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출발한 직후, 10시간이 넘는 비행에 진오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래도 지난 4일 동안 영국의 왕립천문학회가 개최한 포럼에 참석하여 우리 학회의 위상을 한껏 높인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만 귀국 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날, 젊은 시절 연정의 소개로 만나 지금까지 친구이자 학문적인 동료로 지내온 미국의 한 천문학교수로부터 전해들은 얘기가 자꾸만 떠올라 신경이 쓰였다. 그것은 출장을 떠나오기 전에 연정이 했던 얘기와 묘하게 겹쳐져 더 찜찜했다. 그래서인지 몹시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쉽게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으이그, 뭐야 도대체! 진지하게 생각해본다고 대답을 했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 얘기를 다시 꺼내면 연정이가 날 아주 잡아먹으려고 할 텐데, 그냥 모른 척 할까? 아냐, 그래도 내가 명색이 천문학자인데 그럴 수는 없지.’
진오는 이곳에 오기 전, 연정이 제기했던 문제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어떤 별의 상태를 포착했다고 했는데, 그런 일은 천체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다시 잘 확인해 보라고,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그 미국인 친구, 루이스 에번스도 역시 연정과 비슷한 얘기를 했다. 현재까지는 그렇게 크게 이목을 끌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와 가까운 천체의 어떤 별에 대한 특이한 움직임을 관측했다고 말했다. 여러 가지로 연정이 했던 얘기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에번스는 아직 학계에 보고할 만큼 깊이 있게 연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집중적으로 관찰을 하며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혹시라도 관심이 있다면 꼭 한 번 연정과 같이 연구해 보고 싶다는 말도 잊지 않고 전했다.
연정과 에번스는 같은 대학에서 공부한 동문이었다. 두 사람은 미래를 빛낼 젊은 천문학자로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전부터 미국항공우주국에서는 그녀와 에번스를 선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연정은 한국의 천문학계에 남아 계속 연구를 하고 싶다며 정중히 거절했고, 에번스 또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에게 더 맞는 일이라고 판단해 학교에 남았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성과만을 좇아 실적을 올리려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여느 학자들 보다는 연정과 같이 실력이 있으면서도 진지한 성향의 학자들과 함께 연구하기를 원했다. 그녀는 유학시절에도 보통의 학생들을 뛰어넘는 학문적 깊이와 통찰력을 보여주었으며, 언제나 다른 학생들의 질투와 시기, 인종적 편견에 시달리던 동양인 학생이었다. 에번스는 학문적인 면은 물론 그 외적인 면에서도 늘 그녀를 지지해주었고, 공동으로 논문을 쓰기도 했다. 평생의 학문적 동지로 지금까지 친분을 유지해오던 에번스는 이번 문제야말로 그녀와 함께 연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마침 런던에서 개최된 학회에서 진오를 만났고, 진오를 통해 연정에게 의사를 전달한 에번스는 그녀의 연락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진오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지하철을 이용해 서울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곧장 대전의 집으로 내려갔다. 함께 출장을 다녀온 동료들이 뒤풀이라도 하고 헤어지자고 했지만, 급한 일이 있다며 먼저 빠져나왔다. 집에 도착한 진오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가져온 선물을 챙겨서 대덕에 있는 천문연구원으로 향했다. 연정은 오늘 진오가 귀국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언제쯤 도착하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진오는 예정에 없던 깜짝 등장으로 그녀를 놀래 주고 싶었다. 아직 퇴근시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다른 날보다 길이 막혀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연구원에 도착한 그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마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있었소, 부인.”
“당신이야? 언제 왔어?”
“놀랐지? 지금 여기 연구원 주차장에 와있는데, 언제 끝나?”
“엥? 뭐야, 말도 없이? 공항이 아니고 이곳에 벌써 와있다고?”
연정은 몹시 놀라면서도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어쩌지? 나 오늘 많이 늦을 것 같은데?”
진오는 김이 빠진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연정의 목소리가 자신의 기대만큼 놀라거나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그래? 그럼 저녁 시간에 잠깐 나와서 식사라도 같이해. 그나저나 당신은 내가 이렇게 며칠 만에 왔는데도 전혀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아. 정말 실망이야.”
“아니야. 나 원래 그렇잖아. 알면서 뭘 그래.”
“몰라.”
“그러면 금방 나갈 테니까 같이 밥 먹자.”
연정은 잠시 시간을 내어 진오를 만나러 나왔다. 오랜만에 본 남편이 반갑긴 했지만, 선임연구원으로서 처리해야 할 공적인 업무들이 쌓여있었고. 또 개인적으로도 사라진 별에 대한 분석과 연구 등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진오가 바라는 만큼의 반응이나 표현은 무리였다. 성격이 원래 뭔가를 표현하는데 서투르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럴 때면 진오는 무척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연정은 토라진 남편을 잘 달래줘야 앞으로 피곤한 일이 덜 생길 거라고 생각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주변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연정은 주차장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잘 다녀왔어? 뭐 학회 일에, 관광에, 내 생각할 틈이나 있었겠어?”
“그걸 말이라고 해? 자기야말로 아까 통화할 때 목소리도 그렇고, 지금도 그동안 별로 보고 싶었다는 얼굴도 아니고, 정말 너무한 거 아냐?”
