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사장에 스무 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2열 횡대로 서서 수현의 구령에 맞춰 맨손체조 중이다. 한눈에도 수현이 가장 앳돼 보이는데, 적게는 5-6살에서 많게는 20살 차이 나는 사람들이 서핑강사인 수현의 말을 깍듯하게 따르고 있다.
“민식형님, 맨손체조 살살하시면 바다에서 쥐 나는 수 있습니다. 이번엔 안 구해드릴 거예요.”
“아~ 수현쌤 살살 좀 해주십시오.”
“그러게 술을 왜 드시고 오셨습니까? 모범을 보이셔야 할 회장님께서 앞장서서 술을 마시고 오시니 회원분들까지 전부 술 먹고 오는 거 아닙니까? 수업할 때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속을 가볍게 하고 오셔야한다고.”
“죄송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다시는 술 안마시고 오겠습니다. 다들 우리 수현쌤 얘기 들었지? 앞으로 서핑하기 전날 술만 먹고 와봐 아주. 벌금 5만원 먹일 거야.”
서울서핑동호회 와이키키의 회장이자 최고 연장자인 민식이 자신의 아들보다 어린 수현에게 그 흔한 투정도 부리지 못하고 쩔쩔매기 바쁘다.
수업 전에는 수현을 막냇동생으로 대하는 회원들이 수업만 시작되면 “수현쌤”이라 부르며 수현을 선생님으로서 극진하게 모셨다.
양양에서 나고 자라 바다와 함께 성장한 수현은 맨몸으로 바다를 자유자재로 누비는 실력자다.
물속에서 최소 3분 정도 숨 참는 것은 일도 아닌 지라 무호흡 상태로 최대수심에 도달하거나 수평으로 최대거리를 잠영하는 일에 따라 올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래선지 태식에게 서핑을 배운 첫날부터 태식의 능력치에 달하는 기술을 섭렵하더니 수현은 몇 달 만에 양브로 대표 강사이자 국내 최고의 기술을 가진 서퍼로 등극했고, 그에게 서핑 강습을 받기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양브로로 몰려들었다.
“맨손체조는 여기까지 하고요. 레벨 별로 나눠서 수업 마저 진행하고 바다로 들어갈게요.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은 민지쌤이 봐주실 거예요. 중급은 오른쪽에 계신 동건쌤이 봐주시고요. 고급 분들은 이제 물개 다 되셔서 제가 봐드릴게 없을 것 같은데요? 그냥 저랑 같이 바다로 들어가서 놀죠?”
“에이~ 그럼 쓰나. 수현쌤 실력 한 번 보고 가야지. 그거 보려고 매주 아침 일찍 서울에서 전세버스 대절해서 여기까지 오는데. 자자 다들 일동 박수!”
민식의 너스레에 일제히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오고, 수현과 양양에서 같이 나고 자란 소꿉친구 민지와 동건까지 나서서 박수를 유도하며 수현의 등을 떠민다.
서글서글한 성격과 달리 수줍음이 많은 수현은 판을 깔아주면 더 못하는지라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손사래를 쳐보지만, 결국 사람들의 등살을 이기지 못하고 쑥스러운 얼굴로 보드를 집어 든다.
“꼭 할 거면서 항상 뺀다니깐. 내가 일부러 카메라까지 가지고 왔으니깐, 수현쌤 제대로 실력 한 번 보여줘요!”
민식이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기도 전에 수현이 더 이상 못 기다리겠다는 듯이 순식간에 바다로 돌진한다.
며칠 내로 강한 태풍이 예보된 터라 파도가 평상시와 달리 꽤 거세다. 파도가 모래와 부딪쳐 만들어낸 하얀 거품을 지나 1m가 넘는 파도 위로 수현이 보드를 들고 뛰어든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환호가 터지고, 모두들 일렬로 늘어서서 관람모드에 돌입한다.
