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
“……왜 안 열리지.”
처음 내가 문을 열려고 했던 때와 같았다.
콰앙!
곰탱이는 들고 있던 무기로 문손잡이를 내리쳤다.
후두둑.
이내 문손잡이는 힘없이 부러졌고 남자는 몸으로 저택 문을 열어보았다. 그러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멀쩡한 문을 망가뜨려요, 대체?! 이젠 열쇠 구해봤자 나가지도 못하게 생겼잖아요!”
“……약속 시간. 못 맞춘다. 못 맞추면. 악마 자식. 화낸다. ”
악마 같은 놈이라는 게 누구를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곰탱이는 꽤나 두려운 듯 보였다. 그는 자리에 주저앉은 채 두 눈을 꾹 감았다.
덩치에 안 맞게 털썩 주저앉은 모습을 보니…,
‘잘하면 내가 구슬릴 수도 있겠는데?!’
예상보다 단순한 녀석인 것 같아 설레기 시작했다. 원래 힘과 지능은 반비례하기 마련이다. 녀석은 무식하게 악령만큼 힘이 세니 지능은 악령만큼이나 낮을 성 싶었다.
“저기요, 곰탱… 아니, 흑곰 닮은 아저씨.”
“흑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다. 하지만. 아저씨. 아니다.”
“……그래요, 그럼. 흑곰을 좋아하는 친구야. 지금 우리가 여기서 가만히 있다가는 꼼짝없이 여기 갇히게 생겼어. 알아?”
“갇히지 않는다.”
녀석은 벌떡 일어나 다이닝룸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탁자에 있던 의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그 의자를 창문을 향해 집어던졌다
쾅, 우지끈.
그러나 의자만 부서지고 창문은 흠집 하나 나질 않았다.
“…악마 자식. 이런 곳에. 보내다니. 복수 할 테다.”
곰탱이는 다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고 헤르미안은 곰탱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친구야. 너를 이곳에 보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네 말대로 복수 해야지. 근데 그거 알아? 복수하려면 여기서 나가야 된다?”
그 말에 곰탱이는 고개를 들었다가,
“근데 내 생각엔 말이지. 여기서 나가는 건 꽤 복잡한 일이 될 것 같아.”
복잡하다는 말에 다시 고개를 내렸다.
“하지만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야. 꽤 쉽게 해결 될 수도 있어.”
그제야 고개를 쳐들고 헤르미안을 향해 물었다.
“불가능이다. 네 힘. 약하다. 한 주먹거리.”
“……그래. 내가 한 주먹거리밖에 안 될지는 몰라도. 그래도 여기에 관해 아는 건 아주 많거든? 가끔씩은 힘보다 이, 지능이 필요할 때가 있단 말이야.”
엄지로 내 얼굴을 가리키며 내가 바로 이 게임 속의 브레인이라는 시늉을 해보았다. 그 모습을 보던 곰탱이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끅끅끅.”
“아니… 넌 무슨 웃는 것도 그렇게 무섭게 웃어.”
“끅끅끅. 지능.”
기분이 매우 불쾌해졌다.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으나 자칫하다 기분을 상하게 만들 수도 있었으므로 일단은 비위를 맞춰주기로 했다.
“어쨌든 지금 우리의 목표는 같아, 여기서 나가는 것. 아무래도 여기서 나가기 위해선 단순히 문을 부수고 탈출할 수는 없고 미션을 깨야만 할 것 같아.”
“미션을. 깬다?”
녀석은 주먹을 쥐고 바위를 부수는 시늉을 해보였고 기가 막혔다.
“그렇게 깨는 걸 말하는 게 아니고… 그냥 여기서 탈출하기 위한 조건 같은 건데. 음. 길게 설명하면 머리 아플 테니까 그냥 간단히 말할게. 내 생각에 우린 2층으로 가야 할 것 같아.”
“2층으로 말인가?”
“그래. 네가 버린 열쇠가 2층에 있잖아.”
“열쇠를 찾으면 뭐하지?”
곰탱이 녀석은 제가 부순 문손잡이를 가리켰다. 정말 하나같이 맘에 안 드는 녀석이었다.
“여긴 단순한 저택이 아니야, 곰탱… 아니, 친구야. 평범한 경우라면 문손잡이를 부쉈을 때 곧바로 문이 열렸겠지? 하지만 여긴 그게 먹히지 않는 마법의 공간 같아. 보통 이런 마법의 공간에는 모든 것에 순서라는 게 있어. 순서를 지킨다면 문손잡이가 없어졌더라도 문이 열리기도 해.”
말을 다 내뱉고 나서야 곰탱이 녀석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먹었을까 싶은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곰탱이는 핵심은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이젠 뭘 해야 하지?”
“보통 이렇게 큰 저택이라면 열쇠를 하나씩만 만들어 두진 않아. 그러니까 네가 아주 귀중한 열쇠를 2층에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고는 해도, 분명 비상 열쇠가 있을 거란 말이지. 일단 그걸 먼저 찾자.”
“……여긴. 도대체. 누구 집인 건가!!”
곰탱이는 이해를 하려다 힘들었는지 쿵쿵 소리를 내며 발을 굴렀다. 차마 내 집인 것 같다고는 말할 수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일단은 나가는 게 우선이잖아. 나가는 방법 먼저 찾자.”
“…알겠다. 그럼 열쇠를 또 찾으면 되는 거로군.”
그렇게 녀석은 반대편 복도로 사라졌다. 열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단서를 찾아야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그래. 일단은 한 번 믿어보자….’
나는 아까 전 딱 하나 열려있던 하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열쇠 꾸러미가 없어졌다고 한들, 모든 게임엔 히든 루트가 있는 법.