“으이그! 사무실에서 직원들 다 있는데 그럼 어떡해? 그리고 요 며칠 무척 바빠서 좀 예민해져서 그래. 나야 당신 오니까 너무 좋지. 이제 집안 일 안 해도 되고, 윤지도 당신이 챙길 테니까 신경 덜 써서 좋고!”
“뭐? 이 사람이 진짜?”
연정은 농담이라며 웃었다. 진오는 그녀의 환한 웃음 앞에서 더 이상 뾰로통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마음을 누그러뜨린 그는 이번 출장에서 있었던 얘기들을 자랑스럽게 늘어놓기 시작했고, 연정은 흥분한 진오의 말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그녀 또한 동생들이 찾아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는 얘기를 해주면서도 자꾸 시계를 보았다.
“나 아직 할 일이 남아서 마음이 불편해. 이따가 집에서 편하게 얘기 하자.”
“아직 진짜로 하고 싶은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는데, 와이프하고 얘기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어이가 없네.”
“무슨 얘긴데?”
“아니야. 이따가 여유 있게 얘기하는 게 좋겠어.”
“알았어. 어쨌든 이따 집에서 차근차근 다시 얘기하자. 얼른 어린이집에 가서 나대신 윤지 데리고 들어가. 둘이 열심히 놀고 있어. 알았지?”
“응. 윤지는 당신보다 훨씬 더 날 반기겠지? 빨리 가서 우리 딸내미하고 실컷 놀아줘야겠다! 근데 윤지가 아빠 오늘 오는 거, 알고 있어?”
“알고는 있는데, 자기가 데리러 오는지는 모를 거야.”
“잘됐다. 나 먼저 갈게. 이따 봐.”
연정은 서둘러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윤지는 진오의 품에서 잠이 들어있었다. 진오도 코까지 골면서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시차 때문에 무척 피곤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 애교도 없고, 재미도 없는 자기 같은 여자를 만나 늘 눈치 보며 고생하는 남편에게 새삼 미안하면서도 고맙다는 생각아 들었다.
‘남편이나 애나, 자고 있는 모습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네.’
그녀는 집안을 대충 정리한 후, 잠이 든 두 사람을 아침까지 조용히 잘 수 있도록 그대로 놔두고 서재로 돌아갔다. 밤이 깊었지만 연구원에서 가져온 자료들을 꺼내 다시 들여다보았다.
‘진짜 얘들이 왜 이러지? 뭐가 잘못 됐을까?’
수많은 데이터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의심과 의문들을 점점 해답으로 이끌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진오가 하품을 하며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기, 언제 들어왔어? 깨웠어야지.”
“왜 벌써 깼어? 피곤할 텐데 가서 더 자.”
“아냐. 내일 수업이 없어서 늦게까지 자도 돼. 근데 집에 와서도 또 일이야?”
연정이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그냥, 잠이 오지 않아서 이것저것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야.”
“괜찮아. 자기가 뭐, 한두 번도 아니고...”
진오는 체념한 듯 말끝을 흐렸다.
“안 잘 거야?”
“응. 얼마 만에 자기를 보는데, 나보고 또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고? 진짜 너무한 거 아냐?”
“자기, 피곤할까봐 그러지.”
연정은 한동안 말없이 진오를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한 진오는 괜히 긴장하고 있었다.
“자, 이제 마음 편하게 먹고, 아까 하려던 얘기, 나한테 다 해봐.”
“나 참, 기가 막혀서...”
진오는 런던에서 에번스를 만나 전해들은 이야기와 그가 한 제안에 대해서 말했다.
“당신이 나한테 했던 얘기랑 에번스가 들려준 얘기가 아무래도 서로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 좀 놀랐어.”
“진짜 에번스가 그랬어? 그 친구도 우리랑 같은 걸 봤구나. 나한테 직접 연락해도 되는데.”
“이 자료들 내가 좀 자세히 봐도 되지?”
“그럼. 제발 그렇게 해줘.”
사뭇 진지한 투로 진오가 물었다.
“하나만 물어볼게.”
“응, 뭐든 물어봐.”
“지금 당신이 연구하고 있는 게, 단순히 학문적인 호기심으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우리 지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뭐랄까, 좀 심각한 문제인지, 그게 알고 싶어.”
연정은 머뭇거렸다.
“음, 그냥 호기심은 아니고, 좀 이상하다? 심상치 않다? 이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 잘 모르겠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진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병원에 가면 말이야, 왜 의사들이 병명이 뭔지 속 시원하게 말 안 해주잖아. 지금 자기 심정이 그런 거랑 똑같은 거네, 그치?”
“맞아, 맞아. 딱 그런 느낌이야.”
“암튼 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거, 미안하게 생각해. 이제부터는 나도 적극적으로 도울게.”
“아니야. 우리끼리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오히려 자기가 그렇게 얘기해줘서, 좀 더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계기가 됐어. 그런 건 정말 내가 당신한테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해. 너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진오는 후회스러웠다.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이나 갈 것을, 이놈에 가벼운 입이 늘 문제였다.
“진짜 미안해. 내일부터 나 수업 안하고 당신 일만 도울래.”
“아이고, 교수님. 괜찮으니까 오버하지 마셔. 어쨌든 오늘은 이래저래 너무 늦었어. 일단 푹 자고, 내일부터 함께 의논해서 잘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