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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별이 지다
작가 : 올서리
작품등록일 : 2021.12.13

언제부턴가 세상에 닥친 기후의 변화, 환경파괴, 그리고 인간성의 상실 등의 현상이 우리와 가까운 어느 별의 움직임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연호는 그 별의 흔적을 쫓아 어떻게든 세상에 알리려고 노력한다. 초신성과 고래, 오로라, 그리고 가족에 관한 이야기.

 
#25. 시간의 경계 (3)
작성일 : 22-02-19 19:20     조회 : 337     추천 : 3     분량 : 7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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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들, 휴대폰이나 TV좀 켜봐. 지금 난리가 났어!”

 

 윤지를 살피러 들어갔던 진오가 호들갑을 떨며 뛰쳐나왔다. 윤지는 곤히 잠들어 있었지만, 옆에 누워있다 보니 졸음이 밀려와 일부러 나가지 않고 있었다.

 

  ‘막상 누우니까 잠이 안 오네.’

 

 무심코 휴대폰을 보았다. 마침 속보가 올라와 있었다.

 

  “뭐야, 이게?”

 

 인터넷은 온통 사고 기사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것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해안가 도시와 고비 사막, 그리고 러시아의 우랄산맥에 크고 작은 운석들이 떨어졌다는 내용이었다. 아시아 지역 전체로 떨어진 이번 운석은 북미에서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그 어떤 감시센터에서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렇게 광범위하면서도 동시 다발적으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역시 아무런 전조가 없었다. 혹자는 북미에 떨어졌던 운석이 전조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전 세계적으로 감시가 강화된 상황에서도 운석을 예측한 국가나 단체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한국에서는 강원도 태백 쪽에 운석이 떨어져 그야말로 도시 전체가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릴 처지에 놓여 있었다. 가뜩이나 지난 화재 이후로 힘겹게 복구 중이던 태백시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고, 인명피해는 집계조차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나마 태백에 떨어진 운석은 작은 편에 속했다. 중국의 해안가에 있는 한 도시는 전체가 수장되어 그대로 바다가 돼버렸고, 고비 사막에 떨어진 운석은 그곳을 폐허 시킨 것도 모자라 그 막대한 양의 모래들이 바람을 타고 주변국으로 흩어져 심각한 황사와 미세먼지 등의 피해를 입혔다. 떨어진 운석들 중 가장 크고 강력한 것은 우랄산맥의 동쪽으로 떨어졌다. 이 운석은 우랄산맥의 5퍼센트에 해당되는 면적을 없애버리고 말았다.

  세상의 그 어떤 생명체들도 경험하지 못한 공포가 지구 전체를 덮치고 있었다. 온 생태계는 가망이나 확률 같은 것을 따지지 않고 자정과 복구에 온힘을 쏟고 있었지만, 오직 인간만이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비관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탓하고 신을 원망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연호는 대전을 벗어나 고속도로에 진입해 서울로 향했다. 운석은 온 세상을 흔들고 있었고, 그 어떤 개인적인 것도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강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에 열중하는 자신을 떠올리면서 잠시나마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으려고 했지만 모두 부질없는 일이었다. 선화와 좀 더 진지한 만남을 가져보려는 생각 또한 마찬가지였다. 꼭두는 이제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는 단계를 넘어 그 위력을 뽐내고 싶은 듯 보였다. 원인을 알 수도 없고, 그 경로조차 추적할 수 없는 운석들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인류가 알지 못하는 암흑의 공간 저 너머,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 지나 이곳 푸른 지구까지 숨죽인 채 쳐들어와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을 파멸의 길로 인도하려는 저 꼭두! 그것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누군가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그저 혼란스럽고 두려울 뿐이다.

  서울로 접어든 연호는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대전을 출발해서 지금까지 줄곧 동생이 신경 쓰여 마음은 점점 급해지고 있었다. 병원에는 간병인들 대신 숙희가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몸이 많이 약해져 예전과 같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병원을 드나들었다.

 

  “잘 다녀왔어? 윤지는 잘 있고?”

 

  “응, 거기는 걱정 말고, 연민이나 아버지, 다들 별 일 없지?”

