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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열여덟 스물아홉
작가 : 애플타이거
작품등록일 : 2020.9.30

열여덟, 양양, 한여름, 새파란 바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2주간 전부를 나눈 수현과 진호가 11년 후, 청춘의 끝자락에서 재회한다.

 
4.
작성일 : 20-09-30 15:35     조회 : 275     추천 : 0     분량 : 5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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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진호가 물에 축 늘어진 꼴로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는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내리꽂히는 태양빛에 바다 감상은 1초 만에 끝이 난다. 그대로 벌러덩 드러누운 진호가 고래를 이러 저리 돌려 사방을 훑는다.

 

 아무도 없다.

 

  진호가 몸을 압착시키고 있던 옷을 훌러덩 벗어던진다. 팬티까지.

 

  “이거지.”

 

  날것 그대로의 해방감을 만끽하며 진호가 배를 깔고 드러누워 팔베개를 한다.

 

  뜨거운 태양빛에 새하얀 진호의 피부가 새빨갛게 익어간다. 몸을 뒤집을 타이밍을 놓쳤는지 잠에 빠졌는지 1도 화상이 염려되는 상황인데, 미동이 없다.

 

  어느새 바다 위로 핑크빛 노을이 물들고, 그 위로 물을 한껏 머금은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걸린다. 노을빛처럼 익은 진호의 등 위로

 사람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다.

 

  뒤축이 꺼진 삼선슬리퍼를 신은 발이 모래 위를 저벅저벅 걸어오다 진호의 곁에서 멈춰 선다.

 

  “네가 양진호냐?”

 

  통닭구이인지 사람인지 싶은 진호의 시뻘건 몸뚱이가 움찔거린다.

 

  “여기가 이비자냐? 미친놈 맞네.”

 

  앙큼하게 솟은 진호의 엉덩이 위로 색 바랜 검정색 티셔츠가 무심하게 툭 떨어진다.

 

  “여기 오면 잔소리 할 사람 없을 줄 알았는데, 더럽게 말 많네.”

 

  누가 볼까 주변을 살피느라 분주한 수현과 달리 진호는 느긋하기만 하다. 진호의 엉덩이를 가리고 있던 티셔츠가 모래 위로 툭 떨어지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진호의 매끈한 몸이 노을빛을 받아 반짝인다.

 

  “내 이름 어떻게 알았냐?”

 

  수현이 답 대신 진호에게 등을 지고 선다.

 

  “또 씹냐?”

 

  진호가 몸을 일으켜 세워 뒤돌아 서있는 수현과 마주보고 선다.

 

  “옷 좀 입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진호가 보폭을 좁혀올수록 진호를 바라보는 수현의 시선이 길을 잃고 불안하게 흔들린다.

 

  “나 좀 보지? 사람 무시하는 게 취미야?”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진호의 눈빛에 수현이 시선을 돌리고 진호가 다가온 거리만큼 뒤로 물러선다.

 

  “불 없어.”

 

  “안 물어봤는데?”

 

  퉁명스런 수현의 말에 진호가 띠껍게 반응한다. 진호는 첫 만남부터 줄곧 개운치 않은 수현의 태도가 탐탁지 않다.

 

  “혹시나. 필요할까봐.”

 

  “내 생각을 끔찍이도 해주네? 진즉에 이렇게 해줬으면, 이 시간에 이런 꼴로 너 같은 놈이랑 같이 있진 않았을 거 아냐.”

 

  무례하고 재수 없는 진호의 태도에 수현이 화를 낼 법도 한데, 어쩐 일인지 일체의 반응이 없다. 그저 로봇과 같은 톤으로 필요한 말만 하고 있다.

 

  “태식이 형님이 너 데리고 와달라고 부탁해서 다시 온 거야.”

 

  “너 혹시...”

 

  “태식이 형님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야? 설마 아들일리는 없고.”

 

  “아들 맞아. 그런데 너 고약한 취미가 있다? 사람 말을 왜 이렇게 잘라먹고, 왜 이렇게 돌려?”

 

  “아들이라고?”

 

  “너 공부 못하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도마뱀처럼 수현이도 진호의 말을 끊어내고 정체 모를 감정의 격랑 속에서 도망치려 하지만, 그럴수록 진호의 페이스에 말려들기만 할뿐이다.

 

  사실, 이 때의 상황은 수현에게 최초의 경보였다.

 

  18년간 잘 쌓아온 인생의 테트리스를 망가트리고 싶지 않으면 무시하고 돌아서라는. 그러나 수현은 돌아서고 싶어도 돌아설 수 없었다. 머리는 그렇게 하라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안가 깨달은 사실이었지만, 수현의 머리도 그때, 그 순간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수현은 처음으로 복순할매의 잔소리 없이 일기를 썼다.