파도 위를 미끄러져 수면에 닿은 수현이 두 팔로 보드를 휘저어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에 가까이 다가가 보드 위에 선다. 수현이 물 만난 고기마냥 높이 10~50cm 정도의 귀여운 파도를 자유롭게 오가는데, 몸을 돌려 수평선을 바라보던 수현의 눈이 갑자기 번쩍거린다.
일자로 죽 그어진 수평선 위로 100피트는 족히 넘는 파도가 수현을 집어삼킬 기세로 무섭게 밀려오고 있다. 외국 서핑영상에서나 볼법한 장면에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일제히 탄식과 함께 빨리 바다에서 나오라는 외침이 쏟아진다. 다른 수강생들과 함께 막 바다에 도착한 태식은 서핑을 시작한 이래 국내에서 처음 보는 파도 높이에 아연실색하고, 또 다른 그룹을 데리고 가게를 나서던 병진을 향해 구조장비를 챙겨오라고 소리치지만, 겁에 질려 쇳소리를 내다 아예 목이 잠겨버린다.
“강습 중엔 절대 보드 안타는 놈이 오늘 같은 날 왜 들어간 거야? 김수현! 김수현! 빨리 안 나와!”
절규에 가까운 소리로 수현의 이름을 부르짖는 태식의 뒤로 민식이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괴물이 절로 연상되는 파도와 대치중인 수현의 모습에 서핑거리 일대가 아수라장으로 뒤바뀐다. 거리를 오가는 차량부터 사람까지,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해안가 근처로 뛰쳐나와 파도의 크기를 주시하며 수현의 안전을 바라고 있다.
유아용 튜브를 포함해 가게에 구비된 구조장비란 장비는 모조리 긁어모아 병진이 가게를 나선다. 그 뒤로 병진의 연락을 받은 서핑샵 사람들이 구조장비를 챙겨 바다로 뛰쳐나간다.
“뽀로로 튜브로 누굴 살리겠다고 지금 그걸 가지고 가십니까?”
“지금 그게 중요해?! 닥치고 빨리 가서 수현이나 살려내!”
뽀로로 튜브를 목에 걸고 있는 병진의 모습에 성인용 튜브에 대형 보트, 산소호흡기 장비 등을 챙긴 사람들이 같은 말을 하고 지나간다. 떠돌이였던 자신을 친형처럼 스스럼없이 대해준 수현은 병진에게 그냥 가족 그 자체였다. 그런 동생이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참담한 현실에 병진의 정신은 거의 나간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병진의 눈에 혼란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비웃듯 방파제에 독야청청 앉아 실실 쪼개고 있는 진호가 들어온다.
“웃어?”
하와이안셔츠 차림에 선글라스를 쓰고 헤드폰을 끼고 망원경을 손에 들고 있는 진호는 병진의 말대로 진짜 웃고 있다.
“아 진짜. 태식이 아들만 아녔으면 넌 진즉에 내 손에 아작 났어.”
태식이 끓어오르는 화를 억지로 우겨넣고 바다로 달려가는 사이, 망원경을 다시 눈앞에 갖다 댄 진호의 입매가 더 위로 올라간다. 별을 좋아하는 태식의 몇 안 되는 보물 중 하나인 망원경은 진호의 방을 꾸미는 장식품으로 전락해 있었는데, 그 아비에 그 아들인지 진호는 자신의 방을 본 순간 망원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었다.
“진짜 바보 맞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진호가 들고 있는 망원경이 바다로 향해있고, 망원경 렌즈에 서핑보드에 올라탄 수현의 모습이 맺혀있다.
파도를 약 5m 앞에 남겨두고 수현이 팔을 양옆으로 흔들며 중심을 잡는다. 수현이 탄 보드 위로 파열된 파도 조각들이 수현의 머리 위까지 치솟아 올라 수현의 시야를 가리는데도 수현은 겁에 질리기는커녕 웃고 있다. 새파란 하늘을 향해 샛노란 꽃잎을 활짝 펼친 해바라기처럼 파안대소하는 수현의 얼굴에서 온전한 자유가 느껴진다.
