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호는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탁한 새벽빛과 어렴풋이 귓가를 스치는 딸깍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아주 잠깐이었지만 혼란스러웠다. 늘 맞이하던 새벽, 낯선 대기의 속삭임,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소리는 전보다 더 심하게 탁해져 있었고, 마치 굶주린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처절하게 들려왔다. 연호는 집요하게 귓가를 맴도는 그 소리에 진저리를 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1층의 거실이었다. 어쩐지 익숙한 꽃들의 향기가, 그 중에서도 히비스커스 향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왠지 신선하게 느껴지질 않았다. 화분 속의 꽃들은 대부분 시들어 있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그 와중에도 꽃 때문에 속상해 하는 연민의 모습이 떠올라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왜 이곳에서 밤을 새웠지?’
연호는 머리를 감싸 쥐며 간밤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학원에서 수업이 끝난 후, 선화를 만나고 집에 와서.....
‘맞다, 연민이!’
연호는 동생이 걱정되어 이곳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흩어져있던 기억의 파편들을 짜 맞추어 현실을 인식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 것처럼 느껴졌지만, 이 모든 일들은 불과 몇 십초 동안 벌어진 일에 지나지 않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연호는 동생의 방으로 급히 걸어갔다. 그런데 방문이 열려있었다.
‘뭐야. 어제 엄마가 문을 안 닫고 나왔나? 왜 열려있지?’
연호는 의아해하며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숙희가 있었다. 그녀는 연민을 등지고 침대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낯빛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온몸을 떨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연호는 숙희의 뒤로 누워있는 동생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두려워 시선을 피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왜, 왜 이러고 계셔?”
“연호야. 얘가 왜 이러냐? 아무리 깨우고 흔들어도 일어나질 않는다. 네가 좀 어떻게 해봐라.”
그녀는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무슨 소리야, 엄마는? 깊이 잠들면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런 걸 가지고, 비켜 봐!”
연호는 동생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무리 흔들어도 반응이 없었다. 숨도 쉬었고, 심장도 뛰었지만, 어쩐 일인지 깨어나질 않았다. 열은 없었고, 땀도 흘리지 않았다. 다만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얼굴에는 핏기가 전혀 없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연호는 손발이 떨리고 심장이 오그라들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입안은 타들어갔고, 이마엔 식은땀이 흘렀다. 숙희는 그제야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떡해.....”
방문 쪽에는 언제부터인지 상현이 서있었다. 새벽의 낯선 인기척에 잠이 깬 그는 소리를 따라 이곳에 이르렀던 것이다.
“뭣들 해. 얼른 구급차 부르지 않고!”
상현은 큰소리로 호통 쳤고, 숙희와 연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두르기 시작했다. 연호는 먼저 119에 신고를 했다. 숙희는 위생 용품이나 옷가지 등을 챙기며 입원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상현은 대충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연호는 구급차를 기다리며 누나에게 연락을 했다. 이번에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소식을 들은 연정은 월차를 내어 급히 서울로 향했고, 진오도 오전까지 잡혀있는 강의를 끝내고 올라올 예정이었다.
병원에 도착한 연민은 응급실에서 할 수 있는 온갖 검사를 다 받았고, 많은 의사들이 달라붙어 진단을 해보았지만, 그 누구도 속 시원히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원인도 증상도 모두 안개 속이었다. 그저 단순한 혼수상태는 아닌 것 같다며 입원 수속을 밟으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건강한 30대의 성인이 사전에 아무런 예후도 없이 이런 상태에 빠진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당장 뭐라 말씀 드릴 수는 없고, 여러 가지 검사를 하면서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의료진들은 그 이상의 말을 아꼈다. 언제 깨어날 수 있는지, 이 상태가 지속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가족들이 궁금해 하는 그 어떤 답변도 들을 수 없었다.
“지겹다, 지겨워. 맨날 저 소리...”
연호는 병실을 나와 복도를 서성거렸다. 그때 병원에 도착한 연정이 복도 저편에서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누나, 여기야.”
“어, 그래. 다들 여기 계시니?”
연정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응.”
연정은 연호와 함께 곧장 병실로 들어갔다. 숙희는 연민의 손을 꼭 잡은 채 앉아있었고, 상현은 휴대폰을 보면서 연락처를 뒤지고 있었다. 연정은 침상에 누워있는 연민을 보고는 자초지종을 들을 새도 없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연정아!”
상현과 연호는 연정을 일으켜 세웠고, 숙희와 함께 다 같이 병실을 나왔다.
