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아이돌이 될 상이구만.”
뭔… 개소리를 하세요. 이번 멘트는 예상 못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학생. 뒤에 조상님이 보이는데… 얼굴 기운이 참 좋아… 혹시 신령님 이야기 한번… …안녕하세요…땡땡대학교 동아리인데요… 설문조사 어떠세요 정말 얼마 안걸려요… 그래. 이런 것들은 예상 가능했다. 지하철 이용자라면 띵 띠리 띠 띵 띵. 이번 역은 한티역. 한티역입니다. 하는 지하철 안내방송만큼이나 들어봤을 문장들이니까. 특히나, 서울의 바쁜 지하철역이라면 더더욱 서글서글 웃는 상 속의 광기를 감춘 채 이곳저곳 표적을 찾아 달려드는 도를믿습니까?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건. 참신성 점수 10점 만점에 8점. 이 창의력으로 웹소설이나 써보시지 그랬어요. 생각은 잔뜩 했지만 채송아는 답하지 않았다.
먹이주기 금지. 이런 사이비들을 대할 때 1번 규칙이었다. 세부사항으로 1 다시 1번. 이어폰 빼지 않기. 1 다시 2번. 세상에서 가장 바쁜 일이 있는 사람처럼 어디서나 당당하게 걷기로 빠져나가기. 그리고 그 두개 모두 충실히 행했다. 저 아주머니의 눈웃음을 마주한다면 분명 근처 카페로 나는 순간이동 되어 내 두세시간 역시도 마수의 굴레에 빠져 사라지리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에 채송아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아니, 도망치려고 시도했다. 그 다음 멘트로 참신성 점수 10점 만점에 15점짜리가 날아오지만 않았다면.
“아이돌이 되어야, 목숨을 구하게 될거야.”
“네?”
참다참다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소리래요? 제가 푸린이라서 노래를 부르는 걸로 회복도 시키고 공격도 하고 그런건가요? 종족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아주머니? 쏘아붙일 말은 많았지만, 귀에 콕 박혀 들어온 그 말과는 다르게 말을 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도 다들 핸드폰 화면 속이나 앞을 보며 바삐 오가는 풍경만 있었지, 제 귀에 이상한 말을 속삭였던 초록 등산복을 입은 아주머니는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날아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기분 잡쳤네. 뭐, 됐어. 괜히 음악을 좋아하는 것으로 바꾸고, 더 힘차게 계단을 두개씩 밟아 착착 나아갔다. 오늘은 겨울방학 특강 첫번째 날. 고삼 채송아가 되기 직전인 이 소중한 시간을 한순간도 낭비할 수 없었다. 특히나 이게 얼마짜리 시간인데. 제가 발을 딛은 곳은 입시의 메카-대치동이었다. 서둘러 앞자리를 선점하고, 수업 시작하기 전에 단어 한번씩만 더 봐야 해. 귓가에 크게 울리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노래를 들으며 채송아는 부지런히도 움직였다.
탁, 소리가 나게 의자에 가방을 내려뒀다. 다행히 썩 나쁘지 않은 자리 선점. 들어온 시간을 생각해보면 괜찮은 성과였다. 곧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라 하나둘씩 제 자리로 돌아오는 학생들로 주위는 어수선했다. 단어장을 넘기는 순간.
“아!”
모의고사 성적표보다 매섭고, 담임선생님 상담보다 따끔한 감각이 손끝을 스쳤다. 종이에 베여 피가 송글 난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대어 대충 닦았다. 아오… 오늘 진짜 되는게 없네… 웬만한 상처보다 아픈거 같은데, 종이 카드를 슝슝 날려대는 괴도키드가 어떤 능력으로 괴도가 되었는지 알겠다며 대충 궁시렁대다 오늘치 영어단어를 머리 속에 꾹꾹 눌러담았다.
단어시험 결과는… …8점. 잘한거 아냐~? 하고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겠지만. 그것은 그들이 만점이 몇인지 모를 때 할 수 있는 소리. 100점 만점에 8점. 8을 옆으로 눕히면 무한대가 된다며 시험지를 돌려 위로도 해보았지만…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그 위로 머리를 박은채 소리없는 아우성만 질러댔다.
