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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별이 지다
작가 : 올서리
작품등록일 : 2021.12.13

언제부턴가 세상에 닥친 기후의 변화, 환경파괴, 그리고 인간성의 상실 등의 현상이 우리와 가까운 어느 별의 움직임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연호는 그 별의 흔적을 쫓아 어떻게든 세상에 알리려고 노력한다. 초신성과 고래, 오로라, 그리고 가족에 관한 이야기.

 
#21. 전조 (1)
작성일 : 22-02-14 18:29     조회 : 359     추천 : 3     분량 : 9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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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정은 주말마다 서울과 대전을 오가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진오도 매주는 아니었지만, 거의 주말마다 서울에 올라와 처제와 장인의 건강을 살폈다. 중간 중간 간병인을 쓰기는 했지만, 숙희는 딸의 곁을 한시도 비우려 하질 않았다. 가족들 모두 연로한 그녀마저 쓰러지지 않을까 애를 태웠다. 상현과 연호도 최대한 시간을 내가면서 병원을 드나들었지만, 정작 연민은 그런 가족들의 간절함을 모르는 듯, 아무런 변화도 없이 누워만 있었다. 그녀는 단지 숨 쉬는 인형일 뿐이었다.

  연호가 원장에게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낸 지 일주일이 지났다. 학원 측에서는 급히 다른 선생을 채용했고, 하루 만에 뚝딱 인계를 해주고는 학원을 나왔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진행되어 다행이기는 했지만, 별로 아쉬운 기색도 없이 새로운 강사를 채용하는 원장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뭐야? 내가 이 정도였어?’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뿐, 홀가분한 마음으로 학원을 나왔다. 마지막 수업에는 그동안 연호를 따르던 학생들이 나름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살짝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역시 잠깐이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 잊게 될 일이었다.

 

  ‘이제부터 뭘 하지?’

 

 연호는 도서관에 다니거나 평소 시간이 없어서 하지 못했던 일들을 보면서 지내다보니 아무래도 학원을 다닐 때 보다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그렇다고 가족들을 속여야 하는 입장에서 병원에 자주 갈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남아도는 시간이 이렇게 지루하고 어색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연호는 매일같이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집을 드나들었다. 어쩌다가 갈 곳이 없어 일찍 들어오기라도 하는 날이면 집안에 있는 것이 가시방석이었다.

 

 

  12월에 찾아온 한파는 무서운 기세로 이어지며 멈출 줄을 모른 채 지속되었다. 단 하루도 누그러지는 날이 없었다. 연일 더해가는 기록적인 한파는 기상 관측이래 처음이라고 알려졌으며, 앞으로 얼마나 더 추워질지 알 수 없다는 보도에 사람들은 더 불안에 떨었다. 연호는 평소 겨울을 좋아하고 추위를 잘 견디는 편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런 추위는 죽음으로만 끝낼 수 있는 것이었다.

  대설이 지난 어느 주말, 연호는 두툼하게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도로의 정체가 이어졌다. 대전으로 가는 길이 아주 멀게만 느껴졌다. 연정에게는 문자만을 남기고 가는 중이었다. 뒤늦게 문자를 본 연정이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야, 갑자기 뭐야?”

 

  “이번 주말에 수업이 없어서 그냥 가는 거야. 아, 몰라! 이따가 만나서 얘기해.”

 

 연정은 평소보다 일찍 연구원을 나섰다. 진오는 학회일로 부산에 내려가 있었다.

 

  “야, 말도 없이 어쩐 일이야? 어차피 내일이면 나도 올라갈 텐데, 힘들게 뭐 하러 내려왔어?”

 

 시큰둥한 표정으로 연호가 말했다.

 

  “뭐, 내가 못 올 때라도 왔나? 그냥 올 수도 있지. 윤지도 보고, 누나도 보고. 그리고 내일 올라갈 때, 내가 운전하면 편하고 좋잖아.”

 

 윤지는 삼촌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내내 기다리며 버티다가 잠이든 상태였다.

 

  “윤지는?”

 

  “지금까지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가 방금 잠들었어.”

 

  “그랬어? 살짝 보고와도 되지?”

 

 윤지는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연호는 한참을 바라보며 웃었다.

 

  ‘얘가 날 웃게 만드는 세상 유일한 존재구나!’

 

 실실거리며 뒷걸음으로 나오는 연호를 향해 의심 가득한 눈길로 연정이 다그쳤다.

 

  “야! 너 무슨 사고 쳤지? 빨리 말해봐, 어서!”

 

  “사고는 무슨 사고를 쳐?”