“엄마랑 아버지는 이제 집에 들어가. 여기는 내가 있을게. 연호, 너도 수업 있을 거 아냐. 가서 준비해야지.”
“윤지는 어떻게 하고 왔어?”
“이따가 이서방하고 같이 올 거야.”
연정은 연호를 따로 불러 다그쳤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애가 저지경이 되도록 너는 옆에서 뭘 했어? 평소에 좀 아파 보인다던가, 어떤 증상이라도 있었을 거 아냐?”
“.....”
연호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죄인이라도 된 심정이었다.
“미안하다. 괜히 너한테.....”
“아냐. 다 내 잘못이야.”
연정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울먹였다.
“저 미련퉁이가 이 지경이 되도록 참고 말을 안 했나봐. 어떡하면 좋니.”
연정은 지난번 상현의 부름으로 가족들이 모두 모였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연민이가 나한테 무슨 말을 하려다가 주저하던 게 생각나. 좀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긴 했는데, 아버지 문제로 경황이 없어서 그만. 그때 좀 더 진지하게 얘기를 나눴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무심했어.”
가족들 모두가 연민이 문제로 온 신경을 쓰고 있는 사이, 상현의 건강 또한 급격히 나빠지고 있었다. 최근 병원에서 들려온 희망 섞인 소식에 그나마 가족들 모두가 한숨을 돌리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딸의 입원으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된 그는 자신의 건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상현은 이유도 없이 혼수상태에 빠진 막내딸의 모습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딸을 잃어버린 그 지옥 같은 3일을 겪은 후부터 지금까지, 그녀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신경을 쓰며 살아온 그였다. 그런 것도 모자라 연호에게까지 책임을 나누며 죽을 때까지 동생을 보살펴야 한다고 세뇌를 시키고 또 부담을 주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어. 미안하다, 연호야.’
상현은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 삶에 대한 동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계절의 변화는 인간뿐만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있어서 그 자체로 축복이자 우주로부터 전해지는 고결한 선물이다. 하지만,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규칙한 기후의 변화는 그동안의 계절에 대한 인간의 모든 예측과 상식을 지나치게 벗어나고 있었다. 심각할 정도로 건조한 가을을 지나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지금, 각국의 기상 관측소들은 전례가 없는 혹독한 추위가 다가오고 있음을 앞 다투어 예보하고 있었다. 연호는 거의 매일같이 쏟아지는 우울한 소식이나 충격적인 뉴스에도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고, 무관심했다. 모든 존재의 사라짐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나름 변화된 모습으로 몇 주를 보냈지만, 역시 자신에게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에 이어 동생까지, 연호는 화풀이의 대상이 필요했다. 그 망할 놈의 꼭두를 또다시 소환해 원망하며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어디서 늙은 별 따위 하나가 이제껏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우리에게 이런 참담한 고통을 주는지, 어떻게 수 십 억년을 이어온 지구와 인류의 역사를 한 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는지,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역시 사람은 하던 대로 살아야 해.’
연호는 한동안 외면했던 작업실을 드나들며 관측에 필요한 장비들을 다시 세팅하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는 자료들을 정리하며 열의를 불태웠다. 이미 한계에 부딪힌 일이었고,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별로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그러다가도 다시 모든 것을 뒤엎는 일이 매일같이 반복됐다.
‘이렇게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겠어. 차라리 학원을 그만두고...’
연호는 엉뚱한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전부터 생각해오던 문제였다. 가족들 모두가 병원에는 오지 않아도 된다며 수업이나 열심히 하라고 했지만, 학원에 가서도 도무지 수업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학생들이나 학원 측으로부터 불만이 제기됐고, 이런저런 스트레스가 쌓이고 더해져 폭발 직전이었다. 사실 학원을 그만두는 문제는 오랫동안 고민해오던 문제였다. 어차피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내가 이 상태로 누굴 가르치냐?’
그나마 일반적인 직장 생활보다는 좀 낫지 않을까 싶어 지금까지 버텨왔지만, 이제는 거의 한계에 이른 느낌이었다. 결단이 필요했다. 주변의 모든 상황들이 어렵지 않게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있었다. 스스로를 이해시킬 수 있는 핑계는 만들기 나름이었다.
연호는 수업을 마치고 곧장 병원으로 가기 위해 서둘렀다. 밤 10시가 넘어 막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급했다. 행여 좋은 소식이라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이었다. 마치 조울증에 걸린 환자처럼 아침과 밤이 다르고, 또 내일이 달랐다.