 

 

  바닷가에서 난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정신이 아득해지고 내가 누구였는지 누구인지 잊게 만드는 신기루 같은 감정에 휩싸여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감정을 끝까지 따라가 보고픈 낯선 흥분감에 젖어들고 있었다.

  비록 나의 선택이 모두의 반대를 무릎 쓰고 떠난 길에서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와 같은 위대한 업적이 되기는커녕 세상의 질타를 받거나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로부터 매장될 게 불 보듯 뻔한 일이 될지라도...

  궁금하다. 걔가.

 

 

  “너야 말로 말끝을 왜 이렇게 흐리는데? 나한테 뭘 그렇게 끄집어내고 싶어서?”

 

  수현이 진호에게 성큼 다가서서 진호를 빤히 쳐다본다. 진호의 입 꼬리가 스윽 올라간다.

 

  “아니 그냥.”

 

  진호의 반응에 수현의 심장이 요동치고, 지레 겁먹은 수현이 다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진호가 어느 정도 마른 자신의 옷을 걸쳐 입고, 바닥에 떨어져있는 티셔츠를 집어서 수현에게 던진다.

 

  “그렇게 자랑할 만한 몸은 아닌 거 같은데?”

 

  “지는.”

 

  “한 마디를 안 지네.”

 

  “너야말로.”

 

  둘 사이에 티키타카가 이어지는 동안, 진호가 주머니에서 바닷물에 절은 담뱃갑을 꺼내 축 늘어진 담배 한가치를 입에 문다. 그리고 수현이 언제 끌어다 놨는지, 자신의 옆에 놓여있는 캐리어를 열어 옷 속 깊숙이 넣어둔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수현을 빤히 바라보면서 아주 깊이 한 모금을 빤다.

 

  진호의 입에 물린 담뱃대가 타들어 가면 갈수록 수현의 마음도 야릇하게 타들어간다. 널뛰는 감정을 다잡으려 시시각각 변하는 수현의 얼굴을 진호가 무료하게 지켜본다. 수현은 모래에 다리를 파묻지 않는 이상 혼자 서있기도 힘든 상황인데, 진호의 신경은 얼마 남지 않은 담뱃대에 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부터 태식이 형님네 가는 손님인 줄 알았으면 내가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태식이 형님 생긴 것과 다르게 술 담배 안 하시고, 호흡기가 안 좋으셔서 남이 담배 피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셔. 특히 미성년자라면 더더욱 그렇고. 네 말대로 네가 진짜 태식이 형님 아들이라면 더더더더 안 좋아하실 거야. 그러니깐...”

 

  “더럽게 말 많네.”

 

  “아 미안.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없었어.”

 

  지금까지 핑퐁처럼 이어져온 신경전과 다른 대화 양상에 진호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끝으로 비벼 끄고, 뭐 잘 못 먹었냐는 얼굴로 수현을 쳐다본다.

 

  재밌어지려고 했는데, 김샜다는 얼굴이다.

 

  “갑자기 왜 이래? 사람이 너무 일관성 없는 것도 안 좋은데. 혹시 생리해?”

 

  “야.”

 

  생리라는 말에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날뛰던 수현의 마음이 겨우 진정을 되찾는다.

 

  “생긴 거랑 다르게 너무 예민하신 것 같아서. 너 땜에 오랜만에 힘썼더니 배고파 죽겠다. 잔소리는 가면서 들어줄 테니깐 아빠 가게나 좀 앞장서서 가봐. 갈 때 가더라도 얼마나 잘 사나 확인은 하고 가야지.”

 

  자신의 짐을 내팽개치고 휭 하니 앞서 걷는 진호 뒤로 수현이 진호의 캐리어를 챙겨 쫄래쫄래 뒤따라간다.

 

 

 

  좁은 2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다양한 상점들과 해안가가 늘어서있다. 바다를 뒤덮은 핑크색 노을 덕분에 노화된 건물들부터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까지 아름답게 보일지경이다.

 

  핑크빛 노을 필터 속으로 수현과 진호가 일렬로 걸어 들어온다. 생기 넘치고 풋풋한 열여덟 소년 그 자체다.

 

  진호의 캐리어를 끌고 앞서 걷던 수현이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본다. 진호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안 들려서 돌아본 수현의 입에서 절로 “네가 그럼 그렇지.”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인도를 따라 나란히 늘어선 방파제 위에 진호가 등을 깔고 누워있다.

 

  “야 뭐하냐.”

 

  “궁금하면 너도 누워봐.”

 

  더 이상의 질문은 사양한다는 듯 진호가 헤드폰을 쓰고,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든다. 수현은 별말 없이 방파제 앞에 캐리어를 세워두고 진호의 머리맡 옆에 앉는다.

 

  땀에 젖은 머리와 발갛게 상기된 볼이 닮은 두 사람의 얼굴이 묘하게 오버랩 된다.

