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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별이 지다
작가 : 올서리
작품등록일 : 2021.12.13

언제부턴가 세상에 닥친 기후의 변화, 환경파괴, 그리고 인간성의 상실 등의 현상이 우리와 가까운 어느 별의 움직임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연호는 그 별의 흔적을 쫓아 어떻게든 세상에 알리려고 노력한다. 초신성과 고래, 오로라, 그리고 가족에 관한 이야기.

 
#23. 시간의 경계 (1)
작성일 : 22-02-17 05:49     조회 : 387     추천 : 3     분량 : 7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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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연호는 너무나도 낯선 곳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이곳이 물속인지, 하늘 위인지조차 구분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숨은 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겁에 질린 연호는 혹시라도 엄마가 자기를 찾아오지는 않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꼭 엄마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구원해 줄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나마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연호는 목을 길게 빼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거리를 가늠할 만한 그 무엇도, 어딘지 알아낼 수 있는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어린 연호가 감당하기에는 낯설고 무서운 곳이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부터는 흘끗흘끗 주변을 돌아보기도 하면서 나름 적응해가고 있었다.

  맨발에 얇은 옷을 걸친 연호는 견딜 수 없는 추위에 온몸을 떨었다. 혼자 남겨진 두려움이 더해져 몸과 마음은 점점 더 움츠러들고 있었다. 이대로 얼어 죽는 것은 아닌지, 마지막으로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질 않았다.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리던 연호는 문득 이곳이 생각만큼 그렇게 춥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오히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더없이 이상적인 곳이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조금씩 용기를 냈고, 아주 조심스럽게 일어나 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걸음을 내디딜만한 용기는 나질 않았다. 도무지 그 끝을 알 수 없는 천 길 낭떠러지 위에서 여차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원초적인 공포가 그를 붙잡고 있었다.

  그때였다. 세찬 바람이 연호가 서 있는 곳을 향해 불어왔다. 끈적끈적한 소금기를 머금은, 바다의 냄새가 가득한 바람이었다. 두려움인지 호기심인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연호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현기증이 나서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바람을 따라 거대한 그림자가 천천히 그를 향하여 다가왔다.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대던 연호는 자신의 머리보다도 더 큰 눈동자와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것은 고래의 눈이었다. 아주 거대한 고래였다. 연호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고, 고래 또한 연호와 경쟁하듯 꼼짝도 하지 않고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마치 누가 더 오랫동안 깜박이지 않고 버틸 수 있는지 내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서웠지만, 한편으로는 고래를 바로 코앞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했다. 연호는 고래의 전체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고래는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았다. 그 몸체의 끝이 어딘지, 등의 높이나 꼬리조차도 전혀 보이질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고래는 마치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듯 연호가 있는 쪽으로 지느러미를 내밀었다. 그리고 다시 연호를 쳐다보았다. 망설이는 연호에게 고래는 어서 올라타라는 듯, 지느러미를 흔들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 더 있어봤자 좋을 게 없었고, 그 거대한 고래의 순박한 눈망울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연호는 용기를 내어 지느러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고래는 망설임 없이 지느러미를 들어 올려 연호를 자신의 머리 위쪽으로 올려다 놓았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던 연호는 생각보다 푹신하고 온기가 느껴지는 고래의 머리 위에 바짝 엎드렸다. 고래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미끄러지듯 힘차게 솟아올랐다. 심장과 몸속의 장기들이 모두 밑으로 내려앉을 것만 같은 느낌에 연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으악!”

 

 고래는 연호에게 보여줄 것이 많은 듯, 무한의 공간 이곳저곳을 유영하며 기웃거렸다. 수많은 별들과 처음 보는 생명체들, 그리고 퀘이사(quasar)나 펄서(pulsar)와 같은 무시무시한 천체를 보면서 연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함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공간을 벗어나 고래가 데려다준 곳은 우주 공간만큼이나 신비하고도 두려운 곳이었다. 그곳은 심해였다. 그 상상을 초월하는 기괴한 모습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연호는 갑자기 찾아온 완전한 어둠에 놀라 어리둥절했다. 고래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빛마저 묻히고 시간조차 멈춰버린 곳이었다. 그 시간의 경계에서 고래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연호는 속이 울렁거려 심호흡을 했다. 속이 좀 가라앉을 무렵, 이제까지 고래의 머리위에서 느꼈던 온갖 생각과 감정들이 다 사라져 버리는 듯 했다. 그 경계에서는 한낱 인간의 감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보였다. 그곳은 빛과 시간은 물론,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빨아들일 것만 같은 곳이었다.