지난 18년 동안, 젖먹이 시절 부모를 여의고 넉넉지 못한 환경에서 할머니 손에 컸음에도 불구하고 티 없이 밝게 자란 착한 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아온 수현은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본의 아니게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고 살아왔다. 싫어도 좋고, 별루여도 좋고, 좋으면 더 좋은.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좌우명에 걸맞게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숨기고, 그저 억울하게 죽은 엄마아빠의 자랑스런 아들이자 자신 때문에 고생만 하는 할머의 자랑스런 손자가 되기 위해 “척”을 하며 살아왔다.
바다는 갖은 부담감을 짊어진 수현이 온전하게 자신을 드러내놓고 숨통을 틔울 수 있는 휴식공간이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받아주는 친구였다. 그렇기에 남들 눈에 아무리 무서운 파도도 수현에겐 몸으로 치고받고 싸울 수 있는 반가운 친구, 그 뿐이었다. 그래서 만나기 어려운 100피트 파도를 앞에 둔 수현은 황홀경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우연히 친구를 만난 것과 진배없는 이 감격적인 순간을 수현은 누구에게도 간섭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해안가엔 이미 수현을 구하기 위해 구조용 보트와 장비들이 대기를 하고 있었으며, 해안구조 자격증이 있는 태식이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전동보트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수현이 있는 곳으로 방향키를 돌리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왜 조금만 재밌어지려하면 그걸 못 참고 끼어들까? 김수현 안 됐네.”
망원경으로 수현을 주시하고 있던 진호가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사실, 이 해안가에서 웃고 있는 사람은 진호와 수현, 단 두 사람뿐이었다. 그때, 수현이 진호의 망원경을 똑똑히 쳐다보고 씨익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똑똑히 보라는 듯 검지와 중지로 자신의 눈과 진호 쪽을 몇 번 번갈아 움직이더니 가속페달을 밟듯 코앞으로 다가온 파도를 향해 돌진한다.
“미친새끼. 지기만 해봐! 가가가가가가! 그래! 들이받아!”
진호의 입에서 주체할 수 없이 환호가 터져 나온다. 진호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솟구쳐 오르는 에너지에 망원경까지 집어던지고 방파제 위에 혼자 방방 뛰면서 파도와 맞붙은 수현을 열렬히 응원한다.
“정신 빠진 놈을 봤나? 나 건들지 마라. 아무리 태식이 아들이라도 사람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하고 날뛰는 놈은 그냥 두면 안 돼. 내가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새끼 정신교육 시킨다.”
방파제와 지척에 있는 모래사장에서 훤히 보이는 진호의 모습에 병진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내던지며 화를 참지 못한다. 그때, 사람들의 탄식이 일제히 환호로 바뀌고, 병진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파트 8층 높이의 파도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간 수현이 잠시 후 파도 끝에 서서 손키스를 날린다. 그리고 환호를 유도하는 제스처를 취하자마자 앞으로 고꾸라지는 파도를 타고 그림같이 미끄러져 내려와 순식간에 해안가에 닿는다.
수현이 보드를 밟고 모래바닥 위에 서서 물에 젖은 짧은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올린다. 그리고 방파제 위에 서 있는 진호를 단번에 찾아내 바라본다. 수현이 어깨를 쫙 피고 서서 검지와 중지로 또 자신의 눈과 진호의 눈을 번갈아 가리킨다. 진호의 통제에서 벗어난 얼굴근육이 사정없이 씰룩거린다. 활짝 핀 두 사람의 얼굴이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처럼 그늘 없이 맑게 빛난다.
‘봤어?’
‘좀 하는데?’
‘앞으로 형님이라 불러라.’
‘미친놈.’
‘형님한테 말버릇 좀 보소?’
‘다음엔 피해.’
‘어?’
‘위험하잖아.’
‘전혀. 난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두 사람만이 들리는 대화가 즐겁게 오가다 뚝 멈춘다. 애써 만든 모래성이 파도에 쓸려가듯 웃음기 가신 두 사람의 얼굴 위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