 

 사실 학원을 그만두었다는 얘기를 하려고 내려왔지만, 막상 누나와 마주하고 나니 입이 떼어지질 않았다.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되는 것은 아닌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연호는 다시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나, 학원 그만뒀어.”

 

 연정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그냥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는 정도였다.

 

  “으이그, 거봐.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입을 다물고 있는 누나를 보면서 연호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인내심뿐이었다.

 

  ‘누나가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리자. 그런 후에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이 좋겠어.’

 

  “그래! 이왕 네가 그렇게 결심한 거, 그동안 못해본 일이나 실컷 해봐라. 더 나이 들어서 결혼하고 그러면 그때는 힘드니까, 지금 맘대로 한 번 해봐.”

 

  “지금 놀리거나 비아냥거리는 거 아니지?”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다. 진정 누나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뭘 그렇게 의심을 해? 어차피 다 저질러 놨으면서. 사실은 나도 네가 주말도 없이 그렇게 다니는 거 진짜 맘에 안 들었는데, 이참에 쉬었다가 공부 좀 더해서 대학원을 다녀보던가, 어쨌든 다른 길을 찾아봐. 네가 올해 서른다섯인가?”

 

  “응.”

 

  “그 정도면 아직은 괜찮아.”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긴 한데, 혹시 지금 어금니 꽉 깨물고 억지로 말하는 건 아니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시끄럽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누나 좀 더 도와줘라.”

 

  “당연하지. 사실 그러려고 그만둔 거야.”

 

  “뭐?”

 

  “아니, 말이 그렇다고.”

 

  “암튼 그동안 엄마나 아버지 속이느라 고생 좀 했겠다. 내가 나중에 분위기 봐서 잘 말씀드릴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앞으로 뭘 할지나 잘 생각해 봐.”

 

 연정은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말했다.

 

  “연민이나 엄마, 아버지, 그리고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그 말도 안 되는 행성 문제까지, 앞으로 우리가 신경 써야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니까, 네가 우리 집의 중심이 돼서 그 좋은 머리 좀 잘 굴려봐. 이 누나가 아주 힘들다!”

 

 연호는 자신의 결정을 받아준 누나가 진심으로 고맙고 미안했다. 연정도 속으로는 걱정이었지만, 일단은 동생을 믿어보기로 했다.

 

  “내일 일찍 올라가자. 윤지가 삼촌이랑 같이 올라간다고 하면 엄청 좋아하겠다. 자, 일찍 출발하려면 너도 얼른 자라.”

 

  “알았어. 근데 오자마자 자래. 더 있다가 잘 거야.”

 

 갑자기 웃음이 터진 연정이 엉뚱한 소리를 했다.

 

  “연민이가 너 학원 그만 뒀다는 거 알면 아마 놀라서 벌떡 일어날 거다!”

 

  “뭔 소리야, 그게.”

 

  “뭔 소리긴. 그만큼 충격적이라는 거지!”

 

  “제발 그러기라도 했으면 소원이 없겠다.”

 

 

  늦가을부터 심상치 않던 차가운 공기는 겨울의 시작부터 한파로 변하여 단 하루도 멈추지 않고 기록을 갈아치우며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수은주는 이곳이 극지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사람들은 빙하기가 찾아온 것이 아니냐며 난리였고, 겨울에 대한 인간의 오랜 고정관념을 넘어선 지는 이미 오래였다. 학교들은 저마다 방학을 앞당겼고, 난방이나 전열 기구 등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모든 에너지는 날마다 곡예를 하며 아슬아슬하게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고, 거리의 상점들 또한 개점휴업 상태였다. 도심은 물론 각종 산업 시설 등의 전기 공급이 불안정해지면서 추위도 모자라 기초적 생활에 큰 불편을 겪어야만 했다. 한파로 인한 각종 사건과 사고까지 폭증하면서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고, 사회 전반적으로 동력이 떨어져 경제는 크게 위축되고 있었다.

  이러한 이상 한파는 몇몇 나라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한파 피해가 속출하는 북반구와는 달리 남반구는 혹서로 인한 피해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농작물의 작황이 크게 나빠지면서 나날이 심각해지는 식량부족 사태는 국제적인 분쟁의 뇌관이 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나마 아직까지 더 큰 분쟁이나 전쟁으로 치닫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자연재해에 의한 피해가 워낙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두려움에 빠진 사람들은 다른 생각은커녕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들었다.