「오늘은 엄마가 여기서 잘 거니까, 너는 오지 않아도 돼. 아버지도 늦는다고 하신다. 혼자 밥 잘 챙겨 먹고 자라.」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숙희가 보낸 문자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뭐야. 갑자기. 지금 날보고 어딜 가라고.”
연호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오늘만큼은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선화한테 연락해 볼까? 아니다, 아냐.’
마땅히 갈 곳은 없었다. 결국 집으로 방향을 돌렸다.
불 꺼진 방, 시든 꽃들, 그리고 소름끼치는 정적. 집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들이었다. 정적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침대에 누워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숨만 쉬고 있는 동생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제발...’
엉뚱한 소리에도 맞장구쳐주며 늘 웃어주던 동생의 모습이 기억에서 점점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연호는 밀려오는 두려움에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안 돼!’
연민의 입원으로 집안 분위기는 완전히 생기를 잃어버렸고, 상현은 마음 둘 곳이 없어서인지, 다시 출판사에 나가 늦게까지 일을 하곤 했다. 그토록 좋아하던 산에도 더 이상 오르지 않았다. 숙희는 거의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기 때문에 집안은 엉망이었다. 평소 정리를 잘하고 깔끔을 떨던 연호도 더 이상은 집안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나마 주말마다 올라오는 연정과 진오가 집과 병원을 오가며 상현과 연호를 챙겼다.
입맛이 없어 식사를 거른 연호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집안 곳곳을 어슬렁거렸다. 그러다가도 방으로 다시 들어가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그런 짓은 의미 없이 반복되었다. 그 어떤 의욕도 생기질 않았다. 그때 휴대폰의 알림음이 울리며 집안의 적막을 깼다. 문자메시지였다. 혹시나 병원에 있는 엄마가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확인해보았다.
「연호야. 보는 대로 연락 바란다!」
졸업하고 몇 번 나갔던 동창 모임. 이제는 거의 연락이 끊긴 대학교 동창모임에서 회장을 맡고 있는 친구였다.
“뭐야! 이것들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이런단 말이야.”
연호는 늘 그렇듯 답장도, 전화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모임에 나갔던 때가 언제였는지 생각도 나질 않았다. 동창들도 처음에는 연호를 챙기며 모임에 나오도록 권유했지만, 자꾸만 피하는 그를 언제까지나 기다려주지는 않았다. 이제는 모임이 있으면 의무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는 정도였고, 아무도 연호가 참석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나마 가까이 지냈던 몇몇 친구들에게서만 가끔씩 안부를 물어오는 정도였다.
연호는 이 긴 밤을 또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하다가 무심코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오늘처럼 머리가 복잡한 날에는 잠이 더욱 절실했다. 그래야 내일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고리타분한 책이 잠시나마 이 세상과 나를 단절시켜줘야 할 텐데...’
책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을 구원해 줄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 막 책을 펼치려는 순간, 또 휴대폰이 울리며 문자가 들어왔다.
「연호야. 급한 일이다! 문자 씹지 말고, 연락해라. 상현이 와이프가 오늘 아침에.....」
상현은 동창들 중에서는 그래도 가끔은 안부를 묻고 지내는 친구였고, 같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 연호가 유일하게 집에 데려온 친구이기도 했다. 아마도 시험을 앞두고 과제를 함께 해야 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으로 기억할 뿐이었다. 지금은 따로 연락을 하지는 않았고, 한 1년 전쯤에 안부를 묻는 문자를 주고받은 것이 전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상현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결혼 후에 처와 어린 아들 둘을 미국에 보내놓고 혼자 지낸다는 얘기를 모임의 회장으로부터 전해들은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들려온 소식은 부고였다. 상현의 처가 죽었다는 문자였다. 연호는 눈을 감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는, 아직도 철이 안 든 누구는 인생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지구가 멸망하네, 어쩌네 하며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헤매고 있는데, 그 친구는 벌써 아내를 잃고 혼자가 되다니, 도저히 있을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섣불리 그 슬픔을 이해한다고 위로해 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용산 ○○병원에 있는 장례식장 8호실이다. 거기서 보자.」
연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두통이 심해져 약을 먹어야할 정도였다. 결국 한잠도 못 자고 꼬박 밤을 새웠다. 어느새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어차피 다시 잠을 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상현이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계단을 내려오던 연호는 흠칫 놀라며 물었다.
“엄마가 아버지 늦는다고 그랬는데, 언제 들어오셨어요?”