  고래는 다시 움직였다. 또 다른 시공간을 향해 어디론가 빠르게 유영하고 있었다. 귓가에 전해지는 것이라고는 오직 대기의 속삭임과 같은 익숙한 소리뿐이었다. 그렇게 고래와 하나가 되어 꽤 오랜 시간을 어둠을 뚫고 지나왔을 때, 갑자기 저 멀리서 빛나고 있는 한줄기 빛을 목격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강렬한 빛이었다. 눈이 멀 것만 같아 도저히 쳐다볼 수가 없었다. 고래도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빛을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연호는 곧 죽음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가족들이 보고 싶었고 무서웠지만, 그렇게 후회스럽지는 않았다. 이렇게 경이로운 세상을 돌아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고래, 내내 침묵하던 그 거대한 고래도 연호를 위로하며 안심시켜 주었다.

 

  ‘내가 옆에 있으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마. 그게 어디든 나는 너와 함께할 거야.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세상을 향해 저 시간의 경계를 지나는 것뿐이니까, 안심해. 너는 나와 함께 영원히 같이 갈 거야.’』

 

 

  다른 무엇보다도 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던 어린 시절, 고래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보고난 후에 꾼 꿈, 연호는 그날 밤, 평생 잊지 못할 꿈을 꾸었다. 그곳이 우주 공간인지 바다 속인지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에서 어마어마한 크기의 고래와 함께 유영을 했던 기억, 그 놀랍고도 환상적인 경험을 잊지 못해 다시 그 꿈을 꾸기만을 평생 기다렸지만, 연호는 아직까지 그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어른이 된 후에는 꿈속에서 마지막 순간 들어섰던 그 경계의 너머가 분명 블랙홀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둠속에서 보았던 최후의 빛은 초신성이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벤트 호라이즌(event horizon), 특이점, 중력파 등 어른이 되어서야 겨우 이해할 수 있었던 그 난해한 개념들을 어릴 적, 그 꿈속에서 모두 보았던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연호는 죽어도 잊지 못할 그 꿈의 유영을 가능하게 해준 고래에 대해서 늘 생각했지만, 더 이상 나타나주지 않음을 무척 아쉬워했다. 그 빛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에 고맙다는 눈인사조차도 못한 것이 평생 안타까움으로 남아 있었다.

 

 

  긴 겨울이 지나고 다시는 올 것 같지 않던 봄이 찾아왔다. 어떤 것들은 점점 변해가고 있었고, 또 어떤 것들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봄이 오긴 했지만 꽃들은 거의 피지 않았고, 그토록 내리고 또 내리던 눈들은 이제 그 양을 다했는지, 지난 2월 초순 이후로는 거의 두 달째 건조한 날씨가 지속되고 있었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눈이나 비소식이 없다고 알려졌고, 사람들은 지난해처럼 또 건조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지난겨울, 모든 것이 얼어붙을 정도로 많은 눈이 내렸기 때문에 그동안 계속되던 물 부족이나 건조함은 어느 정도 해소가 된 상태였다. 물 부족 현상이 조금 나아졌다고 해서 인간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들이 풍족해진 것은 아니었다. 예측이 불가능한 기후와 변덕스러운 날씨 덕에 지구상 거의 모든 곳에서 농산물의 작황이 나빠지고 있었다. 발을 붙이고 살 땅에 이어, 물의 부족, 그리고 식량과 자원의 부족까지 이어지면서 그야말로 이 세상은 영원토록 고통이 이어진다는 무간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국가 간의 인적교류나 물류, 관광산업 등도 예전보다 그 규모가 많이 축소된 상태였다. 비행기와 선박들의 잦은 사고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들은 운송규모를 축소하거나 심지어는 운항 자체를 중단했고, 지구촌의 경제나 문화적 교류, 유통산업 등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태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 이면에는 사람들이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공포의 왕, 바로 북미에 떨어진 운석의 영향도 있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고를 겪은 사람들은 화산이나 지진 등과는 또 다른 차원의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자기 것을 지키려고만 했다. 모두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살던 방식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또한 증오의 대상이 필요했던 그들은 원초적 두려움을 잊기 위해 서로를 헐뜯고 무너뜨리기에 급급했다. 각종 범죄나 퇴폐주의, 허무주의나 종말론 등이 온 세상을 휩쓸며 우리 모두를 끝도 없는 나락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연민은 점점 야위어만 갔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혼수상태 자체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합병증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여러 가지 합병증들이 찾아와 그녀를 더 깊은 수렁으로 내몰았다. 피부는 욕창이나 진물 등으로 부스러져 나갔고, 심지어는 괴사가 진행되는 곳도 있었다. 죽은 생선에서나 볼 수 있는 눈빛과 하루라도 씻기지 않으면 악취가 배어 나오는 몸뚱이는 그냥 시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가족들 모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조금씩 지쳐가면서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병원 측에서는 이미 연민을 포기한 상태였다. 연명치료만 하고 있을 뿐, 보호자의 동의만 있다면 언제든지 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가족들을 만나 더 이상의 치료는 무의미하다고 설득하려 했지만, 그 누구도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법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병원에서는 연민을 뇌사로 판정해 안락사를 권고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뇌사상태가 아니었다. 그들은 변호사를 동원해 온갖 법리적인 해석을 적용하여 해결책을 찾고 있었다.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도리어 죽이는 방법을 찾는 꼴이었다. 오랜 시간을 고민하던 병원 측에서는 의학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의식불명의 상태가 지속되는 이런 경우는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안락사를 시켜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미친놈들 아냐? 지들 가족이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나쁜 새끼들!”

