시절 잠깐 알고 지냈을 뿐이었는데도, 마치 오래 사귀다가 헤어져 다른 사람과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런 기분이었다.
‘이거 뭐지? 너무 오버하는 건데...’
‘으이그! 이게 다 그놈의 꿈같지도 않은 꿈 때문에 이런 거야!’
생각할수록 열이 뻗쳤다. 꿈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더 어이가 없었다.
‘젠장! 그 얼어 죽을 놈의 꿈 때문에 머릿속이 아주 엉망이 돼버렸어!’
꿈이었지만 꿈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복권에 당첨되는 꿈이나 꿀 것이지. 무슨 꿈을 다큐로 꾸냐?’
기억 속의 그 모든 것들을 단순히 꿈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 사실적이고 선명했다.
‘멸망하는 거 빼고는 현실적인 면이 어느 정도 있기는 해. 그렇다고 아주 저질도 아니고, 그렇다고 또 아주 수준 높은 판타지도 아니고. 암튼 짜증 나!’
꿈속의 어떤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졌고, 또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명해지는 기억의 대부분은 연호가 직접 경험했거나 실제 겪었던 일에 근거한 내용들이었고, 나머지 기억은 그렇지 않은 것들이었다. 생각할수록 불쾌하고 짜증이 났지만, 다 그런 것만은 아니라며 나름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우선은 가족들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달라졌고, 아마추어 천문가로서 우주를 바라보는 자세도 좀 더 진지하게 바뀌고 있었다.
연호는 꿈속에서처럼 학원을 그만두고 싶었다. 전부터 그만두겠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자니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만두고 난 다음도 문제였다. 생전 아버지가 한 월간지의 사진 기자로 일해 볼 생각은 없냐고 연호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너무 생뚱맞은 제안이라 관심 없는 척 거절했었는데, 돌이켜보니 무척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그때 딱 결단을 내렸어야 했어. 아버지가 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날 생각해서 그러신 걸 텐데, 너무 후회스럽다!’
학원들이 1년 중 가장 바쁘다는 4번의 시험기간 중 2학기의 중간고사가 끝난 10월은 꿈속의 이맘때처럼 혹독하게 춥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위가 완전히 물러나지 않아 낮에는 사람에 따라서는 덥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태백시 일대의 대규모 화재 이후, 한반도의 급격한 기후변화를 예고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자연의 회복력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력했다.
‘계절이 변한다는 것 자체가 이렇게 고마운 일인가!’
연호는 수업을 마치고 동생에게 출발하라는 문자를 보냈다. 수업이 일찍 끝나는 토요일이라 모처럼만에 연민과 약속을 잡아놓았던 것이다. 준비한 선물을 가지고 약속 장소까지 가는 동안 내내 발걸음이 가벼웠다. 내일은 연민의 생일이었고, 가족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그때 선물을 전해줘도 상관없었지만, 따로 할 얘기도 있고 해서 그냥 오늘 만나기로 했다.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 가까운 교외로 나갔다. 그곳에 미리 예약을 해둔 집이 있었다. 소문난 집이었다.
‘괜찮아야 할 텐데, 맛없으면 또 얼마나 잔소리를 할까. 으이그, 생각만 해도 싫다.’
연정은 토요일이라 회사에 나가지 않았고, 집에 있다가 약속 장소로 나왔다.
“왔어? 찾는데 힘들지는 않았냐?”
“힘들지는 않았는데, 오빠가 어떻게 이런 곳을 다 찾았어?”
“얘가 날 뭘로 보고! 일단 먹기나 해봐. 먹고 기절하지 말고.”
“알았어. 참! 근데 오빠가 이집 맛을 어떻게 알아. 처음 와본 거 아냐?”
“응? 아니, 후기를 보니까 그렇게 쓰여있더라고.”
“그럼 그렇지. 오빠가 이런 곳에 와볼 리가 없지.”
“야, 야. 그냥 좀 넘어 가자.”
연민은 한번 봐준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연호가 앉은 자리의 주변을 계속 살폈다.
“선물은? 줄 거면 빨리 줘.”
“야. 너 진짜 너무 한 거 아니야? 선물이 뭐가 중요하냐? 이렇게 좋은 데서 밥 사주는 오빠가 세상에 어디 있다고. 그냥 이 자체가 선물이지, 뭘 더 바라?”
“알았어. 알았으니까, 빨리 줘.”
“너는 나한테만 세게 나오더라? 밖에서도 좀 그래봐.”