“병원에 잠깐 들렀다가 누구 좀 만나고 늦게 들어왔지. 나도 조금 전에 일어났어. 근데 너는 왜 벌써 일어났냐?”
“.....”
“피곤한데 가서 더 자라.”
“아버지.”
무슨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잠이 덜 깼는지, 무심코 아버지를 불렀다.
“연민이 얘기라면 더 할 말이 없다.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단다.”
상현은 말끝을 흐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연호는 목이 말라 주방으로 향했다. 컵에 물을 가득 담아 한껏 들이킨 후, 다시 거실로 나왔다. 그 짧은 시간에 아버지를 부른 이유에 대해서 생각했고, 그리고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그래.”
“아버지. 혹시 상현이 기억하세요? 아버지랑 이름이 똑같아서 기억하실 텐데, 왜 예전에 대학교 다닐 때, 같은 과 친구라고 한 번 데려왔었잖아요. 그때 아버지가 집에 친구를 다 데려왔다고, 웬일이냐며 놀라셨는데.”
“그래? 나랑 이름이 같다고? 가만 있어보자.....”
“왜, 붙임성도 있고 넉살도 좋아서 그때 아버지랑 엄마랑 되게 좋아하셨는데, 잘 생각해 보세요.”
상현은 곧 생각이 난 듯 신문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아, 나랑 이름이 같았던 그 친구? 그래, 그래 생각났다. 근데 왜?”
연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아버지이기 전에 인생의 선배인 어른에게 혜안을 듣고 싶었다. 지금 집안 분위기도 그렇고, 연락을 끊은 지도 오래인 친구의 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아버지와 이렇게 단둘이서 진지한 얘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연호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상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당장 가보도록 해라.”
연호는 아버지의 말투에서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을 느꼈다. 더 이상 길게 말할 필요도 없었다.
“네.”
연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또 불렀다.
“아버지.”
“연호야.”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먼저 얘기하세요.”
“아니다, 너 먼저 얘기해라.”
“아니, 아버지 먼저 얘기 하세요.”
“그래, 그럼 내가 먼저 할게. 다른 게 아니고...”
연호는 아버지가 무슨 얘기를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몰라도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버지의 모습이 그렇게 애처로우면서도 초라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
“그냥, 뭐...”
“음, 강사로 지낸다는 게 너한테 맞는 일인지 잘 모르겠다. 힘들면 나한테 얘기해라. 네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사진 기술 정도면 이쪽에서 여러 가지로 쓰임새가 있을 것도 같고, 아무튼 내 생각은 전업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네 생각은 어떠냐?”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연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당장은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으로서는 분명 솔깃한 제안이었다. 마침 학원을 때려치우려던 참이었고, 분위기를 전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던 터라 아버지의 제안은 더욱 마음을 파고들었다.
“당장 어떤 대답을 듣자는 건 아니니까 천천히 생각해 봐라. 아까는 그렇게 잠이 오지 않더니, 신문을 봐서 그런지, 이제야 좀 피곤하구나. 너도 다시 들어가 자라.”
“네.”
연호는 방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했다.
‘이제 와서 아버지한테 기댈 수는 없어. 암, 없고말고. 그냥 한두 달 정도 가족들 모르게 좀 쉬어야지. 그랬다가 다시 다른 학원으로 옮기든 어쩌든 해봐야겠어.’
연호는 가족들 모르게 학원을 그만두기로 마음을 굳혔다. 잠시 동안이나마 세상을 벗어나 일체의 주변과 떨어져 꼭 필요한 일에만 몰두하기로 했다. 도피든, 은둔이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그저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차피 수입은 부모님 용돈과 차량유지비 정도로만 지출했었고, 그 외에 크게 들어가는 돈은 없었다. 그만두면서 받는 급여로 몇 달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와 관련 장비들, 하늘을 관측하는데 필요한 장비 등을 구입할 때면 일시적으로 돈이 많이 들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구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당분간 돈 문제로 고민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이것도 다 배부른 소리다. 그나마 부모님 돈으로 먹고 자고 하니까 걱정이 없는 거지...’
연호는 생각했다. 정해진 시간에 집을 드나들면서 조심만 한다면 가족들에게 들킬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내일 당장 학원에 가서 그만두겠다고 해야지. 새로운 강사가 올 때까지 한 일주일? 열흘 정도면 충분하겠지 뭐!’
결론을 내리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일단은 아버지의 충고대로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산이라고 했지? 근데 내가 검은색 양복이 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