 

  “그래.”

 

 그렇다고 하면서도 숙희의 말투는 쳐져있었다.

 

  “근데 엄마는 주말에 하루만 나오기로 했잖아.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숙희는 연민의 앙상한 팔과 다리를 계속 주무르면서 연호의 시선을 피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 간병인들이 개인사정으로 못나온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나온 거야. 너무 그러지 마.”

 

  “으이그.”

 

 숙희는 연호의 눈치를 살피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나보다 네가 더 걱정이다. 얼굴이 그게 뭐냐? 눈은 푹 꺼져가지고, 잠을 며칠 못 잔 것 같아. 그러니 살이 그렇게 빠졌지!”

 

  “아니야. 좀 피곤해서 그래. 근데 아버지는 어디 계셔?”

 

  “지금 집에 계실거야. 집에서 쉬고 계신거 보고 나왔거든. 근데 왜?”

 

  “그냥. 아버지는 요즘 좀 어떠셔?”

 

 숙희는 긴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거운 침묵이 병실 안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간호사라면 문을 두드리지는 않았을 텐데, 누구지? 연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숙희가 말했다. 깜박 잊고 있었다는 투였다.

 

  “맞다! 아마 선화일거야. 어제 통화했는데, 내가 좀 보자고, 이리로 오라고 했어.”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연호는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뭐가 됐든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선화를 만나기는 싫었다. 숙희는 무슨 죄라도 지은 듯 불안해했다.

 

  “나도 남들에게 우리 딸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다. 내가 보자고 한 거니까 너는 여기 있어.”

 

 연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어봤자 좋은 소리가 나올 리 없었다. 괜히 선화에게도 화가 났다. 이유야 어찌됐든 자기한테 말도 없이 꼭 여기까지 왔어야 했는지. 더 좋은 날, 더 좋은 분위기에서 만날 수도 있는데.

 

  ‘더 좋은 날? 도대체 언제쯤 좋은 날이 올까?’

 

  “아냐, 엄마. 내가 먼저 만나고 올게.”

 

  “내가 보자고 불렀는데?”

 

  “나도 올라와서 한 번 만나려고 했었어. 먼저 만나고 병원으로 다시 데려올게. 엄마는 선화하고 같이 식사라도 하고 오면 되잖아. 걔가 시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근데 둘이 언제 연락을 했었니?”

 

 얼른 나가보라는 숙희의 표정이 이제껏 제일 밝았다.

 

  “어, 오빠가 여기 웬일이야? 난 아주머니가 보자고해서 왔는데?”

 

  “그러게. 나도 좀 전에 올라왔는데, 엄마가 널 불렀다고 하더라고. 그렇잖아도 연락하려고 했는데, 잘 됐지 뭐. 이따가 시간 괜찮으면 엄마도 보고가.”

 

  “알았어. 원래 아주머니 보려고 온 거야. 근데 오빠도 말을 길게 할 줄 아네?”

 

 연호는 병원 앞에 있는 커피숍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얼굴에 당황하거나 싫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은 했지만, 혹시라도 그녀가 알아채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미안해 오빠. 만나서 반갑기는 한데, 왜 이렇게 불편하지? 내가 뭐 잘못한 것 같기도 하고.”

 

  “뭐가 미안해. 내가 갑자기 끼어든 건데. 미리 듣질 못해서 좀 당황했을 뿐이야. 그런 생각 하지 마.”

 

  “알았어. 근데 오빠, 이 시간에 출근 안 해도 돼?”

 

 잠시 고민을 하던 연호는 모든 걸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

 

  “음. 사실은 학원 그만둔 지 좀 됐어.”

 

 선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섣불리 어떤 얘기를 꺼내기가 매우 조심스러웠다. 연호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말없이 있는 것 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냥 전부터 누굴 가르친다는 게 나랑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집안일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시기가 맞아떨어져서 그렇게 됐어.”

 

 잠자코 듣고 있던 선화가 입을 열었다.