연호는 투덜거리면서 선물을 건넸다.
“고마워 오빠! 근데 이거 뭐야?”
연민이 포장을 막 풀려고 할 때, 두 손을 흔들며 연호가 말했다.
“잠깐! 선물은 이따 집에 가서 풀어봐.”
“아, 왜? 그런 게 어딨어?”
“글쎄, 내 말대로 해. 그래야 감동이 두 배로 올 거야.”
“치, 알았어. 안 그러기만 해봐?”
식사를 마친 후,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대화는 잠시 멈췄고, 연민은 창밖을 보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심각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갑자기 아빠가 너무 보고 싶다. 오빠랑 이렇게 얘기하고 있으니까 아빠가 더 생각나.”
연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엔 잘 몰랐는데, 오빠는 나이가 들수록 아빠랑 점점 닮아가는 것 같아. 말투며, 걸음걸이며. 암튼 묘하게 닮은 데가 있어.”
연호는 코웃음을 치다가 갑자기 정색하며 목소리를 깔았다.
“연민아.”
연민은 또 무슨 장난을 치려나 싶어 눈길도 주지 않았다.
“네가 회사도 잘 다니고 사람들과도 잘 지낸다고 했으니까 그런 건 더 이상 물어보지는 않을게. 대신 언제든 고민거리나 힘든 일 있으면 혼자 담아두지 말고 꼭 얘기해라, 알았냐?”
“알았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진지한 거야?”
“글쎄 잘 좀 들어봐.”
연호의 눈빛이 조금은 슬퍼보였다. 연민은 진지한 얼굴로 바꾸고 귀를 기울였다.
“요즘 어디 아픈 데는 없지?”
“없어. 따로 사는 것도 아니고, 같은 집에서 30년 넘게 같이 살면서 뭘 그래, 새삼스럽게.”
“중요한 거야. 암튼 어딘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곧바로 얘기해라?”
“알았는데, 말투가 아빠랑 너무 똑같아서 좀 그래.”
“그 얘기 그만하고, 알았냐고?”
“알았다니까.”
“좋아. 그건 그렇고, 앞으로 너 자신을 위해서라도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아. 사람들은 다 똑같다. 강한 놈한테는 굽실거리고, 약한 놈은 더 밟으려고 하는 게 사람이야. 그런 대서 살아남으려면 마음을 지금보다 더 독하게 먹어야 해. 괜히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한테 상처받지 말고. 우리가 아버지, 엄마한테 사랑받으면서 얼마나 귀하게 자랐냐? 무시할 건 무시하고, 주장할 건 또 확실히 주장하고, 알았지? 하여간 뭐가 됐든 항상 나하고 먼저 상의해라? 알았냐?”
“오빠 씨? 오늘따라 잔소리가 너무 심하다. 이러려고 밖에서 만나자고 한 거지? 어쩐지 이상하더라.”
연호는 자꾸만 불안했다. 꿈 때문이었다. 안 그러려고 해도 실제와 환상이 뒤섞여 무척 혼란스러웠다.
연호는 기말고사가 끝나고 겨울방학에 들어갈 무렵 학원을 그만두었다. 자신조차도 제대로 통제를 못하면서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누굴 가르치냐?’
괜히 거창한 의미를 부여해가며 자기합리화를 마친 연호는 당분간 그냥 쉬기로 했다. 연정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덜컥 학원을 그만둔 연호를 마땅찮게 생각했지만, 속으로는 반기는 눈치였다. 숙희도 마찬가지였고, 연민은 박수까지 쳐가면서 환호했다.
“넌 내가 그만둔 게 그렇게 좋냐?”
“그럼. 잘 됐어. 거긴 쉬는 날도 별로 없고, 스트레스 받을 일도 너무 많잖아. 다른 거 하면 되지. 아직 젊잖아!”
“말은 잘한다! 너나 잘해.”
“오빠가 전부터 학원 그만두면 제일 먼저 여행 가고 싶다고 했잖아? 계획은 있어?”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지. 근데 이왕 가는 거, 좀 오래 다녀올 예정인데, 괜찮겠냐?”
“당연히 괜찮지. 오빠가 없으면 난 더 편해.”
“야! 너 미쳤어?”
연호는 일주일 정도 일정을 잡고 여행을 떠났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계획을 세울 때부터 설레더니, 출발하기 전날은 잠이 오지 않아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숙희도 연민도 무슨 군에 보내는 것처럼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했다. 연정도 근무하다 말고 전화까지 걸어 조심하라며 잔소리를 쏟아냈다.