어떻게!! 첫 시험에서!!! 8점을!!!! 물론 채송아 자신도 잘 알았다. 이건… 제 잘못이 없다는 것을. 먼저 손가락이 문제였다. 피가 멎지 않아 생각 없이 종이 위에 손을 올렸다가, 붉은 지문이 이곳저곳 묻어난 것이다. 배부된 시험지를 바꾸려고 했는데… 학원 조교가 제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지구가 멸망하기 10분 전 연인하고 애절하게 나누는 카톡이라도 되는지 핸드폰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그 모습을 향해, 손을 애타게 흔들기를 2분, 더는 안되겠다 싶어 그냥 호러분위기의 시험지를 채우고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쓰고 있던 펜이 데굴데굴 자유를 찾아 굴러가 책상 아래로 툭 떨어졌다. 손을 뻗고, 뻗고, 뻗었는데…
닿을듯 말 듯, 닿을듯 말 듯 제 손과 밀당을 하는 펜의 모습에 올라오는 혈압만 얻었지 펜은 얻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은 다른 펜을 쓰려고 한숨을 쉬며 필통을 향해 손을 뻗는 그 순간. 와르르. 억장과 함께 필통이 무너져 책상 너머로 쓰러졌다. 안돼. 가지마! 아련하게 손을 뻗어봤지만. 늦은 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소음을 듣고 돌아본 다른 학생들의 싸늘한 시선뿐. 그리고 제한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알람소리. 이것이 바로 <채송아 대치동 입성 10분만에 성적으로 불효 저지름>사건의 전말이었다. 하지만 썩어가는 표정을 하고 주섬주섬 바닥에 쭈그려 앉아 필통을 주워담는 채송아에게는, 아주 비극적이게도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 *발-----!!!!!!!” 차마 청춘 드라마의 여자주인공처럼 상쾌하게 이 멘트를 도시의 전경이 보이는 반짝반짝한 인스타 사진용 가로등 스팟에서 외칠 자신은 없었기에, 대신 채송아는 위생캡을 씌운 마이크를 두손에 꼭 쥐고 코인노래방에 혼자 들어앉아 소리질렀다.
그리고는 불러제꼈다. 잔인한, 여자라, 나를 욕하지는마! 잔인? 세상이 나한테 이렇게 잔인할 수 있나! 원통하고 비통해 지금 누가 저를 툭 친다면 정철처럼 구구절절 나의 서러움 일대기를 고전시가로 써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와 네 여이고 내 서셜 드러보오. 그 날의 8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이후로 만난 모든 지하철과 버스를 제 때 타지 못하고 뒷꽁무늬만 애절하게보며 떠나보내기. 그리고 그 다음 버스는 하필이면 배차간격이 최소 30분. 제 옆자리에는 매번 자유분방한 골반을 지닌 이가 앉아 제 다리찢기 실력을 과시했으며 탄 지하철 칸마다 싸움이 벌어져 너 이 자식을 오늘 내가 끝내고 어쩌고 너는 머리카락도 없는게 어디서 까불고 어쩌고. 학교 급식을 먹고 체해 수행평가를 놓친건 두 번. 와이파이가 갑자기 끊겨 제출해야 하는 숙제를 못 낸 것은 한 번. 교과서를 잘못 가져와 노트필기를 완전 놓치지를 않나. 종래에는 지금 체육시간에 농구 수행평가를 하다 오른손가락 뼈에 금이 가 보호대까지 차고 있다.
솔직히 이건 소리지를만 했다. 아니, 소리질러야만 한다. 채송아는 끓는 물에 3분 넣은 것처럼 부글거리는 머리 속으로 생각했다. 도통 되는 일이 하나도. 정말 단 하나도 없어! 이정도 불운이면 제가 뭐 금기라도 어겼나 되돌아 본 적도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외국 영화에서 하듯 딱 봐도 불길한 기운 핫스팟인 장소에 쳐들어가 헬로우- 애니바디 데어- 외친 적도, 아니면 부적이 덕지덕지 붙은 흉가에 들어가보겠다 떵떵 소리지르며 그 안의 지푸라기 인형을 밟고 나온 적도 없었다. 난, 그저, 아주, 아주, 평범하게, 살고, 있던, 고등학생이라고! 괴로운 마음을 담아 다시 한 번 외쳤다.
“잊지는 마! 내 사랑을! 너는 내 안에!!! 있!!!! 어!!!!!!!!!!!!!!!”
훠우! 스스로의 흥에 젖어 추임새를 넣는 순간 너무 신나 들썩거리던 어깨가 마이크를 떨어트렸다. 육중한 그 무게가 향한 곳은, 새끼발톱 위. 아아아아아아악 – 한 고등학생의 절규가 모든 방음벽을 뚫고 빌딩을 울렸다.
그렇게 불행고딩 채송아의 또 다른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