 

  진호의 발이 까딱거리고, 수현의 발도 그에 맞춰 까딱인다. 기지개를 켜는 진호의 손이 방파제 난간을 잡고 있는 수현의 손에 닿았다 멀어졌다 또 닿았다 다시 멀어진다.

 

  “배고프다며?”

 

  수현이 부산스럽게 방파제에서 내려서더니 진호의 답도 듣지 않고 휭하니 앞서 간다. 배를 깔고 돌아누운 진호는 턱을 괴고, 수현이 아스라이 멀어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본다.

 

 

 

 

 

  “형님~ 태식이 형님~”

 

  롱보드 수 십대가 세워져있는 가게 앞에 수현이 멈춰 선다. 태양이 내리꽂히는 남미를 연상시키는 짙은 노란색으로 도색된 1층 건물 정 가운데에 간판 양브로가 앙증맞게 붙어있다.

 

  가짜 야자수가 놓여있는 문 사이로 수현과 똑 닮은 태식이 새까맣게 탄 얼굴과 대비되는 새하얀 이를 훤히 드러내며 허둥지둥 나온다.

 

  “진호는?”

 

  애초에 수현의 답은 바라지도 않았다는 듯 태식이 수현을 밀쳐내고 무뚝뚝한 얼굴로 서 있는 진호를 반색하며 맞이한다. 그러나 진호는 두 팔 벌려 자신을 안으려는 태식의 손길을 무심하게 비켜서며 방어막을 세우듯 자신의 몸 앞에 캐리어를 둔다.

 

  “잘 있었어?”

 

  갈길 잃은 손을 머쓱하게 거두고 태식이 용기 내어 진호에게 살갑게 말을 건다.

 

  “무슨 상관이에요.”

 

  “야 아버지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귀에 거슬리는 진호의 반항적인 말투에 두 부자를 위해 자리를 피해있던 수현의 입에서 절로 핀잔이 튀어나온다.

 

  그러나 수현을 가로막고 선 태식은 특유의 사람 좋은 얼굴로 진호에게 멀리서 오느라 피곤했지? 와줘서 고맙다, 얼른 들어가서 밥 먹자 등등 갖은 달콤한 말을 속사포로 내뱉고 진호의 캐리어를 번쩍 들어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호박! 가서 캐리어 갖고 나와. 내가 언제 밥 먹는다고 그랬어?”

 

  “배고프다며. 좀. 어?!”

 

  수현의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말에 탐탁지 않은 얼굴로 짝다리를 집고 서있던 진호가 피식 웃으며 수현을 툭 치고 지나간다.

 

  “그렇게 해서 손이 닳겠냐?”

 

  진호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수현이 불나게 비벼대던 양손을 툭툭 털고, 음식준비로 바쁜 태식의 곁으로 너스레를 떨며 다가간다.

 

  “이야~ 아들 온다고 너무 힘 주신 거 아닙니까?”

 

  “무슨. 너한테도 자주 해준 음식이잖아.”

 

  가게 안쪽에 놓인 6인용 식탁이 갈비, 잡채, 미역국, 초밥, 회, 우동, 피자, 햄버거 등등 태식이 할 수 있는 요리들로 가득 채워졌다.

 

  “형님 오늘 손님 많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이걸 언제 다 하셨대요?”

 

  “그래서 승철이네 가게로 다 몰아줬지.”

 

  “안 그래도 양브로가 손님 다 가져간다고 승철형님이 저 붙잡고 신세한탄 하셨었는데.”

 

  “요 며칠 밥 먹으러 오라고해도 안 와서 왜 그러나 했더니 그 이유였어? 귀여운 자식. 수현아, 그나저나 복순할매가 너 편에 호박전 보냈다고 전화 왔었는데, 어째 손이 가볍다?”

 

  “아... 할매한테는...”

 

  “또 노래 부르는데 정신 팔려서 어디에 걸려 넘어졌네. 넘어졌어. 걱정 마. 이미 복순할매한테 맛있게 먹었다고 인사 다 했어.”

 

  “역시 형님밖에 없습니다.”

 

  친구인지 부자인지 경계가 모호한 태식과 수현의 살가운 대화에 진호가 슬쩍 가게 밖으로 나와 선다. 왠지 둘 사이의 대화를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그의 얼굴에 머쓱함이 어린다.

 

  그 사이 어둠이 내려앉은 밤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던 진호가 차도를 건너 방파제 위에 올라앉는다. 습관적으로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제멋대로 꾸겨져있는 담배들 중에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것을 입에 물고 불을 찾는데, 또 없다. 캐리어 안에 다시 던져놓은 기억이 스쳐지나간다.

 

  “공기는 더럽게 좋네.”

 

  진호가 하릴없이 맨 담배를 입에 물고 한가로이 밤바다에 젖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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