“그렇게 믿음이 안가? 내가 지금 몇 살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
“아니, 네가 워낙 집돌이라 그러지. 그런 애가 갑자기 외국에 나간다니까 다들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암튼 조심하고, 중간 중간에 꼭 연락해라.”
“이제 잔소리는 그만. 더하면 집에 안 온다?”
그래봤자 가장 가까운 외국, 일본이었다. 혼자 해외는 나가 보고 싶었고. 더 먼 곳까지 가볼 엄두는 나지 않았기 때문에 연호의 선택지는 처음부터 많지 않았다. 7일은 순식간이었다. 오랜만에 큰맘 먹고 다녀온 여행은 더없이 큰 선물이자 축복이었다. 30년 묵은 스트레스, 그리고 육포처럼 딱딱하게 굳어 풀리지 않던 목덜미와 어깨 근육까지, 언제 그랬냐는 듯 다 사라질 정도로 여행 자체가 보약이었다.
‘진즉에 좀 나다닐걸. 집에만 있는 게 좋은 건 아니네. 그래도 가는 곳마다 사람이 너무 많긴 했어. 으이그, 지겨워!’
연호는 내친김에 국내로 눈을 돌렸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이럴 수 있을까 싶어 무리를 해서라도 움직이고 싶었다. 일본에서 돌아와 이틀을 쉬고,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계획도 없이, 목적지를 정해 놓지도 않고 무작정 떠났다.
“연호야. 좀 쉬면서 다녀야지. 너무 힘들지 않겠어?”
“오빠. 갑자기 왜 이래? 늦바람이 무섭다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좀 힘들긴 해도,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어. 언제 또 이렇게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모르니까.”
가족들은 무슨 고생이냐고 하면서도, 여행에서 있었던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연호는 차에 기름을 가득 채우고 마치 순례자가 된 기분으로 다시 집을 나섰다.
10년 전쯤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를 여행하는 도중, 오대산에 들러 고색창연한 고찰인 월정사를 돌아본 적이 있었다. 그때 우연히 들르게 된 인근의 전나무 숲을 연호는 평생 잊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인상 깊어 뇌리에 오래도록 새겨진 그곳을 이번에도 잔뜩 설레는 마음을 안고 다시 찾을 생각이었다. 그곳이야말로 매우 특별한 이번 여행의 출발지로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근데 좀 이상하네?’
연호는 갑자기 그 많은 산 중에서 왜 오대산이 먼저 떠올랐는지 의문이 들었다. 모든 상황들이 낯설지가 않았다.
‘왜 이런 기시감이 들까?’
꿈 때문이었다. 꿈은 그냥 꿈으로 끝나야만 했다. 절대로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일들뿐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머릿속에서 지워야만 했다. 이렇게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다니는 이유도 다 머리를 비우고 재충전을 하기 위해서인데, 또다시 꿈 때문에 시달릴 수는 없었다. 연호는 방향을 틀어 강릉으로 곧장 차를 몰았다. 그리고 잠깐 요기를 하고 커피를 마신 후, 태백으로 향했다. 꿈속처럼 움직이기는 싫었다.
유사 이래 가장 큰 산불이 도시 전체를 휩쓸어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태백. 사람들은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나 복구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뉴스로만 접했던 태백을 실제로 찾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곳은 여전히 불의 기운이 남아 있었고, 도시 전체에 그을음과 탄 냄새가 깊게 배어있었다. 사고 이후로 시간이 꽤 흘러 도시가 한창 재건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왔지만, 겨울이라 그런지 생각만큼 활발해 보이지는 않았다. 복구나 재건이라기보다는 아예 새로운 도시를 짓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는 말이었다. 많은 곳들이 통제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더 돌아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이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없을까?’
그런 곳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마 수소문해서 찾아간 곳은 매봉산 자락에 있는 바람의 언덕이었다. 그곳 도로가에 차를 세우고 잿더미가 된 태백산과 도시를 바라보던 연호는 마음이 영 불편해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그만 가자!’
다시 차를 북쪽으로 돌려 속초로 향했다. 영랑호를 지나 동명항에 들러 짙푸른 동해에 이르렀다. 겨울바람이 매서웠지만 한없이 무겁고 답답했던 가슴이 어느 정도는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모든 일들이 자연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면 앞으로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