 

 연호는 연민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병원 측을 대표해서 온 변호사와 실랑이를 벌였고, 끝내 이성을 잃고는 그를 폭행하고 말았다. 그 일로 난생처음 경찰서를 드나들며 불편을 겪어야 했다. 다행히 병원 측에서 일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에 유치장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연호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에 대해 자책했고, 한동안 마음고생을 했다. 더 이상 그 병원에 머무를 수가 없었던 가족들은 연민을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만 했다. 그곳은 진오의 학교 선배가 원장으로 있는 중소규모의 병원이었고, 더 이상 안락사에 대해 문제 삼지 않기로 하고 입원을 결정했다.

  연호는 그 일 이후로 한동안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했고, 한없이 무기력한 날들을 보냈다. 병원은 동생 때문이라도 드나들었지만, 그 외에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운석으로 인한 사고 이후로 끓어오르던 꼭두에 대한 의욕도 다시 차갑게 식어버렸다. 늘 똑같은 가설과 의문의 반복, 그리고 매번 같은 결론에 도달하면서도 전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싫었다. 끼니마다 먹어 물린 음식처럼 단 한 장의 자료조차 쳐다보는 것도 싫었다. 그는 몹시 지쳐있었다.

  아들의 지친 모습을 지켜보면서 답답해하던 숙희는 고민 끝에 따로 선화를 불렀다. 지금은 연호와 만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뭐라도 해야만 했기 때문에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다.

 

  “선화야. 네가 우리 연호의 마음 좀 잡아주지 않겠니? 그냥 친구로서 도와줬으면 좋겠다. 지금 얘 주변에는 마음을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단다.”

 

 조심스러운 문제였지만, 숙희는 그런 걸 따질 경황이 없었다. 세상이 다 무너져 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은 돌보지도 않은 채 오직 동생만을 챙기는 아들의 모습은 그녀의 귀와 눈을 멀게 만들었다.

 

  “네, 아주머니. 그렇게 할게요.”

 

 다행히도 선화는 연호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에 연호를 담아 두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남몰래 좋아했던 동네 오빠에 대한 추억이 그날의 만남 이후로 되살아나 연호의 연락을 기다렸다. 하지만 연락은 없었고, 기별도 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몹시 낙담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어른들끼리 알고 지내는 처지에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워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부모를 통해서 연민이 처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선화는 연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고 기다림에 지쳐가던 무렵, 숙희에게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가뭄 뒤 단비처럼 그녀를 흔들었다.

 

  “근데, 제가 오빠 번호를 몰라서요.”

 

 숙희는 선화가 여태껏 아들의 휴대폰 번호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에 그저 말문이 막힐 따름이었다.

 

  “어휴, 이 한심한 녀석. 내가 정말 미안하다, 선화야.”

 

 선화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남의 집 귀한 딸에게 못할 짓을 시키는 것 같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나마 선화는 싫은 눈치가 아니었고, 오히려 연호를 돕겠다며 더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친 연호를 살리는 것 말고도 집안의 문제는 또 있었다. 입원비 때문이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입원비는 이미 가족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상현은 걱정 하지 말라며 가족들을 안심시켰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복귀를 한 상현은 출판업계의 상황이 매우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몸집을 키우려다 뜻대로 되지 않아 난감한 상황에 몰려있었다. 당연히 이사회에서 상현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는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고, 가족들은 그런 사실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들 조금씩 힘을 모아 버티고 있었다. 가족들은 무엇보다 상현과 숙희의 건강이 걱정이었다. 특히 상현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다들 신경을 쓰고는 있었지만, 상현은 언제나 괜찮다고 말하며 말을 돌리곤 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의 몸속에서는 자라나서는 안 될 것들이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된 상현은 그동안 끊었던 술을 다시 입에 대기 시작했고, 그 횟수가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현의 몸속에서는 다발성 암 덩어리들이 곳곳에서 자라났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그의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서서히, 은밀하게 그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마치 꼭두와도 닮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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