보통 탈출할 방법은 단서를 통해 많이 남겨둔다. 그렇기 때문에 헤르미안은 장식장에서 보았던 종이 더미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그건 단순한 종이쓰레기가 아닌 찢겨진 일기 조각이었다.
「낸시의 일기장
오늘은 헤르미안 아가씨께서 많이 아프셨다. 그래서 특제 파이를 만들어보았는데 다 남기셨다. 특제파이에서 쇠맛이 난다고 하셨다. 몸이 아프셔서 미각에도 문제가 생기신 듯 했다. 하지만 황태자 전하와 후작가의 쌍둥이분이 오시니 금방 기운을 차리셨다.」
아무래도 헤르미안이 어릴 때 썼던 일기인 모양이다.
「세 분은 한 번씩 파이를 먹고는 반하셨는지 서로들 아가씨께 특제 파이를 먹여주겠다고 난리가 났다. 왠지 이럴 것 같아서 여러 개 굽고 있었는데.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드실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쁘다.」
아니야, 그게 아닌 것 같아, 낸시.
「모두들 아가씨를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그 중에 제일은 시니어님이다. 제 파이까지 아낌없이 헤르미안 아가씨께 주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로니님은 부끄러우신지 파이를 주는 손이 머뭇거리기만 하신다.
그에 반해 반스타인 황태자님은 아가씨께 한 입도 주질 않고 본인이 다 먹는다.
흠. 황태자 전하… 어린 나이에 우수에 찬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모습을 보니 꽤나 이기적일 것 같아. 아가씨를 쉽게 넘겨드리진 못하겠다!」
왜 난 이 대목에서 반스타인에게 감동 받은 걸까.
「아가씨께서는 몸이 나은 뒤에도 말씀하셨다. 네가 만든 특제파이에서 쇠 맛이 나, 낸시.
말도 안돼요! 했더니 말이 된다면서 미니 연금술 키트를 사오셨다. 그 안에 내가 만든 파이 재료들로 열쇠를 합성하셨다….」
…어떻게 하면 파이 재료들로 열쇠를 합성하는 거지?
「신기하게도 아가씨께서 만든 열쇠는 저택의 모든 방을 열 수 있었다. 그 열쇠는 마스터키로서 아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으나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사라졌다.
아아, 그 열쇠의 수명도 파이의 유효기간과 같았다. 슬프도다, 이별이여.」
낸시는 쇠 맛이 나는 파이 하나에도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감성적인 친구였다.
「그러나 이번 기회를 통해 깨달았다. 분명 비상시에는 이런 열쇠가 필요할 테니, 하나 만들어 두는 것이 좋겠다고. 언제든 미리 준비를 해두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그래! 분명 낸시라면 기대를 져 버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분명 어딘가에 비상 열쇠를 만들어 뒀을 거야!’
「그리하여 이렇게 특제 파이를 만드는데 들어간 재료들을 적어둔다. 특제 파이를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는…」
“…….”
비상시에 특제 파이 만들 시간이 어디 있느냐며 묻고 싶었지만 일단은 잠자코 보기로 했다.
「특제 파이를 만드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일단 주방 화덕 근처에 놓아둔 미니 연금술 키트를 챙긴다.」
“그래, 이것까진 뭐 쉽네.”
「달맞이 절벽 꼭대기에 있는 달빛 바위 가루를 넣고 물을 넣는다.
다음은 과수원에서 특별히 얻어 온 벼락 맞고 떨어지지 않은 다람쥐집의 호두를 껍질 채 넣고 반죽한다.
마지막으로 백 년에 한 번 개화하는 실버 플라워를 얹으면 끝!」
…….
“미친. 넌 도대체 뭘 만든 거야.”
더구나. 이걸 도대체 어떻게 저택에서 만들라는 거야? 낸시도 제정신은 아니라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콰아아앙!!’
2층에서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특제 파이 제조법을 주머니에 구겨 넣은 뒤,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2층을 가로막던 문이 산산조각 나있었고 그 앞에는 곰탱이가 제 주먹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설마 지금 문을 부순 거야?”
“저택 문. 미션 못 깨서 안 부셔지지만. 2층 문은 잘 부셔진다.”
여태껏 전혀 간단해보이지도 않는 특제 파이 제조법이나 겨우 찾았는데, 곰탱이 녀석은 단순무식하게 문을 부셔버렸다.
“끅끅끅. 지능.”
마치 나라 잃은 표정이던 헤르미안의 얼굴을 흘끗 본 곰탱이 녀석이 웃어 젖혔다.
“야. 난 일부러 안 부수고 다른 방법을 찾으려 했던 거야.”
“끅끅끅.”
“…….”
저 재수 없는 녀석에게 하나하나 대응해주자면 한없이 피곤해질 것 같았다. 일단은 2층으로 연결된 지금 이 시점엔 쓸데없는 감정은 뒤로 하고 쌍둥이들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일단 조심해, 친구야. 아까 전에 대검 봤지?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 썰려. 최대한 숨죽이고 가야… 으헉!”
수커어어엉, 하는 거대한 소리와 함께 대검이 휙 날아들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웠던 터라 완전히 피하지 못한 헤르미안의 팔에 깊은 상흔이 생겼다.
“너… 네가 왜?”
그러나 그 상흔보다 놀라운 건 대검의 들고 있는 자였다.
“나랑 …자.”
“뭐…?”
눈앞의 사람은 크리처화가 진행 중인 듯, 대검을 든 팔에 가시돌기가 돋아나고 있었다. 그것은 무서울 정도로 해맑게 웃으며 헤르미안을 향해 다가왔다.
“나랑 놀자.”
그녀는 바로 시니어였다.