  두려움은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전염의 매개는 바로 기후의 급격한 변화였다.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온 극지방의 고온 현상은 최근 들어 그 속도가 너무 빠르게 진행되어 많은 전문가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었다. 빙하들은 하루가 다르게 녹아내렸고, 적도나 열대지방은 오히려 날이 갈수록 온도가 낮아져 심지어는 눈이 내리는 곳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기온의 역전에 의한 생태계의 파괴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생태계라는 것은 자신들과 크게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무지와 오만을 벌하기 위해 꼭두는 제 한 몸 불살라버릴 준비를 마치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기온의 역전을 먼저 감지한 철새들은 따뜻한 곳을 찾아 더 이상 먼 곳으로 이동하지 않았으며, 삶의 터전을 찾아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야 하는 일부 새들조차도 얼마 가지 못하고 방향을 잃어버리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계절의 변화에 대해 누구보다 민감한 동식물들은 오랜 습성과 본능에 따라 행동할 뿐이었지만, 있어야 할 곳에 없고, 없어야 할 곳에 나타나는 그들의 불특정한 움직임에 많은 사람들이 불길한 전조라며 두려워했다. 또한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래들의 떼죽음도 전 세계적으로 보고되었으며, 인간의 눈과 머리로는 그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건조한 기후로 인한 산불이나 농작물의 피해는 더 이상 새로운 소식도 아니었다. 육지의 피해도 심각했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먼 바다로부터의 피해였다. 극지방의 고온현상으로 인해 빠르게 녹고 있는 빙하는 해수면을 점점 상승시켰고, 그 결과 태평양이나 인도양의 작은 섬들, 나아가 전 세계의 해안가에 위치한 도시들이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인간들은 육지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삶의 터전이자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할 땅의 불안정성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자극했고, 자극은 지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먹고, 숨 쉬고, 디딜 수 있는 한 평의 땅조차도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사람들은 전대미문의 두려움 속에서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난 병실에는 소름끼치는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연민의 발작에 모두들 진땀을 흘린 후였다. 의료진들을 수습을 끝낸 후 병실을 나갔고, 지친 연정은 연민을 지켜보면서 그녀가 안정을 취할 때까지 기다렸다.

 

  “연호야. 난 엄마한테 가 있을 테니까, 네가 좀 보고 있어.”

 

  “알았어.”

 

 연정은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병실 문을 잡고 한참을 서있었다. 침대 옆에 앉아있던 연호가 다가가 연정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왜 그래?”

 

  “아냐, 좀 어지러워서,”

 

  “힘들면 그냥 집에 들어가. 내가 왔다 갔다 할게.”

 

  “괜찮아. 걸으면 좀 나아질 거야.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라.”

 

 병실 안은 어수선했다. 모든 게 맘에 들지 않았다.

 

  “으이그. 왜 이렇게 짜증이 나냐!”

 

 바짝 긴장했던 연호도 만사가 귀찮았지만, 정돈이 되어있지 않은 주변이 너무나도 거슬렸다. 일단은 무조건 치워야만 마음이 안정될 것 같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정리, 정돈에 열을 올렸다.

 

  “이제 좀 낫네.”

 

 마지막으로 침대 주변을 정리하던 중, 연호는 연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발작 때문인지 오늘따라 더 창백하고 힘들어보였다.

 

  ‘차라리 깊은 잠에 빠진 거라고 누구든 그렇게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한참을 멍한 표정으로 연민을 바라보던 연호의 안색도 창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발작의 후유증은 연민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아직도 가슴은 두근거렸다. 침대 끝자락에 고개를 처박고 코를 훌쩍거렸다.

 

  ‘칠칠맞게 콧물이 뭐냐.’

 

 발작은 예측이 불가능했고, 시도 때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 마구 떨면서 거품을 물었고, 심하면 눈이 돌아가기까지 했다. 또 어쩔 때는 죽은 듯이 누워있다가도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기도 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들도 그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며 고스란히 그 광경을 감내해야만 했다. 발을 동동 구르며 누군가는 연민을 붙잡고, 또 누군가는 간호사를 호출하는 것뿐,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호출을 듣고 달려온 의료진들은 가족들을 내보내고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연정은 병실 앞 의자에 앉아 온몸을 떨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어설프게 두려움을 감춘 연호는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나는 것도 모른 채, 어서 상황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자신의 건강을 돌아보지 않고 연민을 지키던 숙희가 쓰러진지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같은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그녀의 상태는 좋지 않았고, 가족들의 근심은 나날이 더해져만 갔다. 어느 날, 연정은 병원에 나와 있는 상현에게 말했다.

 

  “아버지. 내가 연호, 학원 그만두라고 했어.”

 

  “그래? 그래서 그만 뒀어?”

 

  “응. 전부터 본인이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대.”