 

  “잘했어. 나도 어쩔 때는 애들 가르치면서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뭐 이런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거든?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을 보면 화가 나서 막 그만두고 싶고 그래. 내가 어려서부터 생각한 선생님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오빠의 그런 마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진짜 잘했어. 앞으로 다시 좋아하는 일 찾아보면 되지 뭐.”

 

 연호가 예상하던 반응은 아니었다.

 

  ‘뭐지?’

 

 선화는 연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어릴 적 함께 놀았던 기억도 있고 해서 궁금했지만, 연호가 부담을 느낄까봐 조심스러웠다. 연호는 그렇게 마음을 써주는 선화가 고마웠다.

  연호는 조만간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병실로 돌아왔다. 숙희는 선화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음식점으로 갔다. 그녀는 연호와 좀 더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게 아니냐며 미안해했다.

 

  “아니에요. 오빠는 저랑 오래 있는 걸 불편해 하는 것 같아요.”

 

  “아이고, 진짜 내 아들이지만 정말 못났다. 못났어. 미안하다 선화야. 날 봐서라도 네가 이해해라.”

 

  “괜찮아요. 오빠는 어려서부터 그게 매력인 것 같아요.”

 

 숙희는 그 나이를 먹도록 연애하는 법도 제대로 배우질 못한 아들이 한심하면서도, 한편으론 안쓰러웠다.

 

  “아이고, 선화 네가 그 무심한 녀석을 만나 고생이 많구나. 걔가 표현을 잘 못해서 그렇지 속으로는 너를 많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 내 속으로 낳아 기른 녀석인데, 내가 그걸 모르겠니? 어쨌든 이 아줌마가 너무 미안하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저도 중학교 때까지 오빠를 봐와서 어느 정도는 성격을 알고 있어요. 정말이지 그때랑 변한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20년 만에 만났는데도 말투나 행동이 그대로여서 너무 신기했어요.”

 

 숙희는 여전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내 아들이 하는 꼴을 보니 너에게 정말 염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도 성격이 좀 그런 녀석이 동생 저렇게 된 후로는 영 마음도 못 잡고, 직장까지 그만두면서 방황하고 있는 게 너무 안쓰럽구나. 그렇다고 친구나 만나는 사람도 없고 말이다. 선화 네가 친구가 되어주면 좀 괜찮을 것 같아서 내가 욕심을 부려봤단다. 마음은 주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동네오빠로 생각하면서 좀 가까이 지내주면 안 되겠니? 네 엄마한테 욕먹을 일인가?”

 

 숙희는 씁쓸하게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화는 다른 한 손으로 숙희의 손을 움켜쥐면서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가 좋아서 오빠를 만나는 거지, 마음에도 없는데 만나고 그러지는 못해요. 그냥 오빠가 싫어질 때까지 계속 만날 생각이에요.”

 

 숙희는 선화가 너무 고마웠다. 이게 뭐라고 날아갈 만큼 기뻤다. 뿌듯했고 몸도 한없이 개운했다. 무슨 인생의 큰 소망을 이루기라도 한 느낌이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고,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자신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숙희는 선화의 손을 쓰다듬으며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웃고 있는 선화의 모습에서 딸 연민이 겹쳐져 보였다. 그때였다. 밤하늘 위로 유성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마치 어두운 방에 불을 켠 듯 환하게, 그리고 쏜살같이 어딘가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예전처럼 아름답고 신비하지만은 않았다. 그것들은 필시 이 땅위 어디엔가 떨어져 큰 피해를 입힐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연호는 숙희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 같았으면 집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그녀와 실랑이를 벌이는 게 일상이었지만, 오늘따라 그녀는 기분이 좋아 보였고, 들떠 보였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연호는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유야 어쨌든 좋으면 좋은 거였다. 오랜만에 보는 숙희의 밝은 표정에 연호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한 가지, 아까 병실에서 본 유성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이후로 지금까지 그 어떤 소식도 접하기가 싫어 휴대폰이나 TV를 일부러 외면했다. 성질만 더러워 질뿐, 안타까워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에는 상현이 먼저 퇴근해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연호는 상현에게 인사를 건네고 TV를 외면한 채 2층으로 올라갔다. 상현의 탄식이 메아리처럼 연호의 귀를 울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또 운석이 떨어졌네. 진짜 세상이 망하려나보다!”

 

 세상은 또다시 떨어진 운석 얘기로 난리 법석이었다. 이번 운석은 동해로 떨어졌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를 일깨워주는 속보나 뉴스들이 시시각각으로 쏟아져 나왔다.

  동해로 떨어진 운석은 한국은 물론 이웃 국가들의 해안가로 엄청난 해일과 지진을 일으켰다. 동해안과 일본의 연안, 그리고 러시아의 해안가 도시들은 비상이었다. 바닷속 환경이나 생태계의 파괴 또한 매우 심각했다. 러시아는 지난 우랄산맥에 떨어진 운석에 이어 또다시 큰 피해를 입었고, 세상은 소리도 없이 연이어 시간의 경계를 넘어온 운석에 다시 일어설 기력조차 잃어가고 있었다.

  연호는 텅 빈 연민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동생이 그토록 아끼던 꽃들은 모두 시들고 말라있었다. 동생의 체취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 바다에서는 강력한 해일이 몰려오고 있을 터였다. 수많은 지역에 피해를 입힐 것이고 많은 사람들을 다치거나 죽게 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연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최후의 그날이 올 때까지 꼭두는 집요하게 우리를 더 괴롭힐 것이다. 아마도 그것을 막을 길은 없겠지. 네놈이 무슨 짓을 하든, 나는 끝까지 가족을 지킬 것이고, 나의 할 일을 하며 최후를 기다릴 것이다. 오려거든 이토록 비열하게 간을 보지 말고, 곧장 오너라. 네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미친 듯이 달려와 이 땅의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다 쓸어버려라. 네놈이 베풀 수 있는 그 마지막 자비가 우리들을 저 끝없는 고통으로부터 구원하는 길이리라.」

 

 3시가 넘어 새벽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온몸이 저리고 뼈마디가 아팠다. 연호는 할 수 없이 동생 방을 나와 2층으로 올라갔다. 방으로 가기 전에 작업실에 들러 안을 둘러보았다. 오래도록 주인을 기다리는 여러 장비들,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마음의 위안을 주던 그림들과 화구들이 마구 흩어져 있었다. 평소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필요도, 의미도 없는 물건들일 뿐이었다. 아무리 새 것 일지라도 해가 지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달력처럼, 작업실들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느껴졌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었다. 끝 모를 절망감과 우울함이 밀려와 견딜 수가 없었다. 등골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연호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고 서둘러 작업실을 나왔다.

  방으로 건너온 연호는 책상 위에 놓인 스탠드만 켠 채 의자에 앉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늘 그렇듯 새벽은 한 뼘처럼 금방 지나가게 될 것이고, 약간의 무료함을 달랠 음악이 있으면 그뿐이었다. 습관처럼 오디오의 전원을 눌렀고, 브루크너의 교향곡이 담긴 CD를 트레이에 넣었다.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 어릴 적부터 애지중지하던 소장품이자 너무나도 좋아하는 곡들이었다. 마치 신비하고 무한한 우주를 표현한 듯한 특유의 화성과 음향에 이끌려 그것들을 듣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때도 있었다. 삶에 지쳐 힘들 때면 언제나 그의 스케르초에 열광하며 위안을 받았고, 꺼져가는 심장을 다시 뛰게 해주기도 했다. 지금 흘러나오는 곡은 그의 교향곡 8번이었다. 2악장의 스케르초를 지나 3악장이 흘러나왔다. 연호는 자기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브루크너는 진정 세상의 종말을 예견한 것일까? 어떻게 이런 곡을 쓸 수가 있지?’

 

 곡은 어느새 4악장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연호는 갑자기 음악을 껐다. 끝까지 들을 용기가 나질 않았다. 곡이 끝나면 세상도 끝나버릴 것만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종말이든 뭐든 올 테면 얼마든지 와보라는 패기는 또 무너지고 없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새벽의 고요만이 남았다. 소름 끼치는 정적이 세상을 옥죄고 있었다. 연호는 숨을 죽인 채 대기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더 집중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리고 집중해도 그 속삭임은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진 속 세상처럼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냥 이대로 죽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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