 

  “그래?”

 

  “그래서 당분간 집안일도 돕고, 또 나랑 같이 할 일도 있고 해서 잘했다고 했어.”

 

  “그렇잖아도 얼마 전에 출판사에서 일해 보는 건 어떠냐고 얘기했었는데, 아직까지 별 얘기가 없어서, 그냥 기다리고 있었지.”

 

  “아버지가 그랬어? 근데 나한테는 한마디도 안하던데?”

 

  “네가 잘 얘기해봐.”

 

  “아주 웃긴 녀석이야. 암튼 알았어요. 근데 아버지는 요즘 어때?”

 

  “난 신경 쓰지 마. 괜찮으니까 네 엄마나 잘 챙겨라.”

 

  “엄마는 좀 과로해서 그런 거야.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

 

  “그러면 다행이다만...”

 

  “이 서방이 저번에 검사했던 병원에 예약해 놨으니까, 그때 나랑 같이 가.”

 

 연호는 더 이상 눈치 볼일이 없었다. 맘 편히 병원과 대전을 오가며 동생과 엄마를 돌보고 또 누나를 돕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사실 대전에 갈 일은 많지 않았다. 더 이상 꼭두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일로 내려가는 일은 없었다. 연정도 다른 논문이나 프로젝트의 계산 오류 등을 검토해 보라고 맡겼을 뿐, 사라진 행성에 대해서는 되도록이면 언급을 피했다. 동생을 위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더 이상 눈에 띄는 변화를 찾아볼 수 없어 당분간 연구를 중단하기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었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연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조용히 음악을 듣고 있었다. 병실에서 맞는 새벽은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귀가 아파 한참을 듣던 음악도 멈추고 이어폰을 뺐다. 주변이 더 적막하게 느껴졌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오직 가습기 소리와 연민의 숨소리, 그리고 눈이 쌓이는 소리뿐이었다.

 

  ‘이제는 하다하다 눈이 쌓이는 소리도 들리네. 참 나!’

 

 적막과 침묵은 익숙했다. 새삼 불 꺼진 병실 안이 우주의 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곳은 이곳보다 더 적막할까?’

 

 그토록 바라던 진실이 그곳에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르릉-, 그르릉-」

 

 연호는 적막을 뚫고 들리는 대기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지난 봄보다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짐승의 마지막 숨소리처럼 들렸다. 소름이 끼쳤다. 귀를 막고 몸을 움츠렸다. 악몽 같은 이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가습기에서 끊임없이 분무되어 나오는 수증기가 시야를 가렸다. 정신이 몽롱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정신 차려야 돼.’

 

 연호는 지난번 월정사에서처럼 또 망상이 되살아날까 두려웠다. 그게 다 약해진 정신력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가족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마음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누나는 지금 윤지와 함께 대전에서 올라와 엄마가 입원해있는 병실에 있고, 아버지는 마음 둘 곳 모른 채 늦게까지 출판사에 계신다. 매형은 방학을 맞아 학회일로 출장을 갔고, 이번에는 미국이라고 했다. 사라진 별에 관심이 있는 그 미국인 교수도 이번 학회에 참석한다고 했다. 그 교수의 의견이 개인적으로 무척 궁금하다. 집안에 일만 없었다면 아마 누나도, 어쩌면 나도 핑계 삼아 따라갔을지도 모른다.」

 

 연호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곧 깨달았다. 가족들을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 마음이 무거워져 당황스러웠다.

 

  “미쳐 진짜!”

 

 어느덧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벌써 아침이야?’

 

 아픈 동생을 돌보러와서까지 밤을 지새우는 자신이 한심스럽기만 했다. 그때 간호사가 들어와 수액과 체온 등을 살피며 별 일 없었냐고 물었다.

 

  “네.”

 

 간호사가 나간 후, 여전히 미동도 없는 연민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누가 이토록 착한 아이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고통을 안겨주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이런 몹쓸 짓을 한 놈들을 세상 끝까지 쫓고 또 쫓아, 반드시 찾아내어 박살을 내고 싶었다. 그게 누구든 가장 악의적인 저주를 퍼부으며 죽기 살기로 복수하고 싶었다.

 

  ‘다 죽여 버릴 거야!’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리던 연호는 답답한 마음에 창가로 향했다.

 

  ‘맞다. 눈이 왔었지.’

 

 눈이 오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 밤을 지새운 연호의 눈앞에는, 마치 이 세상이 아닌 것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창밖의 세상은 분명 잿빛 하늘과 어지럽게 들어선 건물들, 그리고 시끄럽게 지나다니는 자동차들로 가득해야만 했지만, 지금은 온통 하얀색으로 물든 세상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하늘도, 건물도, 땅도 모두 눈에 묻혀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 모습은 분명 낯설지 않은, 어렴풋한 기억속의 풍경이었다.

 

 

  십여 년 전, 군을 제대한 후 아직 복학을 하기 전이었다.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할 때였고, 마침 혼자 지방으로 사진을 찍으러 나섰을 때였다. 4월 중순의 어느 흐린 날, 일기예보를 전혀 듣지 못한 상태에서 오늘도 그저 비가 오려니 하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타고는 곧 잠이 들었다. 얼마쯤 지났는지 잠결에 몸을 뒤척이다가 차창에 드리워진 커튼이 어깨에 살짝 밀리며 밖을 보게 되었다. 아직 잠이 덜 깬 그의 시야에는 온통 하얀색이 비쳐질 뿐이었다.

 

  ‘뭐지? 여기가 어디야?’

 

 그 짧은 순간, 연호는 자신이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죽지 않고서야 세상이 이토록 하얗게 보일 수는 없었다. 조금씩 의식이 돌아올 무렵, 지금이 4월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늦은 봄에도 이렇게나 많은 눈이 올 수 있다는 것에 놀라며 깨달은 것이 또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음에 대한 생각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회한은 없었고, 죽음도 행복할 수 있다는 까뮈의 소설이 떠올라 신선하기까지 했다. 철없던 시절의 경험이긴 했어도, 죽음이라는 것이 이제껏 생각했던 것만큼 무섭거나 절망적이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최초의 순간이었다.

 

 

  연호는 분명 꿈속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창밖의 세상은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물들어 버리거나 아니면 통째로 얼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창밖과 병실 사이의 물리적인 공간감을 완전히 상실한 듯 연호는 비틀거렸다.

 

  ‘너무 힘들다.’

 

 좀 전까지 불타오르던 복수심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없었다. 복수의 대상은 처음부터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까지의 모든 가설들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스스로 되물었다.

 

  「연민이는 누군가에 의해 납치되지 않았을 수도 있어. 무의식 속에서 알 수 없는 뭔가에 이끌려 다니다가 엉뚱한 곳에 쓰러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마치 몽유병환자처럼 말이지. 모든 것은 내 자신이 마음대로 지어낸 것일지도 몰라. 언제나처럼 과대망상에 빠져 마구 확대생산하며 부풀렸을 거야. 지금 저 사라진 별에 관한 문제도 내 맘대로 상상하며 지껄이고 있잖아. 그래, 그럴 거야. 연민이는 치료가 필요한 것뿐이야. 앞으로 꾸준히 치료를 하다보면 언젠가는 깨어날 거야. 반드시 우리들 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어! 그래, 그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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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4. 시간의 경계 (2) 2022 / 2 / 18 371 3 6280   
23 #23. 시간의 경계 (1) 2022 / 2 / 17 388 3 7275   
22 #22. 전조 (2) 2022 / 2 / 16 364 3 8666   
21 #21. 전조 (1) 2022 / 2 / 14 360 3 9628   
20 #20. 전나무 숲 (2) 2022 / 2 / 9 350 3 7425   
19 #19. 전나무 숲 (1) 2022 / 2 / 7 374 3 9224   
18 #18. 시한부 (4) 2022 / 2 / 3 371 3 6360   
17 #17. 시한부 (3) 2022 / 1 / 31 381 3 7689   
16 #16. 시한부 (2) 2022 / 1 / 25 410 3 5203   
15 #15. 시한부 (1) 2022 / 1 / 21 393 3 5041   
14 #14. 초신성 (3) 2022 / 1 / 19 390 3 6431   
13 #13. 초신성 (2) 2022 / 1 / 17 416 3 5329   
12 #12. 초신성 (1) 2022 / 1 / 13 428 3 6220   
11 #11. 실종 (4) 2022 / 1 / 11 432 3 5317   
10 #10. 실종 (3) 2022 / 1 / 10 450 3 4967   
9 #9. 실종 (2) 2022 / 1 / 5 453 3 5135   
8 #8. 실종 (1) 2022 / 1 / 2 434 3 6121   
7 #7. 기억 (3) 2021 / 12 / 29 449 3 6571   
6 #6. 기억 (2) 2021 / 12 / 27 457 3 6866   
5 #5. 기억 (1) 2021 / 12 / 23 492 3 8204   
4 #4. 속삭임 (4) 2021 / 12 / 20 468 3 7403   
3 #3. 속삭임 (3) 2021 / 12 / 17 502 3 6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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